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꽃 피는 나무 - 탄생 비화
10) 국가란 이런 것 이다.(3)
연속극을 포기하고 한 동안 이 방송국 저 방송국 원고 청탁이 있을 때마다 뛰어다녔다. 라디오며 TV며 가리지 않고 썼다. 대중 문학도 문학은 문학인데 문학을 한다는 자존심은 사라지고 그냥 생계형 노동자가 되었다.
지금처럼 온라인으로 작품을 쓰고 온라인으로 보내는 세월이 아니었다.
다 쓰고나면 원고 뭉치를 들고 직접 방송사까지 갖다 드려야 하는 시절 이었다. 단막도 쓰고 한 달 분량의 라디오 연속극도 썼다. 2,3회로 끝나는 특집극도 썼다. 청탁도 없는데 내가 먼저 써서 들이민 단막도 많았다.
이 때 KBS에 “드라마 게임”이라는 단막극 프로가 있었다.
전문 용어로 말하면 시추에이션 드라마로 매주 작가와 소재가 다른 90분 드라마였다.
게임이라는 의미는 작가들이 인간의 갈등을 그리며 논쟁을 불러일으켜 시청자들로부터 그 해결책을 토론하게 하는 드라마이다. 그 프로그램을 어떻게 쓰게 됐는지는 잊어버렸지만 “당신의 부재”라는 90분 드라마가 방송이 되고 여러 사람들 한테 칭찬을 들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내게 목사님이 악수를 하시며 엄지 척을 하셨다.
작은 거인이야....
뒤에 줄줄이 목사님과 악수 한 번 해보려는 교인들이 많아서 웃으며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목사님이 토요일 밤에 드라마를 보시다니....궁시렁대면서도 좋아서 웃었다.
연출을 맡았던 피디가 나한테 느닷없이 밥을 사라고 했다.
그 작품 연출하고 나서 사장님한테 칭찬을 듣고 봉투를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동료들이 축하한다며 밥을 사라고 해서 상금보다 밥값이 더 나갔다는 하소연이다.
그러니 이번엔 나보고 밥을 사라는 것이다. 자기도 축하받는 밥을 얻어먹고 싶은 모양이다. 뭐 나쁜 일이 아니라 OK. 그 후 그 피디하고 몇 번 더 드라마 게임을 썼는데 평판이 좋고 시청률도 좋았던 모양이다. 90분 짜리 단막극 대 여섯편을 성공시킨 후 실력을 인정했는지 다시 연속극 청탁이 들어왔다.
중견 피디 A씨를 소개 받고 인사를 텄다. 나는 부산하게 준비에 들어갔다.
스토리를 쓰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시놉시스(Synopsis)를 부지런히 써서 내고
아마도 통과되었지 싶었다.
어느 날 방송사 본부장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본부장님을 바꿔드리겠다는 것이다. 얼떨떨해서 전화를 받았다. 죄송하지만 본부장실로 좀 오실 수 없느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높은 분이 부르시는데 토를 달아서도 안 되겠기에 갔다. 본관 방송사 앞은 데모대 때문인지 분위기가 살벌했다. 늘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출입증 정도로는 안 되고 몇 번이고 가는 곳을 타진 받고야 출입이 허락 되었다. 본부장실로 찾아 올라갔다.
차 한잔 다 마시기도 전에 본부장이 물었다.
사장님과는 어떤 관계십니까?
의자에 앉은 후 아주 정중하게 물었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뻔히 쳐다보았다.
아니...뭐 그냥 궁금해서요....
사실로 말하면 사장님과는 관계가 없었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내가 그래 뵈도 대통령하고 얽힌 적은 있어도 사장님 클라스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관계도 아닌데요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당돌하게 되물었다.
그런 것까지 말씀드려야 하나요?
정중하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가시가 돋힌 대답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아...그런게 아니고...그냥 궁금해서요...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시국이 이런 때라서 식사 한 번 대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했다.
본부장이 아직 신인 딱지를 벗지 못한 작가에게 무슨 식사까지나...그리고 대체 뭘 부탁한다는 거지? 할 말이 없을 때 쓰는 그들만의 관용어일 거라고 짐작했다. 별로 더 할 말도 없는 듯해서 적당히 인사를 하고 나왔다.
2, 3일 지난 후 피디를 만나러 별관으로 갔는데 국장이 나를 들어 오라고 했다. 앉으라는 말도 없이 왜 나한테는 알리지도 않고 본부장실로 갔느냐고 대뜸 채근부터했다.
뭐야 이건 또....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있는 대로 대답했다.
