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대학원을 거쳐 인텔에 이르기까지 공학만 붙들고 다른 영역을 돌아보지 않았던 나는 인텔 생활을 시작하면서야 비즈니스/시장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오며 컨설팅 회사(BCG)에 들어가서부터 전략이니 산업 방향성이니 하는 토픽에 대해 ‘비즈니스 언어’로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후술하겠지만 그 기간은 내 커리어에 있어 중요한 계기와 기반이 되어 주었던 한 편 굉장히 어려웠던 경험으로도 남아 있다.
그런 혹독한 경험을 졸업한 뒤 삼성전자에서 구글 크롬북을 위한 ‘Strategic Alliance’를 할 사람을 찾는다 하여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됐는데, 전략적 제휴 또는 협력 정도로 번역 될 그 업무라는 건 그 때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역할이었다.
2010년 초반 구글은, 전세계적으로 시장 성장속도가 둔화되고 있던 PC 시장에 당시로서는 큰 혁신이었던 크롬OS로 기동하는 노트북(=크롬북)으로 미국 교육 시장부터 잠식해 들어가려고 상당한 돈과 사람을 투입하고 있었다. 201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미국 교육시장만큼은 애플 기기가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용 자재로 자리잡고 있었고, 대부분 국가의 교육시장 및 B2B/B2C영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이 HP, IBM(후에 레노보로 탈바꿈), Dell, 삼성 등의 제조업체들과 20년 넘는 시간 동안 파트너십을 공고하게 쌓는 데에 공을 들인 결과로 “윈텔”PC가 시장의 큰 파이를 가져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글은, 초중고(미국에서는 K-12 education이라고 부르는 섹터이다) 학생들이 윈도우PC 또는 매킨토시 없이도 충분히 일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그들이 구매력이 있는 성인으로 자랐을 때 크롬북의 세상을 열 계획이었다. 물론 공개적으로 이런 전략을 드러낸 적은 없었던 것 같지만, 구글이 당시 교육 시장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며 쏟아붓던 마케팅 비용을 보면 그런 목소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 아래 구글은 강력한 제조능력과 판매망을 가진 파트너가 필요했고, 그 손을 잡은 첫 회사들 중 하나가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 PC팀(크롬북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IT솔루션사업부라는 이름으로 독립되어 있었으나 2013년 스마트폰 사업이 주력인 무선사업부에 흡수 통합 되었음)에서도 크롬북을 시작해야만 할 절박하고도 전략적인 필요가 있었다.
IT기기의 ‘영혼’(=OS)을 가졌으니 세상의 주인공은 본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구글, 그리고 IT기기에 ‘멋진 외모(=디자인)와 튼튼한 몸(=내구성 등 품질)’을 만들어 주고 ‘인싸가 될 능력(=공급 및 세일즈 망)’을 부여해주는 능력을 가진 삼성전자, 이 두 회사 간에는 밀당해야 할 것 투성이였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먼저 주력하는 게 맞는지, OS든 하드웨어든 업그레이드 버전은 언제 나올지, 이제 막 크롬북의 세계에 발 들이려고 채비하고 있는 숱한 제조사들 대비 배타적인 권리를 가져가려면 구글에 뭘 주어야 하는지, 두 회사가 함께 결정한 사항 별로 홍보를 어떤 식으로 가져가야 하는지, 이것을 두 회사 임원들이 결정을 하고 나면 다시 내부 상품기획/개발/마케팅/세일즈/홍보 사이에는 어떤 조율이 있어야 하는지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산재했다. 그래서, 나의 일은 두 회사 안의 각자 다른 임무를 가진 많은 이들의 입장을 듣고, 이해하고, 조율하며, 맞서 싸우다가도 때로는 나서서 대변해 나가야 하는 업무였다.
그 자리에 백 개 가까운 이력서와 십 수명의 인터뷰(정말 그 숫자가 맞는지 알 수는 없으나 :) ) 끝에 나를 뽑았다고 종종 자랑하던 나의 부서장은 어린 시절 이민을 가 미국에서 자란 한국계 미국인이었는데, 오랜 기간 HP에서 일한 뒤 삼성전자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출근 첫 날, 회사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놓고 마주 앉은 첫 1:1에서 그가 종이 한 장을 먼저 내밀었다. 열 두셋 정도 되는 사람의 이름과 소속, 이메일, 핸드폰 등의 연락처와 간단한 소개가 적힌 표였다. 소속을 보니, 구글 본사 인력 5명가량, 삼성 PC 내부 7-8명가량이었다.
그가 어눌한 한국말로 말했다(그는, 본인이 원하면 영어만 써도 대접받으며 살 수 있었던 삼성전자 안에서 본인이 굳이 노력해 한국어를 배워서 쓰는 사람이었다)
“이건 정희씨가 일을 잘 하는 데에 key 가 될 인물들을 적어준 거에요.”
더 중요한 말은 그 다음이었다.
“그 사람들이 성공하게 도와줘야 정희씨가 성공하는 거에요.”
어떠한 업을 하느냐에 따라 이 조언의 효용에 차이가 생기긴 할 것이라 본다. 그렇지만, 협업을 기반으로 일을 해야 하는 대기업에 처음 입사해서, 그것도 또다른 타국 대기업과의 협업을 끌어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성공의 본질을 그보다 더 이해하기 쉽게 찔러주는 설명이 없었다.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 날 제임스(그의 이름이다)가 준 조언은 내 안에 항상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본인의 성공을 그렇게 주변의 성공의 합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그 후로도 많지 않았다. 나의 성공은 내 주변 사람들의 성공의 합.
매니저이기에, 본인이 매니징하는 멤버인 하정희의 성공이 본인의 성공의 합의 요소였던 그는, 나를 정말 중요한 사람, 통찰력 있는 멤버, 책임감 있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포지션 시켜 주었다. 매니저의 얼굴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개입하지만, 내가 나설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전면에 나서게 해 주고, 믿어 주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자랑했다. 여기 좀 보세요, 이 훌륭한 멤버를 삼성을 위해 내가 뽑았습니다.
공학도의 세계에서 방향을 돌린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내가, BCG에서 훈련의 시간을 잠시 거쳤다 하여 비즈니스 인사이트가 금방, 마구 나왔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색깔을 이해하고 아직 희미했을 자질을 믿어주었던 매니저의 그러한 서포트 앞에서 나는, 내가 보는 나 자신도 스스로 생소하고 남들 역시 그런 나를 생소하게 바라보았던 컨설턴트 시절을 거치며 크게 구겨진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그와 함께 일했던 시기에 모두 회복했다.
그 때가 지금의 나를 shaping 하는 데에 큰 변곡점이 되었던 시기였다. 그 이후 나는 많이, 그리고 좀 더 속도감 있게 자라기 시작했다. ‘나의 성공은 내 주변 사람들의 성공의 합’이라는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내게 준 영양분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한 매니저를 만나고 나니, 나도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