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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정희 Nov 23. 2022

원하지 않아도 존중하여 받아들이는 느린 변화

나는 비즈니스 스쿨이 유명한 학교에서 긴 대학원 생활을 했음에도, 원한다면 충분히 수강할 수 있는 숱한 경영 관련 명강의들을 뒤로 하고 내 전공 과정에만 집중하다 학교를 떠난 학생이었다. 이십 대 초반부터 여러 분야에 동시다발적 관심을 기울이면서 넓은 네트워크까지 챙기는 훈련을 쌓아 나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지만, 이십 대를 지나던 나는 내 분야 안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만으로도 이미 절실했다. 그러던 내가, 인텔에서의 엔지니어 생활까지 끝내고 한국에 들어오면서는 ‘이제 비즈니스를 배울 때가 아닐까’ 하는 나름의 결심 아래 겁도 없이 비지니스컨설팅 회사에 들어갔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돌아보면 사실상 그 때의 내게는 모든 것이 예상 이상 더 어려웠다. 사소한(사실은 알고 보니 사소하지 않았던) 것부터 문제였다. 학회에서 발표하는 미괄식의 현학적 장표 구성 말고, 컨설팅 회사가 쓰는 스토리 순서와 그들이 이용하는 언어로 매사에(고객 대상 보고 뿐 아니라 내부적 소통에 있어서도) 명료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을 중시하는 업에 이제 몸을 담근 것이었는데, 나는 그러한 형식의 중요성을 먼저 인정하고 그에 맞게 대처할 시기부터 놓치고 있었다. 

파워포인트 보고서의 특정 페이지 안에서 논란의 여지없는 단어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전체 팀이 모여 한참을 고심하고, 한 줄로 쓸 수 있는 문장을 두 줄로 썼다고 모두의 앞에서 혼나는 과정이 하드 트레이닝이라는 이름을 입고 반복됐다. 그런 일이 하염없는 시간과 감정의 낭비로 보였던 나는 중요하지 않은 디테일로 몸을 축내며 일하는 업 자체가 당황스럽다는, 그곳에서는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는 혼자만의 곤조로 괴로워 했다.


컨설팅 초심자에게 요구되는 기본 자질이란 결론으로 바로 뛰어드는 인사이트가 아니라,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바닥을 다진 뒤 필요에 따라 간단한 모델도 만들어서 팀장과 파트너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기반하여 두괄식으로 정리해 그들(팀장과 파트너를 ‘내부 고객’이라고도 불렀다)이 인사이트를 낼 수 있도록 명쾌히 전달하는 자질이다(…나중에 돌아보니 그랬다). 그러나 당시의 미숙했던 나는, 대학원과 첫 직업에서 내가 소중하다 배웠던 혼자만의 집중 시간을 가져가며 끈질기게 공부하듯 일하는 환경 대비 내가 선택하여 스스로 처한 새로운 환경 사이의 간극을 재빨리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국내 큰 금융회사 간 인수합병 후 문제를 다뤄야 하는, 당시 사내에서도 나름 주목받던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역사가 수십 년으로 긴 데다가 엘리트 학교 출신들이 임원부터 주니어에 이르기까지 자리잡고 있던 회사가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금융사에 합병되면서 자연스레 나타난 두 조직 간 갈등을 풀어내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조직관리, 조직행동론 등 여러 이름을 입고 있는 이론들은 결국 조직이 가지고 있는 사람(인사체계)과 돈(보상체계), 더 나아가 합병 시 궁극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중복 조직의 통폐합 및 구조조정 등 예민한 사안들을 둘러싼 개개인과 그들이 모인 단체가 드러내는 마음(다른 말로 ‘입장’ 정도가 될 것이다)에 대한 문제인지라, 사람의 마음이 남들보다는 조금 더 이해가 되던 나로서는 여러 이해 당사자 간의 입장에 걸맞을 장치들이 대략이나마 잘 읽혔다. 


더 늦기 전에 그 이야기를 내어놓고 싶었다. 저녁식사 후 한 밤 중에 열린 브레인스토밍 미팅에서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의 내가 그 때로 돌아간다면 파트너가 원하는 시간을 골라 그가 귀를 기울일 방식으로 메시지가 전달되도록 이런저런 스토리라인을 쥐어짜는 시간 정도를 먼저 가졌겠지만, 나의 유용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앞섰던  나는, 최종 발표날에 파트너가 클라이언트에게 결론으로 이야기했을 만한 추상적인 ‘썰’을 내부 브레인스토밍 회의 때 담당 파트너 앞에서 장황하게 풀어냈다. 당연하게도, 크게 마음먹고 내어 놓은 나의 썰은 그저 허공으로 흩어졌다.

