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간의 실내 여행을 마치고 부모님 댁으로 가는 동안 찬영은 차를 돌려 산하 집으로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마음이 더 깊어진 만큼 떨어진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벌써부터 네 사람이 함께 한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듯했다.
찬영과 진서가 부모님 댁에 도착해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인사를 건넸다.
"저희 왔어요"
"할머니 진서 왔어요"
거실에서 쉬고 계시던 할머니는 진서의 목소리에 얼른 일어나 손녀를 맞이하신다.
"진서 잘 놀고 왔어?"
"네"
할머니는 진서의 손을 잡아 할아버지 옆 자리에 앉혀 주었다.
"두 분 점심은 드셨어요?"
"시간이 몇 신데 벌써 먹었지. 너희들도 점심 먹고 온 거지?"
"네, 먹었어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재미있게 잘 쉬었나 보네, 진서도 그렇고 너도 얼굴이 좋아진 거 같다"
어머니의 말에 찬영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쓰윽 훑었다.
"잘 먹어서 그런가 봐요. 두 분은 별일 없었어요?"
"우리가 별일 있을게 뭐 있어"
"저는 집에 가서 정리하고 저녁 시간에 다시 올라올게요"
"그래, 진서는 그냥 여기 두고 가. 어차피 낮잠 잘 시간이니까 여기서 재울게"
"네, 그럼 이따 올게요.
진서야, 아빠 집에 가서 청소하고 올 테니까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있어"
"응"
▷▷▷
준서가 방에 들어간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너무 조용해 산하는 준서에게 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던 준서는 엄마가 옆에 앉자 얼굴을 돌려 엄마를 바라봤다.
"준서 피곤해서 누워 있는 거야?"
"아니, 그냥 누워있어"
"오늘은 친구들이랑 게임 안 해?"
"친구들은 하고 있을 거야, 나는 지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안 하는 거야"
"왜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그냥... 갑자기 뭔가 없어졌다는 느낌이 들어, 그래서 기운도 없고 게임도 하고 싶지가 않아졌어"
산하는 누워있는 준서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아저씨랑 진서가 집에 가니까 마음이 서운해?"
"그런가 봐. 지금처럼 재미있게 놀아 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준서의 눈이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산하는 준서 옆에 같이 누우며 준서를 꼭 안아 주었다. 찬영이 진서가 집으로 돌아가 잘 지낼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했을 때도 자신은 준서가 서운해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엄마가 미안해 준서야, 준서가 이렇게 서운할지 몰랐어"
"아저씨가 차 타고 가는 걸 봤을 때도 안 그랬는데, 집에 들어오니까... 그냥.... 마음이 안 좋아졌어"
"그랬구나, 준서가 아저씨랑 진서랑 많이 친해졌나 보다"
"아빠는 나한테 이렇게 해 준 적이 없었잖아. 어린이날이었는데 전화도 안 하고...
그런데 아저씨는... 아저씨는 너무 다정하고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도 가르쳐 주고,
준서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이마랑 머리에 뽀뽀도 해 줬어.
나는 그게... 너무 좋아서... 그래서 행복했어... 미안해, 엄마..."
엄마 품에 안긴 준서는 자신의 속 마음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떨구었다.
산하는 준서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면서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아저씨 때문에 행복했다고 하니 엄마도 행복하다.
준서가 엄마가 행복하길 바라는 만큼 엄마도 준서가 행복하길 바래"
준서는 머리를 끄덕이며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품에 엄마 품에 안긴 준서는 산하의 위로를 받으며 잠이 들었다.
품에서 잠든 준서를 바라보는 산하의 마음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착잡하면서도 복잡했다.
자신의 일과 성공이 무엇보다 우선이던 X남편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매번 자신의 일이 먼저여서 오늘처럼 아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잦은 편이었다. 그런데 찬영 때문에 행복했다는 준서의 말이 그녀의 마음에는 애잔하지만 슬프도록 행복하게 들렸다.
▷▷▷
부모님 댁에 진서를 두고 자신의 집에 온 찬영은 가지고 온 짐을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 집안 환기를 시키면서 청소를 시작했다.
늘 조용한 집안이었지만 사흘 만에 돌아온 집은 그전과 달리 더 적막하게 느껴졌다.
네 사람으로 북적이던 생활이 생각나는 만큼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듯했다.
다시 둘 만 남게 된 산하와 준서도 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집안 정리가 끝나자 찬영은 부모님 댁으로 올라가 집안에 들어서자 거실에서 할아버지랑 퍼즐을 맞추고 있는 진서가 보였다.
