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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움 즐거움 Jun 13. 2024

아침 8시, 운동장을 달리는 여학생을 보았다.

너 왜 뛰는 거니

아침 8시, 한 여학생이 텅 빈 운동장 트랙을 혼자서 돌고 있다. 양팔을 앞뒤로 교차시키며 일정한 보폭으로 달리는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무선 이어폰도, 스마트폰도 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린다. 곧게 세운 허리, 안정적인 호흡,  리듬감 있는 속도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구석이 없다.

왜 저렇게 뛰는 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고 교무실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2층으로 올라가려는 찰나, 현관 통유리를 통해 아이의 모습이 후다닥 비쳤다가 곧 사라졌다. 몇 바퀴 뛰다 말겠지 했는데 계속 뛰고 있는 것이었다.

'오옹? 설마 아직도 계속 달리고 있는 거야?'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아이의 표정은 힘든 기색 하나 없다. 스피드 역시 조금도 줄어지지 않고 일정하다. 이 더운 날에 걷기만 해도 땀이 나는데 장난이 아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을 보니 혹시나 육상을 전공하는 아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침 운동을 끝마친 아이가 통학로 쪽으로 다가오길래 얼른 밖으로 나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와, 우리 학생 너무  잘 뛰네요. 혹시 시합 준비하는 육상 전공 선수인가요?
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운동선수 아니에요. 흐흐.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이야. 예의는 또 어찌나 바른지 모른다.
"진짜? 쌤은 우리 친구가 운동하는 학생인가 보다 혼자 했지 뭐야. 운동장은 도대체 몇 바퀴 뛴 거예요? 아까부터 계속 뛰던데?"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열 바퀴요. "
이것은 실화인가, 진짜 열 바퀴라고? 우리 학교 운동장은 200m도 넘는 진짜 큰 사이즈인데 이 아이 뭐냐.
"어머, 대단하다. 달리기 연습은 언제부터 했어요?"
아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고백하며 쑥스러워한다.
"어제부터 뛰었거든요. 첫날이라 세 바퀴만 뛰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좀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나 보니 열 바퀴가 되었네요."  


이 아이는 손흥민, 박지성, 김연아 재질인가. 강철 심폐 지구력이구먼! 그런데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아침부터 땀을 뺀 거니, 누가 시켜서 한 건지, 도대체 왜 달린 건지 그 이유를 물어봤다.

"너, 근데 아침부터 운동장은 왜 뛰었는지 그 이유 좀 알려. 혹시 부모님이 시킨 거야?"
아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누가 시켜서 달린 건 아니고요. 그냥 제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줄넘기를 할 때 자꾸 숨이 차길래 체력을 키우고 싶어서 한 번 달려본 거예요."
점입가경이다. 아니, 도대체 이 유니콘 같은 아이는 몇 학년 어린이인 거야. 뉘 집딸인지 너무 예쁘잖아. 당장 이름을 묻고 싶었지만 아이가 부담스러울까 봐 호구조사는 깊게 안 했다. 단지 4학년 몇 반이라는 것만 알았다. 네 모습을 보며 내가 무지 감탄했다는 뜻을 전하고 싶어서 학생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어머나, 쌤이 널 보고 느끼는 바가 많구나.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혼자 운동하는 초등학생이라니 진짜 훌륭하다! 너 이다음에 커서 정말 큰 인물이 될 거야. 지금도 역시 무지하게 멋지고 말이야! " 급식시간에 그 친구의 담임쌤을 우연히 만서 오늘 아침에 느낀 감동을 살짝 공유했다. 혹시나 아이가 부담스러워 할 수 있으니 보안유지는 필수라는 약조도 받고 말이다.

내일도 그 아이가 운동장에 나와서 뛰는지 한 번 살펴봐야겠다. 설마 또 못하면 어떤가. 11살 여름, 아무도 오지 않은 이른 아침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달리기 연습에 매진하던 그 기억은 오롯이 우리 친구의 재산이 될 것이다.  나는 무언가에 그리 뜨거운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달려든 것이 있었는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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