본부장실에서 전화가 와 갑자기 오라고 해서 갔는데요.
그래도 나한테 귀띔이라도 하고 갔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비난 조의 말이었다.
..........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는 변명을 하는 일이다. 오해가 생겼을 때는 절대로 변명을 안 한다. 그냥 침묵하고 새침하게 있는 게 나의 전통적인 대응 방법이며 성격이다.
떫은 얼굴로 국장실에서 나오자 국장실 앞에 자리가 있는 부장이 나를 붙잡았다.
이번 드라마는 없던 일로 하시죠.
.....? !
내가 국장실로 붙들려 들어간 이유를 그는 알고 있는 듯 했다. 본부장하고했던 말이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
부장, 국장 절차를 무시하고 본부장실로 들락날락하는 작가하고
일을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범인한테 하는 훈계조의 퉁명스러운 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모가지를 비틀던 때처럼 그들은 항상 이렇게 싹수가 없었다.
내 성격이 드러워도 그들이 나한테 곰살곰살하게 사정을 물었더라면 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곰살곰살하게 대답을 했을 것이다.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 있었다.
옆에 있던 담당 피디가 나를 붙잡고 조용한 데로 끌고 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는 자기 일과도 관계가 있는 터여서 심각했다.
본부장실과 국장실 부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그는 놀라하며 핵심을 찔렀다.
사장님과는 무슨 관계가 있어요^^^?
사장은 모르겠고 사장 부인이 같은 대학 선배라고 친구한테 소개받고
차 한잔 같이 했어요.
그게 다요?
다예요....
사장 부인과 차 마시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두어 시간 했지만 그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털털한 성격의 부인과는 이야기가 통했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이야길 했어야죠. 얼마나 좋은 찬스입니까?
그는 뻔뻔스럽게 속내를 들어내었다.
찬스...? 무슨 찬스?
아빠 찬스...엄마 찬스? 이 말은 몇 십년 후 지금 하는 말이다.
사장 부인을 알고 있으면 그 카드를 이용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지는 내가 너무도 쑥맥 같았을 것이다.
자기들이 먼저 원고 청탁을 했으면서 나를 본부장실이나 들락이며 거래를 트는 지각없는 작가 취급을 하다니.....몹씨 불쾌하고 괘씸했지만 괘씸죄를 물을 처지는 아니었다.
가카 치하에서 두 번째로 찬물을 쳐마시는 신세가 되었다.
처음에는 가카 때문에 마셨고, 두 번 째는 사장 때문에 마신 신세였다.
요즘 2020년에서 2021년 사이에 유튜브의 댓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우리 대한민국 민족은 국난극복이 취미인 나라이다. 라는 국뽕에 취한 말이다.
이 말은 우리 스스로가 한 말이 아니라 외국에서 대한민국을 가르키며 지칭하는 말이었다. 어느 유튜버가 아주 재미있는 말솜씨로 올려 수 천 건의 댓글을 이끌어 내어 진리가 되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나라.
나는 국난극복과는 무관했다. 하지만 나 역시 위기극복에는 절대로 좌절하지 않고 이를 악무는 취미가 있었다. 글을 팔아 자식들을 부양하느라 5, 6년을 살다 보니 드라마 작가로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부터 끊임없는 습작과 다독의 결과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능이란 선천적으로 태어나지 않고 노력만으로 되기는 쉽지가 않다. 100퍼의 선천성에 100의 노력이 있어야만 성공할 수가 있다.
평소 덤벙대는 구석이 있는 것과는 달리 위기가 오면 몹시 차분해지며 자기 위치를 짚어내고 냉정하게 자가판단을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위기를 당했을 때는 우선 해결 방법을 생각한다. 내 자신이 처리 할 수 있는 문제인지 아니면 누구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사항인지를 분별한다.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면 당황하지 않고 일을 해결하지만, 할 수 없는 경우엔 우선 누구에게 부탁하나를 곰곰이 생각하는 지혜....그 정도는 갖추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방송국에서 일어난 일은 나의 잘못도 아니고 그 비슷한 억울한 일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발생 되었지만 냉소에 부치고 나는 타고난 나의 재능을 믿고 있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흔한 금 모으기에도 참가한 적이 없고 태안반도 기름띠를 닦으러 나가 해안을 하얗게 물들게 한 백의 민족 중 한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밟힌 채로 살지는 않는다...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휴게소 창문 안에서 한가하게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양지의 사람들을 보면서 반드시 여기로 다시 돌아오고야 말 것이라고 결심을 했었다.
