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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정희 Oct 02. 2022

성장에 걸리는 시간을 존중해 주던 스승

 

만 스물 넷이 되어서야 처음 접한 미국, 그 중에서도 서부의 대학교들, 그 안에서도 그들의 대학원들은 다양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2000년대 초반에 이미 한 발 앞서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들이 더 문명적이라거나 더 인격적이라서였다기 보다는 실용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이긴 했다.


근래 들어 컴퓨터 과학 및 공학, 반도체 등을 위한 소재 및 장비 산업 등이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 교육이 될성부를 영역으로 재조명되고 있지만, 절대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많은 시간 대비 성공적인 결과를 반드시 보여준다는 정해진 법칙이랄 게 없는 실험 장비와 컴퓨터를 붙들고 인내력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 STEM 전공이다. 그 영역에서 대학원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수행’(나는 진정 STEM 박사 과정은 수행이라고 본다)의 길이다.


각종 연구비가 모여들고, 협력하고 싶어하는 글로벌 기업이니 연구소들과의 네트워크가 잘 되어 있는 미국의 유수 이공계 대학원들이지만, 교수들이 그 풍부한 자산을 기반으로 본인의 이름을 이어가고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결국 교수와 뜻을 같이 하여 배우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줄 좋은 학생 확보가 필수적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오랫동안(어쩌면 사실 지금도) 관찰되었던 이공계 전공 기피는 미국에서 한참 앞서 시작되어, 미국의 그 유명한 이공계 대학원들은 다양성 존중이라는 이름 아래 외국인 학생들에게 전액장학금 등의 다양한 동인을 제공하며 영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의회조사국(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의 통계를 찾아보니, 미국의 전체 이공계 학부/대학원 학생 가운데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988년 약 11%가량이었으나 2017년에 이르러서는 약 22%로 두 배가 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러한 미국 대학원 인구 비율 추세와 그에 따른 실용적 필요에 의해 닦아진 길 덕에 외국인 학생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과 배려 아래에서 대학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들어간 스탠포드는 그 중에서도 외국인 학생 비율이 높은 편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에 2002년 재료공학과나 응용물리, 전자공학과 대학원 수업 어느 시간에 들어가도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학생이 강의실의 삼분의 일은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 아래, 여러 나라 특유의 억양이 섞인 학생들의 대화를 알아듣고 질문을 주고받으며 가르치는 교수 자리가 극한 직업으로 보일 정도였다.


나의 지도교수는 테뉴어(Tenure: 종신교수)직을 부여받은 지 얼마되지 않은 캐나다 사람이었다. 그의 지도 하에 있던 우리 연구실의 국적 구성 역시 다채로웠다. 2002년에 내가 그룹에 처음 들어갔던 시기 구성원은  대략 한국인 2인, 미국인 3인, 인도인 2인, 중국인 2인, 터키인 1인, 이런 식이었다. 폴(Paul, 지도교수의 이름이다)은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매주 꼬박꼬박 그룹 미팅을 (유사한 영역 연구하는 학생 그룹을 크게 셋으로 나눠) 해 가며 각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어딘가 막혀 있는 문제들을 뚫어보려 함께 고민했고, 그 사이에 강의도 하고, 과제도 내고, 학회도 다니고, 논문도 냈다.

본인의 이름이 함께 들어가 있는 학회 발표 자료며 논문을 내려면 지도교수가 데이터의 타당성과 해석 스토리의 매끄러움을 검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학생이 대여섯 명을 넘어가면(여기서 인도인은 제외하도록 한다. 우리가 때때로 인도인이 쓰는 영어 억양을 희화화하는 실례를 범하지만, 사실 그들은 영어가 모국어 만큼이나 편안한 사람들이다) 그 일은 ‘빨간펜 영문법 선생님’ 역할을 위해 시간을 추가적으로 써야 하는, 인내를 요하는 일이 된다.