"진서 낮잠 좀 잤어요?"
"어, 잤어. 놀다 오더니 더 컸는지 아빠도 안 찾고 잘 노네"
할아버지가 손녀딸에게 퍼즐을 건네주면서 말씀하셨다.
찬영은 아버지와 준서가 퍼즐을 맞추는 모습을 잠깐 지켜본 후 주방에서 혼자 식사 준비를 하는 어머니에게 갔다.
"어머니 혼자 힘들지 않으세요? 최여사님은 내일 오시는 거죠?"
"응, 저녁도 최여사가 해놓고 가서 데우기만 하면 되니까 힘든 거 없어"
찬영은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인덕션 위에 올려져 있는 생선 구이와 국을 그릇에 담아 식탁으로 옮겼다.
"아버지, 진서랑 식사하러 오세요"
찬영이 아버지와 진서를 식탁으로 부르자 할아버지 손을 잡고 식탁으로 온 진서를 찬영이 어린이용 의자에 앉혀 주었다.
"아빠, 엄마랑 오빠는?"
찬영은 진서에게 반찬을 올려 주면서 진서의 물음에 답했다.
"아빠랑 진서는 여기 할아버지 집에서 밥 먹는 것처럼 엄마랑 오빠는 엄마 집에서 밥 먹고 있어"
찬영의 말을 이해한 건지 그냥 자동적으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진서는 머리를 끄덕이며 밥을 먹었다.
부녀 간의 대화를 듣던 어머니가 찬영을 바라봤다.
" 오빠가 지난번에 말한 그 준서라는 아이야?"
"네, 그 집에서 같이 놀아서 그런지 찾는 거 같아요"
"놀러 간다는 곳이 그 집이었어?
"네"
"진서만 놀고 온 거야 너도 같이 간 거야?"
"저도 같이 갔어요"
어머니는 놀라 찬영에게 다시 물었다.
"너도 같이 가서 놀았다는 거지 지금?"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세요. 네 살짜리 딸만 보내고 저 혼자 집에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네가 다른 집에서 놀았다는 게 놀라워서 그렇지"
"잠은 어디서 자고"
"준서가 자기 방 빌려줘서 거기서 잤어요"
"어..... 삼일 내내 그 집에서 잤다는 거지? 진서가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이랑"
찬영의 어머니는 기대감에 다시 물었다. 2박 3일 놀러 간다고 했던 찬영이 하루 더 있다 온다고 연락을 했을 때는 그저 좋은 곳에서 쉬는 것이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말하는 뉘앙스가 그냥 쉬러 간 것이 아닌 듯했다.
밥을 먹던 찬영이 수저를 잠시 내려놓고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미간이 살짝 주름이 잡혔다.
"어머니 그렇게 쳐다보시면 부담스러워요. 많이 말씀드릴 거 없어요.
준서가 진서를 초대해서 같이 놀러 간 거예요.
진서가 엄마라고 부르는 건 준서가 그렇게 부르니 따라 불러 그런 거고요. 얼른 식사하세요"
찬영은 적당한 이야기로 얼버무리고는 식사를 이어갔다.
아들을 바라보는 찬영 어머니의 얼굴에는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리 초대를 받았다고 해도 삼일 씩이나 그 집에서 놀다 왔다는 건 진서가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이 마음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근데, 준서 엄마라는 사람은 진서가 '엄마'라고 부르는 거 기분 나빠하지 않았어?"
"진서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니 자신은 괜찮데요"
아무리 진서가 어려도 친 자식이 아닌 아이가 엄마라고 부르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괜찮다고 했다는 건 오지랖 넓은 성격이거나 자신의 아들과 좋은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찬영의 성격상 상대방이 아무리 털털한 성격에 친화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 딸이 아무리 어려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이다.
찬영의 어머니는 스스로 결론을 내고는 앞으로 좋은 소식이 들리기를 은근히 기대하기 시작하셨다.
▷▷▷
준서가 깊이 잠자 거실로 나온 산하는 X남편에게 연락해 늦었지만 준서한테 전화라도 해주라는 말을 해야 할지 그냥 이대로 지나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산하는 크고 긴 한숨을 쉬면서 이대로 그냥 흘려보내기로 결정했다. X남편 스스로 마음이 움직여 아들인 준서에게 연락하는 것이 아닌 이상 앞으로도 매번 실망하고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기에 이번을 마지막으로 기대조차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던 산하는 인기척에 머리를 들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준서가 거실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서 잘 잤어?"
