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정말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갈까. 내 슬픔을 함께 졌던 친구가 있었나. 나는 누구의 슬픔을 나누어 들었나. 돌아보면 모두 한 때였다. 그랬던 시절도 있었지만 영원하진 않다. 영원할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짧았다.
1부터 100까지 나의 모든 역사를 나누었던 친구들은 곁에 없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만큼, 서로를 깊이 아는 만큼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가까운 만큼 거칠었고 관계는 산산이 부서졌다.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각자 알리고 싶은 만큼 털어놓고 그만큼 들어주면 되었다. 때에 맞춰 인사를 건네고, 소식이 뜸하면 안부를 묻고, 서로의 태어난 날을 해마다 기억해 주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랬던 이들은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있다. 그렇게 같이 익어가는 중이다.
하이에게 알려줘야겠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친구에 대하여, 친구 관계에 대하여.
"하이야 있잖아,"
"친구는 바뀔 수 있어. 어제까지 같이 놀았던 친구인데 오늘부터 갑자기 안 놀게 될 수도 있고, 어제까지 한 번도 같이 논 적이 없는데 오늘 갑자기 그 친구랑 같이 재미 있게 놀 수도 있고. 친구 사이는 그렇게 바뀌고 변해. 그런데 바뀌지 않는게 있다?"
"모오?"
"엄마, 아빠. 엄마 아빠는 안 변해. 엄마 아빠는 항상 하이 곁에 있을거야. 엄마 아빠가 하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 엄마 아빠가 화가 났거나 하이를 혼낼 때에도 하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거든. 친구는 바뀔 수 있지만 엄마 아빠는 절대 변하지 않아. 알겠지?
"응."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라고 말하기 전에 무례한 친구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것을 먼저 가르치고 싶다. 스스로를 잘 지켜내는 힘을 갖춘 후에 배려도 하고 양보도 하는 아이가 되면 좋겠다. 그 과정에 엄마 아빠가, 엄마 아빠가 베푸는 사랑이 좋은 연료가 되어 아이의 마음이 건강하게 잘 세워지면 좋겠다.
캠핑장 너 빼고 논다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하이의 변신은 무죄
캠핑장에 다녀오고 2주 쯤 되었나. 평소처럼 하원 후 재이와 놀다가 또 붙었다. 역시나 하이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고, 건전지가 들어간 장난감을 재이가 계속 물에 넣으려고 했다. 하이가 안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 했지만 끈질기게 물에 넣기를 시도하는 재이. 하이가 끝까지 제지하자 재이는또 하이를 향해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그 순간,
"아빠 가자!"
장난감을 탁탁 챙기더니 그대로 차로 가더란다. 남편에게 듣자마자 너무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캠핑장에서는 재이가 버럭하고 성질을 내면 찍소리도 못했던 하이가, 그대로 쭈그리가 되어 풀이 죽었던 하이가, 그렇게 주눅이 든 채로 재이 눈치를 보며 주변을 맴돌던 하이가 말이다. 재이라면 절절매던 하이가 달라졌다.
친정 엄마는 "그래. 그렇게 할 소리는 해야 양양거리지 않지."라고 했고, 언니는 "하이 한 건 했네." 하며 웃었다. 하지만 내가 기뻤던 건 재이를 내버려 두고 돌아선 게 통쾌해서가 아니다. 한 건 했다? 한 방 먹였다?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더이랑 재이가 하이를 얕보지 않겠다는 안도감이 들어서도 아니다. 하이가 쎈케가 되길 바란 적은 단연코 없다.
남편이 개운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하이가 말 하더라고."
바로 이거다.
대응.
눈치 보지 않고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행동한 것. 이게 기쁨의 전부였다. 재이를 향해 똑같이 악을 쓰지도 않았고, 날카로운 말로 쏘아붙이지 않았다. 협박조의 으름장을 놓지 않은 것도 기특하다.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에서 벗어나길 택한 것,그 상황을 멈춘 것,우리가 가르친 것이 아니다. 무례함에 단호함으로,이렇게 멈추는방법이 있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남편은 하이의 반응에 아쉬운 점이 있다고 했지만 못 하던 것을 해낸 하이이다. 큰 산을 넘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일까. 그 사랑하는 재이와의 놀이를 그만하겠다는 마음을 어떻게 먹은건지, 어떻게 그렇게 일순간 쿨내 진동하는 차도남이 되어 돌아설 수 있었던 건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신통방통 할렐루야 아멘이다.
갑자기 온 세상이 아름답고 모든 것에 감사하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얄팍하고 가볍구나 싶다. 쉬운 말로 하이를 다독여준 남편에게도 감사, 매일 교회에서 기도해준 엄마에게도 감사, 엄마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늘 아버지께도 감사. 잊지 못할 사쁨한 밤 2024년 8월 23일, 나의 할 일을 정확히 알았다. 사랑하고 기도할 것. 그럼 되겠다. 감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