연구를 시작한지 얼마간 지난 뒤, 처음 SCI 논문을 내겠다고 초안을 폴에게 보냈더니, 이틀 뒤에 온통 빨간 색으로 도배가 되어 돌아온 수정본을 보고 민망해서 얼굴이 뜨거워졌던 순간이 지금도 생각난다. 아 내가 이렇게 영어를 못했던가. 그러고 돌아보니 사실 논문 초안만 얼굴 뜨겁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질문을 하던, 연구 진척 업데이트를 하던, 분명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그 큰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도 내가 이야기를 충분히 마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폴 모습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그 표정은 지금도 생각난다). 내가 그에게 그룹미팅 또는 개별 미팅을 통해 이것저것 업데이트를 할 때에도 뭔가 빨간 펜으로 어색한 표현을 바로잡아주고 싶어서 얼마나 근질거렸을까 싶은 깨달음!


그런데 그는 한 번도 나와 같은 외국인 학생에게 언어에 대한 불만을 표한 적이 없다. 연구자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데이터와 스토리의 큰 줄기라는 메시지를 내게 지속적으로 알려주던 선생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많은 외국학생을 받지 않았으면 문법 선생 일을 추가로 수행할 일이 없어 커피 타임 몇 시간씩 더 가지고 잠 잘 시간도 더 확보했을텐데, 선생은 우리 앞에서 한 마디 불평처럼 외국학생 키우는 일의 고됨을 내비친 적이 없다. 폴 뿐 아니라 우리 그룹과 협력관계에 있어 만났던 타 교수들도 비슷했다. 그 당시 분명 서툴렀을 영어로 헤매이듯 보고하는 나의 연구 진척 업데이트를 중간에 자르는 법 없이 끈기 있게 들어주던 선생님들이 내 주변에는, 많이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고 반복하던 폴과 나의 빨간펜 선생-학생의 관계는 좀 더 발전적이 되긴 했다. 폴에게 들어갔다 나올 때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던 논문 초안은 이제 조금씩 페이지 별 빨강색 색채를 드물게 받을 만큼 되어갔고, 학회 발표를 하나 하고 나면 그는 내가 좋은 스토리를 풀 줄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으쓱이던 시간이 조금씩 생겨나면서 나도 박사 학위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박사 학위 마지막 관문인 디펜스(Defense, 박사졸업 논문 내용을 지도교수, 논문심사위원인 타 과 교수들, 그리고 학생들 앞에서 세미나 형식으로 발표하고 평가받는 자리. 일반 관객 대상 발표가 끝나고 나면 지도교수 포함 심사위원 교수들과 문을 닫고 본격 질의 응답 시간을 가진다. 학교에 따라 형식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를 끝내고, 후련한 얼굴로 교수들을 둘러보았다.  폴이 그 자리에 있던 타 심사위원 교수들 앞에서 멋진 디펜스였다면서 ‘너는 교수를 해야 한다’고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인사치레였겠지만,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다른 네 명의 교수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축하하는 자리가 되었다. 뭔가 즐거우면 입을 옆으로 크게 벌리고 턱이 두 개가 되도록 웃던 파란 눈의 지도교수가 그 날 그 표정으로 타 교수들과 덕담을 나누며 ‘내 새끼 잘 했지’ 하며 자랑해 주던 그 순간이 많은 해가 흘렀지만 지금도 깊은 고마움으로 남아있다. 디펜스 날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라, 5년을 함께 하는 동안 외국인 학생을 끈기 있게 가르치며 언어장벽 너머에 묻혀있을 재능이 비집고 나와 색깔을 드러낼 때까지 그 자신만의 성장의 속도와 시간표를 존중해 준 선생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스탠포드 대학원은, 나와 같은 20대 초반임에도 이미 독립적으로 자기 연구 방향도 알아서 척척 찾는 것 같아 보이고 어릴 때부터 어떤 훈련을 받아왔는지 몰라도 어려운 수업을 바로 이해하고 무거운 질문을 교수들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던질 줄 아는, 아이큐가 족히 160-170은 되는 것 같은 글로벌 똑똑이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들 틈바구니에서 어찌할 바 없는 불안과 답답함을 안고 그저 시간과 씨름할 수 밖에 없던 나는 박사 과정 내내, 절실했다. 발전하고 싶다는 절실함이었다. 그런 나에게 가능한 것은 또다시 ‘그저’ 시간과 끈기 있게 씨름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간을 견딘 나에게 주었던 선생의 칭찬과 내게 기꺼이 써준 그의 시간은, 그래서 나로 결심하게 만들었다. 나도, 성장하려 애쓰는 사람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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