"응"
"오늘 저녁은 할머니 집에 가서 먹을 건데, 준서 머리 좀 빗을까!"
"아. 물 마시고 다시 씻을게"
"그래"
산하는 준서를 데리고 부모님 댁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섰다.
"엄마, 아저씨한테 연락해도 돼?"
"아저씨 전화번호 알아?"
"처음 만났을 때 명함 받았어"
"아.. 명함까지 주셨으니까 해도 괜찮은데,
아저씨 일하는 시간에 전화하는 건 실례니까 문자로 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할 게"
"내일 어버이날인데 할머니 할아버지께 선물드렸어?"
"응, 어린이집에서 카네이션 만들어서 드렸어"
"착하네, 우리 준서가 이렇게 스스로 잘하니까 엄마가 걱정할게 많이 없네"
또래 친구들에 비해 말수는 많지는 않지만 착하고 다정한 성격의 준서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도 스스로 알아서 잘했기에 직장을 다니는 산하로서는 아이 양육이 수월한 편이었다. 그렇게 엄마의 걱정거리를 줄여주는 아들이 대견한 산하는 준서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할머니, 준서랑 엄마 왔어요"
준서가 현관에 들어서면서 할머니를 부르자 거실에서 쉬고 계시던 산하의 아버지가 먼저 준서와 산하를 맞으셨다.
"준서 재미있게 잘 놀았어?"
"네, 엄청 재밌었어요"
환하게 웃으며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준서를 보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조금 놀라셨다. 애늙은이 같이 표정이나 목소리 변화가 크지 않았던 준서가 나흘 만에 사람이 바뀐 듯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했기 때문이다.
"무척 좋았나 보네, 우리 준서가 이렇게 큰 소리로 대답을 하는 걸 보니까"
할머니의 말에 준서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 텐트가 그렇게 예쁜 건 줄 몰랐어요, 인터넷에서 본 것보다 훨씬 예뻤어요"
"준서가 예뻤다고 하니 할머니도 궁금하네"
산하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텐트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도 찍고 조명으로 반짝이던 텐트도 찍었지만, 어머니한테 보여 주지는 않았다. 아직은 자신과 준서만의 비밀로 하고 싶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준서는 나흘 간의 이야기를 할머니, 할아버지께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간간히 '진서와 아저씨'라는 표현이 나와 산하가 살짝 당황했지만 부모님은 별 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부보님은 나흘 만에 만난 준서의 표정이 며칠 전보다 훨씬 밝아지고 기분도 좋아 보이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식탁에서 차를 마시던 산하에게 어머니가 물었다.
"진서랑 아저씨라는 사람이랑 같이 놀았던 거야?"
"아... 네"
"어떻게 아는 사람이야?"
"주말에 운동하러 나갔다가 산책로에서 만났어요"
"주말에 같이 놀았던 게 무척 마음에 들었나 보네, 준서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와서 그런지 준서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얼굴 표정이 좋아졌어"
"그렇게 보여? 준서가 많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아저씨라는 사람은 진서 아빠인 거지?"
"네"
"그 사람도 혼자인 거야?"
"네"
"남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대단하네"
"딸한테 무척 잘하더라고요"
"좋은 사람이 맞기는 한가 보네, 준서까지도 저렇게 좋아하는 거 보니까"
산하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거실에서 할아버지와 티브이를 보고 있는 자신의 아들인 준서를 바라보고. 산하의 엄마는 손자를 말없이 보고 있는 자신의 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준서도 그렇지만 자신의 딸도 연휴 동안 분위기가 달라진 듯했다.
"산하야! 괜찮은 사람이면 잘 만나 봐. 평생 혼자 살 거는 아니잖아.
부모가 만나는 새로운 사람을 자식들도 좋아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아.
그런데, 준서 얼굴 보니까 네가 그 사람하고 잘 된다고 하면 더 좋아할 거 같아.
그러니까 한 번 실패했다고 지레 겁먹고 물러나지 마. 엄마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엄마의 말에 산하는 머리를 끄덕일 뿐 별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고 자신의 나이도 삼십 대를 넘겼지만 엄마 눈에 자신은 여전히 어린 딸인듯했다. 시시콜콜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속을 훤히 보고 계신 걸 보니....
이 글은 제가 창작한 이야기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지만 재미있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