너희들을 반드시 내 발 앞에 무릎을 꿇게 할 거야...
입술을 앙물었다.
앙문것과는 별개로 내 주변에서 일으킨 일로 재판을 강요 받는 일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런 고소장이 날라왔다. 오빠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내게 재판을 걸어두었다. 유산 청구 소송이었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는 문안 전화 한 번도 안 한 인간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도 몇 년 후에 어슬렁 어슬렁 기어 나와서는 몇 일 묵어가고 난 후였다.
집을 할부로 산 증거가 내 통장에 남아있었다.
아버지의 유산은 어머니가 다 축을 내고 가셨다. 3일에 한 번 소연, 5일에 한 번 대연..., 마치 조조가 관우를 대우하듯 교회에 몰입하기 시작하신 어머니가 전도사님과 구역식구들을 그렇게 먹이고....이름 붙은 헌금은 앞서서 내며 교회에 충성을 바치고 그 결과 권사직을 하사받으시는 것 같았다.
20세가 겨우 된 손자 녀석에게 차를 사주며 아버지한테 눌려서 못 쓰던 한을 푸시는 듯 정신없이 돈을 쓰고 있었다. 나에게도 다소의 유산권리가 있었지만 아버지가 약간 구두쇠 기질이 있으신 분이라 불평이 많았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 말은 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다른 고소가 또 하나 왔다.
첫 번 째 재판은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각이 되었을 것이다.
고소인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테니까. 오빠는 미국에 간지 얼마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왔다. 고소자가 죽으면 재판은 자연 기각이 된다.
두 번 째 고소는 하는 수 없이 말려들었다. 고소자가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 질 줄 알면서도 고소한 것은 어째서인지....이유를 생각할 틈도 없었지만 변호사를 대고는 잊어버리기로 작심했다.
어쩔 수 없이 몇 번은 재판정에 드나들었지만 결국 승소를 했다.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내게 돌아온 모멸감과 복수심은 때로 병이 되어 활활 타올랐다. 부글부글 끓어대는 속으로 어떻게 복수할까를 생각했다.
오리려 내 쪽에서 고소할까. 사회에서 생매장을 시켜버리고 말까.
승소를 하고도 나의 미움은 쌓여갔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성경에는 복수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성경의 계명을 다 잘 지키는 교인은 아니지만 사람이 하는 복수는 자기가 당한 것의 수 십 배를 더 하게 되니까 성경은 복수를 금한다는 설교가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것만이 아닌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복수 따위는 하지 않기로 하고 그냥 내 삶 만을 살기로 결심했다. 무시하기로 했다. 잊어버리기로 했다.
옛날 로마 제국 시대에는 정치를 못하고 비행을 일삼은 왕들은 역사 기록에서 지워버리는 형벌을 내렸다. 아주 기록 말살이다. 있었지만 없었던 인간으로 취급된 것이다. 아주 훌륭한 보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스의 옛 아테네는 도시국가였는데 이상한 방법으로 정치인들을 징치했다. 깨진 사기 조각에 벌을 주고 싶은 정치인의 이름을 써서 모아 제일 많이 이름이 오른 사람은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는 도편추방제도가 있었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라는 집정관은 20년간 독재를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를 완성한 정치가였다. 그의 페리클레스 연설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질리지 않는 명문이다. 헌데 그도 20년의 기나긴 선정을 하고도 이 도편추방제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었다. 왜 가게되었는지 이유까지는 쓸 자리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유배제도가 그 비슷한 제도가 아닌가 싶다. 심하면 위리안치를 시키긴 해도 죽이지는 않았다.
누군가 뭘 잘못해서 꼴 보기 싫고 엮이기도 싫으면 중이 절을 떠나듯 내가 싫은 사람의 주변에서 떠나고 내가 멀어지고 내가 피해서 사는 방법을 택했다.
그 방법은 주효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이를 갈아봐야 이빨만 상한다. 어떤 이는 그런 짓을 하다가 어금니가 다 상했다는 말을 듣고는 배를 잡고 웃었다.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찾은 것이다.
나의 글빨은 더욱 자신만만해지고 미움에서 놓여난 나는 아주 씩씪해지고,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 어머니 말처럼 “어느 구름짱에서 비가 떨어지는지 모르는 소녀 타입”의 여자가 아니라 여장부같이 되어 가고 있었다.