프로젝트가 진행되어도, 나의 의견 또는 인사이트가 반영되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결과물 가운데 그 밤에 나누었던 장황한 시각이 일부 포함이 되었더라도, 당연했다. 그 때의 나는, 내 의견을 내 의견이라고 흔적을 남길 요령도 갖추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날 밤 느낀 방 안의 서늘한 공기는 10년이 지난 이 순간까지 기억난다.



이렇게 일을 하고 있으니 마음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이런저런 일을 남편에게 쏟아 놓았다. 역시 공학도 출신인 남편은 나와는 달리, 학생 시절부터 비즈니스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다. 대학원에서도 비즈니스 관련 수업을 몇 가지 챙겨 듣고, 컨설팅 준비를 한다며 케이스 인터뷰 요령에도 미리 대처하던 사람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서는 바로 서울로 돌아와 첫 직업으로 컨설턴트 생활을 시작해 EM(Engagement Manager, 당시 해당 회사에서 부르던 프로젝트 ‘팀장’)을 하던 중이었다. 그 역시 ‘박사 출신 컨설턴트’였던 사람의 입장에서, 나보다 2년 가량 앞서 당황스러움을 극복해 나간 사람으로서 내게 아주 명쾌하게 조언했다.


“컨설팅 하는 사람은 이런 모양이어야 한다, 는 건 사실 중요하지. 사장이니 부사장이니 하는 클라이언트들은 파워포인트 페이지 맨 윗줄 읽을 시간 밖에 없으니까, 그 사람들에게 꽂힐 단어 뽑느라 시간 보내는 것도 중요하고. 또 그 클라이언트 찾아다니면서 프로젝트 따다가, 회사 돌아와서 여러 팀장 다루면서 한꺼번에 지도하는 파트너들은 앉아서 차분하게 뭘 정리할 시간이 없을 것 아냐. 그래서 리서치를 찰떡같이 해서 요약해 줄 사람이 있어야 되고. 결정적으로 자기들이 그렇게 자랐고. 그런 파트너에게 뭐든 원하는 방식으로 가져다 주는 게 컨설턴트의 본분이라고 생각들 하는 거지. 

그게 중요하다 인정이 안되면, 그 일을 안 하는 게 맞지.”


그 일을 안 하는게 맞다니. 나는 비즈니스 세계를 익히겠다고, 이미 십년이나 쌓고 있던 트랙 레코드를 뒤로 하고 여기 발을 들인 건데. 


그런데, 위로라기보다 아주 건조한 상황 설명에 가까웠을 그의 조언이 순간 내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나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사로잡혀 있던 내가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가장 필요한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알았어. 중요하다고 근원적으로 인정이 안되는 것이면, 그 일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실험적 존중이라도 해 봐야겠구나.



그 결정을 하고서, 짧은 시간 안에 중요한 내용 위주로 상황을 파악하고, 논란이 없는 단어를 기차게 골라내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두 줄이 아닌 한 줄에 넣고, 엑셀 모델도 기왕 깨끗이 만들어 관리하고, 상대가 누구든 필요한 이야기만 선별해 명쾌한 설명을 선보이고, 내가 한 일은 내가 했다고 드러내게 말하는 등의 컨설팅사가 요구하는 자질을 중요한 것이라고 존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준비하느라 잠을 못 자고 시간을 투자하는 데에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과 그 자질이 내 것으로 소화되는 데에는 시차가 있었던 지라, 원래의 나란 사람의 색깔 위에 새로운 색깔을 덧칠하려다 나 자신도 어색하고 주변이 보기에도 어색한 시간은 여전히 계속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때 중요하다고 인정해 일부나마 내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 기술은 그 후 내가 다른 길을 걷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발전시켜 활용할 수밖에 없게 되더니, 어느새 오늘의 나를 설명하는 데 나란 사람을 채색해 주는 기반이 되어 있었다.


그 시간은 부정할 수 없이 괴로운 시기였고, 회사를 옮기고서도 한동안 마음이 많이 어려워 극복하는 데에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변화의 시작이 나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을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러나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 비자발적 괴로움 역시, 다른 영역으로 지평을 넓히는 것이 가능한지 실험하게 된 과정이었다. 실험을 해 보고, 그런 끝에도 그것이 나의 일부가 안되는 것으로 판명되면 그냥 흘러 보낸다. 실험 끝에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되어주면, 그것은 고맙게도 플러스다.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시작된 변화였지만, 그렇게 변한 나 역시 오늘 나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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