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나고 자라 학부 포함 16년의 꽉 찬 학교 생활을 한 뒤 시작한 미국 대학원 과정이었다. 초등학생인 첫째가 COVID19으로 인해 집에서 Zoom 수업하는 것을 엿들어 보면, 요즘은 선생님과 아이들 간 질문도 아무 거리낌 없이 오고 가도록 장려하는 방식의 교수법이 잘 정착했다는 것을 (다행히도) 목격하게 되지만, 선생님에게 아무 질문이 없이 수업 시간이 다 지나가도 그 누구도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는(그것이 사실은 주입식 교육 방안 상 ‘시간을 아끼는 효율적 방식’이라 누구나 받아들였을) 학부 포함 16년을 보내고 내가 맞닥뜨린 미국 대학원 강의실은 여러 모로 희한한 공간이었다.
먼저, 꽤나 다양한 국적의 내 입학 동기들은 저마다 질문이 많았다. 그 중엔 좀 모자라 보이지 않을까 싶어 입 밖에 내기 전 망설여야 할 것 같은 질문들도 허다했으나, 그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친구들의 질문을 받을 때 얘가 또 무슨 기발한 질문을 하려고 하는 기대가 있는지 질문하는 학생을 보는 교수들의 눈은 흥미로움으로 빛이 났다. 그 모자라 보이지 않을까 싶은 질문이 때로는 교수들 머리 속 어딘가 숨어있던 다른 흥미로운 지식을 끌어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희한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공간에서 궁금한 것이 하나도 없는, 그 질문 많은 그들이 보기에 거꾸로 희한하리 만치 조용한 학생이었다.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엔 배낭여행 외에 딱히 외국 생활 경험이 없었던 나(그리고 사실 국내에서도 나의 학부를 넘어서는 교류에 관심이 크게 없었던, 지금 야심만만한 미래를 그리는 젊은 세대 친구들이 보면 정말 놀랄 만큼 제한적인 네트워크 안에서만 머물러 있던 나)는 그런 국제적인 학교의 대학원에 들어오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어떤 정도의 IQ와 야심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도 못한 상태로 미국 땅에 내렸다.
2002년 스탠포드 재료공학과(Materials Science & Engineering) 석/박사 대학원 과정에, 국적이 다양한15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입학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가운데 세 명 인도 출신 친구들이 첫 날부터 눈에 들어왔다. 십억이 족히 넘었을 인도인들 가운데, 세 명 다 각자 출신 지역 별로 제일 공부 잘한다는 아이들만 모아두었다던 IIT(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 출신이었고 서로 의지도 되었던 터라, 그들은 수업시간마다 강의실 맨 앞 자리에 나란히 앉아 질문을 쏟아냈다. 그 때의 나로서는 당최 알아듣기 힘들었던 인도인 액센트를 교수들만은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즐거이 대답들을 하셨다.
나는 내가 이해해야 하는 영어 발음이 시사영어사/파고다어학원에서 배운 발음 외에도 다양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부터 불편했고, 조금 알아듣기 시작했을 시기에는 ‘아니, 일단 받아들이지 무슨 그런 소소한 질문을 할까?’라는 불편함에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 시간이 그들 세 명에게 점령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더 불편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친구로서 사귀게 된 그들은, 알고 보니 남들을 방해해 가면서까지 수업을 점령하려는 의도 같은 건 관심 없는 사람들이었다. 강의 내용을 그대로 흡수하면서 동시에 궁금한 것이 많았던 것일 뿐.
그렇게 한동안 타 학생이 하는 질문의 질적(質的) 평가만 하고 있던 나는, 궁금한 것이 없는 나 자신에 이제 당황했다. 궁금한 것이 없다는 것은 호기심이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일텐데, 엔지니어며 과학자가 되겠다고 유학 와 놓고서 내가 호기심 없는 사람이라는 것만 확인하였다는 충격적 결말 속에 학위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러한 자각이 생기고 난 뒤, 긴 시간에 걸쳐 강의 시간 중 질문 거리를 일부러 찾기 시작했다.
한 동안은 일주일이 가기 전 뭐라도 질문을 두 개는 던져보기로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순전히 질문 숫자를 늘려보겠다는 결심을 채우기 위한 예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서도 이게 정말 멍청한 질문은 아닐까 싶어 질문하기 전에 항상 가슴이 쿵쾅거렸다. 영어도 이상할텐데, 거기에 질문 내용도 멍청해 보여, 그럼 얼마나 ‘없어’ 보일까. 그 때의 나는 다른 이의 시선이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가슴 쿵쾅에 결국 져서는 소득 없이 일주일이 가 버리면 초조한 마음이 들어, 하다못해 지도교수와의 연구주제 업데이트 위한 그룹 미팅에서 그의 옛적 이야기를 물어보는 것으로라도 갈음하고 혼자만의 위안을 한 적도 있다.
원인이 무엇이었든 내게서 어느 샌가 부족해져버린 호기심이란 걸 다시 만들어내는 연습을 시작해 질문 거리가 많은 사람으로 나를 바꾸는 데에 족히 3년을 썼다.
3년.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사람에서, 뭐든 궁금한 것이 많은 이로 한 발 더 내딛기까지 걸린 시간.
그 때가 20대 중반이었고, 그 이후로 20년을 더 살았다. 인생의 반 남짓은 내게 들어오는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살았고, 나머지 인생은 덜 떨어져 보일 수 있을 상황도 안 무서워하는 이가 되어 살기로 마음먹고 지냈다.
질문을 가지고 상황을 파악하고 사람을 배우는 것이 버릇이 되면서, 낯선 환경과 새로운 배움 앞에 놓이는 데에 대한 두려움을 궁금함으로 바꾸는 것도 내 성격의 일부로서 자리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내 색채의 근간이 되어 주었던지라 그 모든 것을 합쳐 놓고 보니, 다 같이 고마운 과거가 됐다.
변화의 시작점과 주도권이 나 자신에게 있고, 딱히 언제까지 나를 바꾸겠다는 마일스톤의 압박감 없는 장기적 변화 프로젝트는, 할 만했다.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특질로 정착시키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다. 나 자신이 나에게 시간을 허락해 줄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나니 무엇보다, 그렇게 변한 나 자신이 억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