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배는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수라의 집을 오갔다. 그들은 자유롭고 정다운 시간을 보냈다. 웃어른이 없는 넓은 단독 주택은 수라에겐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운전면허는 있다면서, 왜 운전 안 해? 너네 집에서 회사까지 출퇴근하려면, 꽤 걸리잖아."
사실, 순배는 운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근무 시간이 길어서, 잠이 늘 부족하거든요. 언젠가 야간 근무 마치고 퇴근하는데, 졸음 운전하다가 혼자 전봇대를 들이받았어요. 그 후론 그냥, 택시를 타요."
"저런! 많이 다쳤어?"
"접촉 사고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죠. 괜찮았어요. 별로 안 다쳤어요. 근데, 그 이후로 운전하는 게 무섭더라고요. 차는 거의 친누나가 몰고 다녀요."
"그렇구나. 난 운전하는 거 피곤해서, 되게 싫어하거든. 아직 주행 중에 교통사고 난 적은 한 번도 없어."
어느 날, 순배는 버젓이 자가용을 끌고 수라네 집 앞에 도착했다.
"어, 운전해도 괜찮아?"
놀란 수라가 묻자, 순배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극복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해냈어요! 연습 몇 번 했더니, 그럭저럭 할 만해요. 이제, 우리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누나는 환자니까, 최대한 편안히 다녀야죠."
"우와, 고마워! 이야, 차 괜찮은데? 내 차보다 크잖아. 부럽다!"
"아, 중고차예요. 저렴하게 샀어요. 별로 안 타서, 깨끗해요."
"어, 깔끔하네. 히히, 내가 운전 안 해도 되니까 참 좋다!"
"누나, 아직 운전하면 안 되잖아요."
"맞아. 운전하려면 몇 개월 지나야 돼. 지금은 아직 무리하면 안 돼."
수라는 퇴원 후, 회복 단계였다. 성격 급한 수라는 간호사가 일러준 시기보다 이른 때에 운전을 시도했다. 대신 운전해 줄 이도 없었고, 그렇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니 번거로웠다. 직진으로 주행할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런데, 서서히 피로감을 느꼈다.
'아, 이래서 퇴원 후 3개월 지나야 운전 가능하다고 했던 거군!'
수라는 운전대의 방향을 전환할 때,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모퉁이에서 회전할 때, 수라의 무게가 쏠리자 수술 부위가 욱신거렸다.
'복대를 착용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복대가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수라와 순배는 여기저기 쏘다녔다.
"누나, 복대 안 해도 돼요?"
"원래는 하고 다녀야 하지만, 보기 흉해서. 안 예쁘잖아. 환자 티 내는 것도 싫고."
수라에게는 모처럼 외출하는 기회였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신경 써서 화장했다. 간 이식 수술한 후, 한동안 환자로 지냈던 수라가 점차 일상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수라는 옷장을 뒤져 흰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목과 어깨가 다 드러나서, 그녀가 평소에 거의 안 입는 옷이었다.
"이 원피스, 어때? 어울려?"
수라가 순배에게 감상을 물었다.
"해바라기가 가득해서, 참 귀엽네요."
원피스는 얇은 어깨끈 아래 이어진 상의가 가슴에 착 달라붙고, 명치 부분부터 허벅지까지 하의가 넓게 퍼졌다. 전체적으로 풍성한 부피감을 자랑했다. 그런데, 수라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그들이 길을 걸을 때, 수라는 한 아주머니와 스쳤다. 그런데, 그녀가 수라를 훑으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쏘아봤다.
'뭐야, 저 말없는 눈빛 공격은? 내가 입은 옷이 마음에 안 드나?'
수라는 적잖이 당황했으나, 순배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피자를 한 판 주문했다. 배달 예상 시간에 맞춰 공원으로 가서, 정자 그늘에 앉았다. 연못을 바라보며, 맛있게 식사했다. 아직 한낮의 기온은 마치 한여름 같았다. 더위 탓에 인적은 드물었다.
"야외에서 먹으니까, 더 맛있다! 그렇지?"
"공원에서 피자를 먹다니, 새롭네요. 미국에 온 것 같은 기분?"
"표현 재밌네! 아, 나 미국 가봤어. 대학생 때 교환학생으로 어학연수 다녀왔거든. 근데, 거기 가서 공원에서 피자 먹은 적은 없어. 해볼 걸 그랬네!"
그 후로도, 그들은 구절초가 아름답다는 절과 코스모스가 만발한 산림욕장에 방문해 가을을 흠뻑 만끽했다. 또, 순배가 일찍 퇴근한 날에는 억새를 보러 근교 호수에도 들렀다. 그 시기가 제일 걱정 없고 행복한 때였노라, 수라는 회상했다. 수라가 회복 기간 동안 매일매일 여유롭고, 행복했던 이유는 모두 순배의 배려와 애정 덕분이었다.
곧 핼러윈 데이가 다가왔다. 아침, 저녁으로 점차 기온이 쌀쌀했다. 수라는 순배에게 퇴근 후 잠깐 집에 들르라고 연락했다. 순배는 으슥한 밤에 돼서야 퇴근했고, 그림자처럼 은밀히 수라를 보러 왔다.
"누나, 저 왔어요."
수라는 거실 소파에 앉아 말없이 순배를 바라봤다.
"이거 보여주려고 부른 거예요? 와, 온 보람이 있네요."
수라는 흡족해서 방긋 웃었다.
"기분 좀 내봤는데, 마음에 들어? 곧 핼러윈 데이잖아."
"예뻐요! 무슨 분장한 거예요?"
"그냥 아무렇게나 꾸민 건데. 예전에 샀던 고양이 귀 머리띠 있길래, 썼어. 옷은 그냥 평상복이야. 검정 블라우스에 검정 가죽 치마. 화장을 평소보다 좀 진하게 하긴 했지. 원래 이런 진한 화장 거의 안 하잖아."
"캣 우먼 같아요."
"너, 핼러윈 데이 분장해 봤어?"
"어, 아니요. 근데, 닮은 캐릭터는 있어요."
"뭔데?"
"<데스 노트>의 사신이요."
"풉! 류크 말하는 거야? 어, 그러고 보니 닮았네! 갸름한 얼굴에 긴 턱. 눈에 아이라인 진하게 그리고 머리카락 세우면 진짜 똑같겠다!"
"누나도 분장할 거예요?"
"응. 난 할리퀸 할래."
그들은 핼러윈 데이에 분장을 하고, 집에서 조촐히 기념촬영했다.
"사람 많은 곳 가서 왁자지껄하게 놀 몸 상태가 아니니까, 그냥 집에서 우리끼리 조용히 보내자."
"그래요. 우리 둘이면, 충분하죠."
콩깍지
구순배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 눈에 붙은 그것.
너에겐 안 보이고,
내게만 보이는 그것.
언젠간 그게
벗겨질 거라고
장담하는 너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너는 내가 말하지.
"콩깍지가 씌었구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너의 짓궂은 장난과 웃음도
내 눈에는
어찌나 귀여운지!
좋아서 웃는 걸까?
수줍어하는 웃음일까?
너의 미소를
자주 떠올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오래간만에 널 보면
왜 이리
사랑스러운지!
내가 바라는
단 한 가지,
언젠간 네 마음도
나와 같아지기를(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