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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숲 Jul 06. 2021

치유의 매듭, 마크라메

책은 나에게 늘 아스피린 같은 존재였다. 힘들 때나 괴로울 때 책을 펴고 그 속으로 들어가면 고통이 사라졌다. 시험을 망쳤을 때도, 연인과 이별했을 때도 난 책으로 들어가 마음을 다스렸다.


음악도 내 고통과 늘 함께했다. 누군가에게는 소음일 수 있는 시끄러운 록 음악들이 나에게는 두통약 같았다. 편두통을 달고 사는 나에게 음악은 아스피린보다 더 든든한 두통약이었다.


작년은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을 수 없고, 음악도 들을 수 없던 시기였다. 코로나 시국에 너무 어린 아기 둘을 돌보다 보니 책도 음악도 더 이상 나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아기를 재우고 틈틈이 읽던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온종일 아기들과 지내다 보니 아무런 소리가 없는 고요한 상태를 더 바라게 됐다. 좋아하는 음악보다 소음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쪽이 훨씬 나았다.


책과 음악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나는 우울감이 심해졌다. 돌아보면 ‘코로나 블루’와 ‘육아 우울증’이 겹쳐졌던 것 같기도 하다. 쌓여가는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었다. 아기들 재우고 밤에 다녔던 필라테스도 코로나 때문에 문을 닫았고, 운전도 못 했던 나는 그야말로 24시간을 집에 갇혀 육아만 했다.


그때 우연히 좋아하는 꽃집 SNS 계정에 올라온 마크라메 가방을 보게 되었다. 사진 속에는 아이보리 색깔의 실로 만든 마크라메 토트백이 있었다. 저건 뭘까. 단순한 호기심으로 마크라메 검색을 시작했고, 그 토트백을 만든 스튜디오를 찾아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했다. 그리고 그 주 주말 나는 아주 오랜만에 외출했다. 스튜디오가 있는 방배동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너무 자유롭고 신이 났다.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혼자 훨훨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낯선 단어였던 ‘마크라메’는 바늘과 같은 도구를 쓰지 않고 손으로 로프나 실, 끈을 엮어 매듭과 패턴을 만드는 서양식 매듭 공예를 일컫는 말이었다. 바늘 없이 매듭으로만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다. 원데이 클래스로 마크라메 매듭을 배우는 동안 나는 치유받고 있다는 감정이 들었다. 그날 처음 만난 마크라메 선생님에게 작업하는 동안 주저리주저리 내 이야기를 쏟아냈다.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 개인적 자아를 드러내기를 꺼렸던 그동안의 나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처음 만든 마크라메 투 웨이 토트백


마크라메는 손으로 만드는 매듭도 아름다웠지만, 실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나는 주로 아기들이 잠들고 난 고요한 밤에 혼자 실을 자르고, 그 실들로 매듭을 엮어 하나둘 작품을 만들어나갔다. 스튜디오에서 정규 클래스를 들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기들을 두고 자주 외출할 수 없는 상황이라 집에서 혼자 책이나 유튜브를 보며 작은 소품부터 하나씩 만들었다. 결과물에 상관없이 실을 자르는 순간부터 작품 완성까지의 모든 과정이 즐겁고 편안했다.


몰입하는 대상이 생겨나자 나의 스트레스 지수도 눈에 띄게 낮아졌다. 평소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를 즐기는 나는 마크라메 소품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기 시작했다. 나는 만드는 즐거움을, 친구들은 선물 받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둘째 아기 첫돌 때는 마크라메 태슬을 만들어 가족과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버킷 백을 만드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둘째 아기 첫돌 기념 마크라메 태슬


최근에 만든 마크라메 버킷 백


마크라메에 빠져 산 지 벌써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감옥처럼 갇혀 있던 육아 일상 속에서 마크라메는 나에게 치유의 매듭이었다. 마크라메를 통해 나는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났고, 내 취미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육아에 매몰된 시간은 힘들고 참혹한 순간이 많았지만 그 고통이 나를 마크라메에 빠져들게 했다. 몸과 마음이 많이 회복되고 있는 요즘에도 나는 마크라메를 한다. 정성껏 실을 자르고 매듭을 엮어서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낸다. 여전히 그 과정은 아름답다.


마크라메 매듭을 엮고 있는 나


식물을 좋아해서 만든 마크라메 플랜트 행잉


친구에게 선물로 준 마크라메 선반 월행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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