역시 이 방송국 저 방송국을 뛰어다니며 어린이 드라마도 썼고 남의 쓰다만 연속극을 쓰기도 하고 라디오의 연속극이며 기독교 방송극 한 달 짜리 연속극도 쓰며 대단한 활약을 했다. 차도 없이 이 방송국 저 방송국 뛰며 밤새는 날이 거의 매일 이 었다. 그 때부터 잠옷을 입고 자는 버릇이 없어졌다.
어떤 때는 A방송국 B 방송국 두 작품을 같이 쓰기도 했다.
졸면서 쓰다가 A방송국 이야기를 B방송국 이야기로 쓰기도 하는 해프닝이 일어나 혼자 쓴 웃음을 짓기도 했다. 5, 6년을 그 짓을 하고 나니 개고생에도 끝이 왔다.
연속 시추에이션 드라마를 KBS 피디가 청탁을 했다. 전화로 청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나를 만나서 정중하게 청탁을 했다. 데뷔작 “서원”을 제작할 때 조연출을 했던 분이라 얼굴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연출자로 승진이 되어 있었다.
단 작가 두 명의 작가가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내가 먼저 3개월을 쓰고 다른 작가가 3개월을 쓰기로 하는 조건이었다. 나는 두 말 않고 끄덕였다. 내가 다 쓰면 좋겠지만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 아닌가. 이 동네는 연속극을 써야만 작가로서 면이 서는 동네이다.
그때가 3월 초순이었는데 일주일 내로 시놉시스를 쓰라고 했다. 게다가 10회 분량의 매 회 스토리 까지 함께 써내라고 했다. 작품 하나를 준비하려면 보통 6개월이나 일 년 정도의 시간은 주게 되어있었다. 일주일 내로 열 개의 스토리를 쓰라고 한다.
상당히 무리한 요구였지만 악발이 같이 써냈다.
한 시간만 생각하면 스토리가 떠올랐다. 강해지고 악발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놉시스를 써서 내고 피디 회의며 여러 단계를 거쳐서 승인이 났나 보았다5월 초부터 방송을 시작한다고 방송일부터 정해져 나왔다.
이 방송국 넘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야?
속으로는 욕했지만 하라는 대로 다 수용했다. 실은 나보담은 PD와 AD, 그리고 스태프가 고생을 하는 것이지 나야 그냥 써재끼기만 하면 되었다. 그 때가 4월 초였으니 방송일 까지 딱 한 달 동안 모든 준비를 끝내야 한다.
함께한 피디도 무리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창조력은 없지만 순발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한테는 순발력과 창조력 두 개 다 있었다. 일주일 안으로 50분 짜리 단막극 한 편을 써서 주었다.
새로 손을 잡은 조연출과 못 참고 작가 앞에서 작품을 읽어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건 작가를 얏잡아 보는 실례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워낙 시간이 촉박한 이유 때문이라는 서로 간의 이유를 공유하고 있었다.
다 읽고난 두 남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꾸뻑 인사를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우스워서 무슨 짓이냐고 나무랐다. 내가 그들 보담 나이가 좀 많았기 때문이다.
"작품이 너무 좋습니다. 재미있어요...."
작가가 제일 좋아하는 독후감이다.
그 작품은 큰 제목이 있어야 했고 매 주 쓰는 단막극은 부제를 달아야 하는 형식의 드라마였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 라는 큰 제목으로 한 달간 조용히 방송히 되더니 두 달 째가 되자 소리가 나기 시작하며 마침내 빵 터지기 시작하고 스포츠 신문에 나오는 매일청률 조사서에서는 10등 안으로 진입하더니 매주 차고 올라가 드디어 1등 자리를 차지하며 마치 BT가 빌보드에 올라기라도 한 듯 내 아이들의 함성이 드높아 갔다.
그래서인지 작가 두 명이 써야 한다는 조건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끝까지 혼자 쓰는 나만의 왕국이었고 위가 나빠져서 스스로 그만둔 마지막 방송까지 나의 빌보드는 1위를 지키고 있었다.
덕분에 상을 많이 탔다. 박 리미의 깃발이 휘날리던 때는 1987년에서 1991년 노통 때까지 였다.
내가 드라마 작가로서 활기차게 일하던 때는 1980년 군사독재 초기에서 말기 시대까지 였다.
나는 국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열심히 세금을 내면서 살았다.
세금은 원천징수로 받기도 전에 먼저 떼어 갔고 나중에 세금내역을 받아 쥐었을 때는 머리가 뒤로 휘어질 정도로 엄청난 금액으로 되돌아 왔다.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군대에 가 있었는데 초코 파이 한 개를 사서 화장실에서 몰래 먹었다는 말을 들었던 때였다.
202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