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네 가족이 수술한 지 6일 차에 접어들었다. 13시, 외사촌들 중 가장 맏이인 준일이 부인과 함께 병실을 찾았다. 준일은 큰 외숙부를 많이 닮았는데, 점점 더 마르는 듯했다. 수라는 준일과 대화하려 수차례 시도했으나, 준일은 수라에게 무관심했다. 준일은 준우의 침대 난간에 기대어 줄곧 준우와 마주 보고 있었다.
'흥!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네. 둘이 평소에 별로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문병 와서 사람 차별하나?'
수라는 준일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결국 포기하고 그의 부인 양 씨에게 말을 건넸다. 수라는 문병객들에게 줄 요량으로 입원하기 전부터 준비한 작은 선물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수라가 직접 포장한 양말을 전달하자, 양 씨는 반색을 하며 딸 민지에게 신기겠다고 했다. 수라는 그녀와 대화하던 도중, 안타까운 사실을 발견했다.
"수라 씨, 석사 졸업했다면서요? 축하해요!"
"고맙습니다. 언니는 명문대 출신이시죠? 대학원 진학도 하셨어요?"
"아, 그게...... 결혼해서 바로 출산하고, 육아하느라 진학 못했어요. 석사 학위 생각은 있었는데, 지금도 굉장히 아깝네요. 수라 씨는 하고픈 일 다 하고, 미루고 미루다가 결혼 최대한 늦게 하세요!"
"하하, 그럴게요. 언니 전공도 준일 오빠랑 같은 화학이에요?"
"네, 맞아요."
"석사, 박사 졸업하고 연구자로 살았으면 노벨상 탈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휴, 이렇게 평범한 가정 주부로 살 줄은 몰랐네요. 간 이식 수술, 많이 아팠죠?"
"아, 상상하기도 싫어요. 입에 담을 수 없는 고통이었어요."
"간 이식 수술 안 해서 모르지만, 애 낳는 고통은 더 심해요."
"아, 출산하지 말아야겠네요."
수미가 한탄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준일은 명문 봉마 대학교 화학과에 재학하던 중, 같은 학과에서 여자 친구 수미를 사귀었다. 준일과 수미는 우수한 성적의 모범생들이었다. 그들은 대학원 석사 과정을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예정에 없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자기야, 나 있어야 할 게 없어."
"있어야 할 게 뭔데?"
"이번 달 예정일이 훨씬 지났는데, 도통 소식이 없어. 왜 이러지? 나 이런 적 한 번도 없었거든."
"그러게. 빨리 한 적은 있어도, 늦게 한 적은 없잖아. 불안하면, 검사해 볼까?"
"응. 약국 가서 검사기 좀 사다 줘."
준일은 곧장 약국에 다녀왔고, 수미는 불안한 심정으로 검사기를 든 채 화장실에 갔다. 수미는 좌변기에 앉아 검사기를 확인했다. 소변이 묻은 검사기는 빨간 줄이 선명했다.
'헉, 두 줄이잖아?!'
수미는 어두운 표정으로 검사기를 준일에게 내보였다. 준일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두 줄이면, 임신한 거야?"
"어, 그런가 봐. 산부인과 가서 확실히 진단받는 게 좋겠지?"
"그래, 그러자. 혹시 또 모르니까."
"임신이 확실하면, 어떻게 할 거야?"
"수미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
수미는 그간 계획한 일들이 임신 때문에 망가지는 게 달갑지 않았다. 대학원 석사 졸업 후 박사 학위도 생각이 있던 터였다. 하지만, 출산하게 되면 그 모든 게 계획 대로 되지 않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갈등은 오래 지나지 않아 해소됐다. 아니, 해소되는 듯 보였다.
준일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대기업 청무에 입사했다. 그리고, 수미와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수미의 조금 부푼 배는 풍성한 웨딩드레스 덕분에 충분히 가려졌다. 신혼여행을 언제 다녀왔나 싶었는데, 순식간에 첫째 민지가 태어났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부부는 둘째 수지를 낳았다.
수라는 이 사연을 수미에게 들은 게 아니었다. 일전에 만난 외사촌 오빠 경철로부터 전해 들었다. 경철은 준일에게 반감이 있었다.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준일 형은 친척들 중 가장 늦게 할머니 댁에 왔어. 수라야, 그 이유가 뭔지, 알아?"
"몰라. 왜 늦게 왔는데? 할머니 댁은 준일 오빠네에서 제일 가깝잖아."
"여자 친구랑 노느라 늦게 왔단다!"
"아, 그래? 연애하느라 늦었군. 할머니 돌아가셨다는데, 좀 심하네."
"그렇지? 수라 네가 생각해도, 내가 이상한 게 절대 아니지?"
"음, 여자 친구랑 어디 멀리 여행 가서 그런 거 아니고? 일정 소화하느라 늦을 순 있긴 하지."
"뭐가 됐든, 난 더 이상 준일 형 사람 취급 안 한다. 할머니가 우리한테 어떤 존재인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 인사도 못 하고 그냥 보내? 그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수라는 외가와 왕래가 잦은 편이 아니었고, 딱히 기억나는 외할머니와의 추억도 없었다. 그렇기에, 경철의 의견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이었고, 남의 일이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여자 친구랑 노는 게 너무 행복해서 할머니는 안중에도 없었나 보군! 근데,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형한테 적대심이 강하네.'
수라는 간 기증자 교육을 받으러 동관 세미나실로 갔다. 별 내용은 없는데, 오래 앉아 있으려니 현기증이 나고 피곤했다. 침대에 앉아 독서를 하려고 했으나, 졸음이 몰려왔다. 자려고 눕자, 곧 젊은 남자 의사가 들어와서 배의 상처 부위를 소독했다. 수술 후 두 번째였다.
