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가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교수들과 회식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교수들끼리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동료라기 보단, 경쟁자 대하는 느낌인데. 밥그릇 싸움이라고 해야 하나, 분위기가 상당히 냉랭하네…….’
회식은 형식적으로 끝났다. 아니나 다를까, 또라이 같은 교수가 있었다. 바로 왕 교수였다. 그의 수업은 전공 필수 과목이라서, 반드시 들어야만 했고 큰 비중을 차지했다. 무려 3시간짜리였다.
청명한 화요일 오전, 수라는 왕 교수의 수업을 들으러 가야만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집을 나섰으나, 그만 교통사고가 났다. 그런데, 접촉 사고가 아니었다.
고속도로 주행 중, 차가 갑자기 멈춰버렸다. 수라가 몰던 차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중고차인데, 드디어 폐차할 시기가 당도했다.
수라는 당황했지만, 왕 교수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공손히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왕 교수는 제자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야, 민수라! 너, 내 수업 나오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이거 병신이네!”
수라는 뜨끔했으나,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황당함과 서운함이 뒤섞였다.
‘아니, 내가 출석하기 싫어서 일부러 사고 낸 것도 아니잖아! 거짓을 꾸며낸 것도 아닌데, 비싼 등록금 내고 이런 욕설을 들어야 하나? 제자가 아니라, 당신 딸이 교통사고 났어도 그럴 거요?’
함께 수업 듣는 학생들에게 연락해 의견을 물으니, 기분은 상하겠지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잊어버리라고 대답했다. 억울한 상황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수동적인 학생들의 태도가 수라는 매우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대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해 장문의 대자보를 남겼다.
‘당장 내일 등교해서, 왕 교수랑 맞짱 떠야겠어!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인격 모독 수준이잖아! 인권을 위해 투쟁하겠어!’
다음날, 수라는 새벽 5시에 기상했다. 이른 시간에 학교에 도착해 망설임 없이 왕 교수의 연구실로 직행했다. 그곳에는 중국인 유학생 아신이 교수와 상담 중이었다.
“민수라, 왜 왔냐? 독이 잔뜩 오른 얼굴이로군!”
“교수님, 어제 유선상으로 제게 욕설하신 점에 대해 사과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건 비유법이었을 뿐이었고, 난 잘못이 없어. 그리고, 민수라! 앞으로 내 수업에 들어오지 마. 안 들어와도 A+ 줄게.”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수강하지도 않고 받는 성적이 의미가 있습니까? 욕설을 퍼부으신 것, 정식으로 사과하세요!”
제자가 스승에게 감히 사과를 요구했다. 왕 교수는 체통도 없이 쩌렁쩌렁 고함쳤다. 그가 울부짖는 모습은 영락없는 한 마리의 야수였다. 수라는 그 광경을 보고, 포효하는 짐승을 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나서 건물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수라는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황당했으며, 괴로웠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한편, 곁에서 지켜보는 25살의 아신은 오히려 덤덤했다.
“너, 이거 불법 침입이야! 내 연구실에서 당장 나가!”
왕 교수는 악을 바락바락 썼지만, 수라도 질세라 이를 악 물고 기를 쓰며 버텼다.
“사과를 받기 전까진,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어욧!”
꿋꿋한 모습이 마치 소나무의 절개와도 같았다.
몇 분 뒤, 결국 왕 교수는 사과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 욕을 하지 않겠다. 미안하다!”
다행이었다. 수라는 즉시 사과를 받아들이고,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수라는 어젯밤, 왕 교수에 대한 탄원서를 작성했다. 교수와 화해한 후, 누가 볼세라 황급히 게시글을 삭제했다. 조회수는 XXX회를 기록했고, 다른 게시물들에 비해 단연 높은 수치였다.
이런 과정이 있기까지 수라는 많은 이들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모두가 그저 참으라고 조언했다. 그들의 근거는 첫째, 일단 학생이 교수와 대적해서 좋을 것이 없고, 둘째, 학점을 착실히 이수해 무탈히 졸업하려면 미운털 박히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현실적인 뒷받침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제일 답답한 의견은 수라의 어머니였다.
“불의를 보고 분개한 개인이 개선하려고 애써도,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수가 뭉친다면 또 모를까.”
어머니가 단정 지었다.
“자녀의 조력자가 되어 주지는 못할망정, 왜 방해자를 자처해요?”
수라가 퉁명스럽게 따졌다.
왕 교수는 수라에게만 특별 과제를 내렸다. 무려 약 500쪽에 달하는 철학책을 읽고, A4 용지 2장 이내에 요약한 후, 질문 2개를 다음 수업 시간에 제출하라고 전달했다.
“과제를 하건 안 하건, 그건 민수라 네 자유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교수는 수라가 과제를 해오길 바라는 눈치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라는 당차게 대답하고, 도망치듯 연구실을 탈출했다. 수라가 시간을 확인하니, 20년 같은 20분이 경과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결말이다!’
수라는 복도에서 마 교수와 마주쳤다. 왕 교수의 옆방 연구실을 쓰는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수라를 바라봤다. 수라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려 노력하며, 그에게 인사했다.
수라는 비록 마 교수의 수업을 수강한 적은 없으나, 그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지난 학기, 수라는 학과 사무실에서 문서 출력 중이었다. 그때, 마 교수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수라는 명랑한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했다.
“응.”
옆에 있던 아신이 수라에게 물었다.
“언니, 이건 무슨 자료예요?”
“어머님들 미술 지도할 때 필요한 거야. 도서관에서 목요일마다 수업하거든.”
그러자, 곁에서 대화 내용을 들은 마 교수가 수라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대학원생이에요?”
“네, 맞아요.”
수라는 대답했다. 교수의 다음 대사는 의외였다.
“학부생인 줄 알고, 아까 인사받을 때 '응'이라고 했는데…….”
이 일화를 양 교수의 수업 때 전했더니, 그는 덮어놓고 이리 말했다.
“마 교수 분명, 술이 덜 깼나 보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