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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정희 Oct 11. 2022

좁은 시각을 인정하고 고칠 줄 아는 어른

스탠포드에 특히나 ‘친한파(親韓派)’로 알려진, 당시 60대 초반 영국인 교수님이 한 분 계셨다. 연구실 내 한국인 학생의 비율이 높기도 했고, 일 년에 한두 번씩 본인의 집에서 오랜 친구들, 교수들, 학생들을 불러 열던 파티에 재료공학과 한인학생들은 재학생 전체를 초대하다시피 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그 연구실 방 한국인 선배들이 성실하게 닦아 놓은 연구 업적이 두터웠음을 감안하더라도 그 분의 한국 학생에 대한 호감도는 유별났다.


한 가지 이유가 소소하게 더 있긴 했다. 그는 전자현미경, 그 중에서도 TEM(Transmission Electron Microscope, 투과전자현미경)을 이용한 물질의 구조와 그에 따른 특성을 밝히는 데에 ’70-80년대 학계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었고, 당시의 재료공학과 대학원 기초 과목 중에서도 본인의 연구와 깊은 관련이 있는 Crystallography(결정학: 한국에서도  ‘재료결정학’등의 제목으로 신소재공학과 (참고로 예전 이름은 재료공학, 금속공학, 세라믹 공학 등이었음) 등에서 배우는 과목이다)를 수십 년 동안 애정을 가지고 가르친 선생님이었다. 그 과목에 몇 명 주지 않는 A+는 매년 한국인 학생 차지였다.

결정학은, 소재에 있어서 그것을 구성하는 단일 원자 또는 여러 종류 원자들의 공간 상 상대적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 소재 특성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학문이다. 공부를 하다보면 정육면체니 정사면체니 하는 구조를 수백 수천번 그려볼 수 밖에 없는 ‘아트’ 같지만 사실 매우 논리적인 원리에 기반한 과목인데, 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지금도 모르겠다) 나를 포함한 한국 학생들은 다른 나라 출신들 대비 그 구조를 더 쉽게 이해했다. 당연히 교수는 그 현상을 아주 흥미로워해서 한국 학생과 스탠포드 결정학 과목의 역사를 즐거운 이야기 거리로 삼곤 했다. 교수는 매 년 기말고사 한 문제는 클래스에서 한 두 명만 풀 수 있게 기발하게 ‘세상에 없던 문제로’ 출제하는 취미(본인이 취미라고 했다..)가 있었는데, 그 문제를 매년 풀어내는 이도 꼭 한국인 중에서 나왔다(나도 그 사람 중 하나였음을 쑥스럽지만 자랑해 본다).


그 유별난 호감도가 편안하고 고마웠지만, 그가 훌륭한 분으로 내 기억에 남게 된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커피 타임을 가지다가 그가 이야기해 준 본인의 ‘친한(親韓)’ 역사의 시작이 그것이었다.

내 학부 은사이기도 한 선생님의 일화이기도 했으므로 1980년대 중/후반 정도였을 것이다. 그 때만 해도, Korea에서 온 학생이라고 말하면 그게 가끔씩 뉴스에 나오는 말썽꾼 북한이라는 것인지, 미국의 먼 우방(그 사실마저 당시 대부분의 미국 국민에게는 그닥 와 닿지 않았을 터다)이라는 남한이라는 것인지 관심도 없었을 시절이었다. 까망 머리 학생이라면 땅덩어리 큰 중국에서 온 사람이거나 선진국 일본 출신이겠거니, 하던 시절, 아무리 미국 내에서도 스탠포드가 상징적으로나마 진보적인 지역 안에 자리한 학교였지마는 ‘실용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와중에서도 아직 불확실한 개발도상국 출신 학생을 받는 것은 교수 입장에서도 여전히 리스크라 생각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배경 아래, 당시 젊었던 그 교수는 미국 서부에 불던 다양성의 바람을 너그러이 받아들여 이미 미국/영국 등 백인 학생 위주였던 본인의 연구실에 한국인 학생 한 명을 이미 채용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의 학부 은사였던 당시의 한국인 신입생이 본인의 연구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와 이런저런 이야기 후 본인을 그룹원으로 받아달라고 요구했을 때, ‘나는 이미 OO(본인의 첫 한국인 학생)을 받았으니 충분하다고 본다. 더 이상 한국 학생은 안 받을거다’ 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 때 그 학생의 대답이 정신을 번쩍 차리게 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나를 한국인이라고 안 받겠다 이야기하는 것이냐? 그것이 잘못된 설명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당신은 나를 한 인간이 아닌 한국인으로만 판단한다는 뜻이다.”


노교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반했다며 결국 그를 본인의 그룹원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 역사를 들은 것이 나에게는 그를 존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든 무의식적으로 한정된 사고에 갖혀 있었던 본인의 과거를 숨김없이 오픈하는 사람이었고(특히나 미국 환경 안에서 다양성 또는 인종차별 관련 토픽은  민감한 주제라서,  비록 과거 이야기일지라도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라고 말하는 것 리스크일수도 있다), 본인의 사고 변화의 계기를 제공한 제자를 십오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바로 그 이유로 좋았다며 자랑하는 선생이었다.

 

내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본인의 부족함을 이야기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노교수의 거리낌없음이 좋았다. 그리고 그를 존경했던 건, 그 거리낌 없음이 현재 그의 편견 없는 시각과 열심히 살았던 과거에 대한 과하지 않은 자부심과 맞물려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본인의 잘못됨을 깨닫게 해 준 경험을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건강함은 그후로도 내가 가지고 살고 싶은 그 무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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