'으윽, 너무 고통스러워! 잠이 확 달아나네.'
뿐만 아니라, 수라는 잠자리가 불편하고 더워서 잠을 설쳤다. 딱딱한 매트리스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후, 속히 퇴원하고 싶다! 집에서 편히 자는 게 소원이라고.'
다음날, 오전 7시 30분에 수라는 식전 약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 30분 후에 과일과 케이크, 조식과 두유, 견과류, 떡 등을 든든히 챙겨 먹었다. 약을 먹고, 30분이 지나서 식후약을 또 먹었다.
'약이 점점 줄어서, 참 기쁘다!'
오전 11시, 의사 선생님들이 회진하러 왔다. 수라의 상처 부위와 연결된 노폐물 주머니를 제거했다.
"언제쯤 퇴원할 수 있을까요?"
수라가 의사에게 묻자, 의사들은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며 몇 마디 주고받았다.
"민수라 씨, 오늘 바로 퇴원해도 되겠네요. 민준우 씨는 아직이요."
수술한 지 딱 7일째 되는 날이었다. 답답한 병실을 벗어나게 된 것만으로도 수라는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머니 자영이 수라를 저지했다.
"수라야, 너 퇴원하면 네 자리에 다른 환자가 입원할 거야. 그럼, 곤란해. 우리끼리 있을 땐 편하지만, 타인이 들어오면 불편하잖아. 퇴원하지 말고, 준우랑 며칠 더 머물자."
"싫어요. 여기선 간호사들이 자꾸 혈압 재러 와서 자다가도 깬단 말이에요. 어서 집에 가서, 숙면을 취하고 싶어요. 병원엔 라텍스 매트리스가 없으니까요."
18시, 간호사가 퇴원 절차를 설명했다.
"실밥을 뽑고 3일 후부터 샤워, 1~2개월 후부터 운전, 3~6개월 후부터 격렬한 운동이 가능하세요. 외래 검진은 1, 3, 6, 12개월 간격으로 실시될 예정이고요. 퇴원 축하드려요!"
"히히, 고맙습니다!"
19시, 수라의 사촌 동생 성현이 퇴근길에 잠깐 들렀다. 두 번째 방문이었다.
수라는 간밤에 의사 선생님이 노폐물 주머니를 제거해 주길 간곡히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 기별이 없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치고 말았다. 마지막 날 밤까지 간호사들이 들락날락하는 통에 수라는 좀처럼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퇴원날이 됐다. 7시, 의사가 와서 노폐물 주머니를 제거했다.
"아파요?"
수라는 온 힘을 다해 심호흡을 하며, 근육을 이완시켰다.
'거침없이 행하고선, 아프냐고 묻냐? 이런, 무자비한 의사 같으니!'
10시, 수라의 사촌 동생 성민이 병실에 들렸다. 성민과 성현은 형제이며, 서울에 살고 있다. 성민은 전날 늦게 퇴근해서 늦게 잤을 텐데, 수라를 보러 왔다. 늦지 않게 온 셈이다.
'그래도, 서울에서 얼굴은 보고 가네. 다행이군.'
10시 30분, 자영이 수라의 퇴원 수속을 밟으며 입원비를 결제했다.
'끄악, 나 혼자만 약 550만 원? 과연 대수술이다! 알고 보면 병원도 장삿속이야. 불필요한 기구들을 은근슬쩍 판매하잖아? 퇴원 후엔 다 불필요한 건데, 왜 대여는 하나도 없는 거람? 공 흡입기, 소변기, 소변 측정기, 찜질팩 등 그게 다 유료인 줄 전혀 몰랐는데!'
11시, 시내동 본당에서 신부님과 수녀님이 와서 수라의 병실에서 병자미사를 봉헌했다.
12시, 수라는 이모부가 운전하는 차에 탔다. 이모의 새 남편이었다. 수라는 이모부가 이날만큼 듬직해 보인 적이 없었다. 이모부는 수라의 짐을 차에 양껏 싣고, 성실히 주행했다. 수라는 기운이 없었다.
'아, 병실을 떠나니까 갑자기 왜 몸이 더 아프냐. 나, 퇴원해도 되는 거 맞나? 아깐 괜찮았는데......'
수라는 쿨쿨 잠들었다. 이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야간 근무를 마치고 온 참이었다. 수라는 이모부 덕분에 집까지 편히 내려왔다.
16시, 은자 언니가 수라를 보러 시내동에 왔다. 3년 만의 재회였다.
"퇴원 후 조촐한 잔치네요!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서울 못 가서 미안."
"오, 아니에요! 집에서 만나는 게 더 편하고 좋죠. 굳이, 멀리 올 거 있나요."
수라는 토핑이 푸짐한 뜨끈한 피자와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맛보았다.
'아, 집에 오니 천국이 따로 없구나! 병원 생활 너무 끔찍했어! 고작 일주일 머물렀는데, 70년 지난 기분이네.'
17시, 호선 아주머니가 와서 수라에게 그간 안부를 전했다.
"밥 주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서, 길냥이들이 쫄쫄 줄었을 거여. 요샌 안 보이드마."
"제가 왔으니, 밥 먹으러 다시 모이겠죠. 고양이들이 며칠 우울증을 앓았겠네요."
18시, 안나 아주머니가 수라에게 반찬을 만들어 주었다.
그날 밤, 수라는 자신의 라텍스 매트리스 위에서 모처럼 꿀잠에 빠졌다. 안락했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