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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Apr 27. 2021

느리게 뛰는 행복한 러너

생애 첫 하프 마라톤

March 2, 2019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예전보다 나잇살도 찌고 무릎도 안 좋아져서 한 번에 오래 뛰진 못하지만 천천히 심호흡 박자에 맞춰 땀이 송송 날 때까지 뛰고 나면 개운하고 상쾌하다. 


몇 년 전 뉴저지에서 베이로 이사 가기로 결정한 날 밤에 제일 먼저 한 일이 금문교를 건너갔다 오는 Levi’s 달리기 대회 등록이었다. 새로운 곳으로 가서 우리 가족 모두 잘 적응해서 살 수 있을까, 난 남편과 달리 잡을 다시 찾아야 하는 상황이어서 설렘보단 두려움이 더 컸던 마음이었는데 금문교 왕복 티켓을 얻고 한껏 힘내어 이사 준비를 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신고식 같았던 꿈같았던 달리기 대회를 끝으로 땀을 흠뻑 흘려 뛰어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혹시나 결승선을 통과하는 엄마를 볼 수 있을까 두리번거리며 마지막 스퍼트를 내어보았던 내가 유치해서 혼자 히히 웃음도 났다. 세찬 바람 덕에 달리면서도 땀이 마르는 금문교 달리기를 다시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는데 마음 약해지기 전에 일단 등록부터 하는 걸로 ㅎㅎㅎ


SF Marathon July 28, 2019

생애 첫 하프마라톤을 뛰었다. 


[시작 전]

네시에 일어나 대추와 호두 범벅 케이크,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입에 털어 넣고 주섬주섬 챙겨 샌프란으로 올라갔다. 아직 졸리고 약간의 긴장감.


[0-4 마일 구간]

오늘을 위해 비트 있는 노래들로 채워 넣은 playlist를 튼다. 큰 아이가 좋아하는 Imagine Dragons의 Believer, Natural을 시작으로 파이팅 외치며 뛰기 시작. 첫 water station이 나와서 스킵하려다 한 모금 축였는데 바로 첫 번째 오르막이 나온다. Fort Mason. 이제부턴 고민 말고 그냥 마셔야지.ㅎㅎ 내가 뛰는 자세가 궁금했었는데 마침 올라온 해가 그림자를 만들어주어 내 그림자와 함께 뛴다. 상체를 바로 세우고 다리를 좀 더 들어 올리자. 아직은 여유롭다. Security staff에게 부탁해 사진도 한 장 찍어둔다.


[4-6.5 마일 구간]

지난 4월 말 10k 달리기 출발선을 지난다. 이번엔 water station에서 에너지 드링크 한잔을 모두 들이켰다. 곧 고난도의 두 번째 오르막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 팔을 휘저으며 힘을 내어 오르다 가파른 구간에선 걷는 속도만큼 느려졌지만 난 여전히 뛰고 있는 중이라고. 고지가 눈앞에 보일 무렵, 타이밍 딱 맞춰 On top of the world 가 흘러나온다. 불타는 허벅지 느껴봤니? 첫 6.5마일 수고했어! 


[6.5-10 마일 구간]

금문교 밑을 통과해 coastal trail 구간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아까 거기가 고지가 아니었어 흑 ㅠ 완만한 경사구간이 한참 계속되니 종아리와 발목이 뻐근하게 아파온다. 그래도 오른쪽 태평양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혀줘서 견딜 수 있다. 8마일쯤 water station이 나왔는데 뭔가를 함께 나눠준다. 내겐 첨으로 마시는 게 아니라 씹는 걸 나눠주는 달리기 대회라 뭔지도 모르고 집어 들었다. 10마일에 가까워지니 상체 꽂꽂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뛰는 이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분들은 이미 저 멀리 보내드렸다. 마음을 비울 시간 ㅎㅎ


[10-13.1 마일 구간]

연습을 10마일까지만 했기에 지금부턴 personal record 갱신이다. 이젠 허벅지부터 발까지 안 아픈 데가 없다. 하체 골고루 고통 분담이다. 다들 나만큼 아픈 건지 나만 유독 아픈 건지... 처음 뛰어봤으니 모르겠다. 이때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나온다. “지금부터 갈 때까지 가볼까까까까~~~~” 오예 가사가 확 들어와 꽂힌다. 12마일 사인을 지날 무렵 playlist 한 바퀴가 다 돌았다. 제일 길었던 1마일을 걷다시피 뛰며 다시 첫 번째 곡 believer를 듣는다. 마지막 힘을 내보자. Linkin Park의 Numb을 들으며 finish line을 들어왔다. 엄청 큰 메달을 받았다. 무릎이 견뎌주어 정말 다행이다. 


그 이후...

혼자 달리는 시간과 달리는 동안의 숨찬 호흡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3마일을 뛰는 날도, 숨이 유난히 빨리 차오르는 날도, 발목이 아픈 날도, 날아갈 듯 가뿐한 날도 그날의 기쁨이 있다. 이른 아침 찬 공기를 마시는 날도, 뉘엿뉘엿 지는 해가 뿌려주는 그림자가 긴 날도, 꽃 향기가 공기 가득한 날도, 뿌연 연무 같은 비가 내리는 날도 그날의 냄새가 있다. 지루할 것만 같은 달리기가 매번 새롭고 즐거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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