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덕선 May 09. 2021

으르렁 때 여고 담임했던 썰 푼다

첫번째 직장은 부산에 있는 모 남고였다. 교생실습을 했던 곳이었고, 사립이었고, 나는 6개월짜리 기간제였다. 돈 내란 소리를 못 알아들은 25살은 계약기간 다 못 채우고 해지 통보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출근하던 날, 교무실에서도 울고 수업 끝나고 나오면서도 울고 애들한테 인사는 안했다. 잘렸다는 소리도 못하겠고, 뭐라고 해야할 지 몰라서. 돌이켜보면 4년 내내 과외+학원에서 굴렀지만 어설프기 짝이없는 수업이었다. 어설픈 수업, 어설픈 나.


그 후 두달동안 망돌덕질 해가며(ㅋㅋㅋㅋ) 미친듯이 원서를 썼다. 시도교육청을 뒤져가며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지역에 원서를 넣었다. 학교는 아직도 본인이 직접 접수해야 하는 곳이 많아서 기차를 타고 경주에 갔다. 부산과 경주는 꽤 먼 곳이었을까, 기차에서 내렸더니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을 맞으면서 첨성대 옆에 있는 여고를 찾아갔다. 조금 멀지 않은 곳에 교리김밥이 판대서 그것도 사왔다. 왠지 느낌이  좋았지만 서류탈락했다. 매일 그 짓을 하다보니 점점 피가 말라왔다. 임용 공부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지방사립대 수학교육과 졸업, 기간제 근무 3개월이 유일한 내 스펙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피말리는 한 달을 보내고, 시골의 한 여고에서 연락이 왔다. 사실 나는 닥치는대로 원서를 넣었기 때문에 - 80군데 정도 지원함 -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대충 경북이니까 부산이랑 가깝겠거니 하고 넣은게 덜컥 서류통과를 했던 것이다. 버스타고 네시간을 갔더니 길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진귀한 풍경) 선생님들은  안계셨고 교장선생님과 독대를 하며 녹차를 마셨다(?) 교장선생님은 이것저것 물으시더니 수업 잘하냐고 물었고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잘한다고 했다ㅋㅋㅋㅋ 지금 생각하니 좀 도랐음ㅋ 그렇게 수업시연 없이 기간제에 당첨됨ㅋ(나중에 알고보니 구해놓은 사람도 도망가는 일이 많은 시골이었음) (하필 그 날이 친목회에서 여행가는 날이라 아무도 안 계셨음)


첫 1년은 수업만 했고, 다음 해에 재계약을 하면서 덜컥 1학년 담임이 됐다. 아직도 교실에 들어가서 처음 만난 28개x2의 눈동자들을 잊지모태. 이건 좀 다른 얘긴데 고1 겁나 귀엽다.  고등학교의 찌든 분위기에 좀 주눅들은 병아리들 같달까ㅋㅋㅋㅋ 그 해는 으르렁이 히트를 쳤고, 전교생이 엑소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오엑스 문제 나오면 엑소엑소(떼창) 난리나는고다ㅋ 학년부장님은 그놈의 엑쓰오가 (꼭 발음을 저렇게 하심) 순진한 우리 애들 다 망쳐놨다고 역정을 내셨닼ㅋㅋㅋㅋㅋ


그 때 나는 본투비 스엠빠였으나 애들이 그러고 있는 걸 보니 정신이 번쩍 들어 엑소에 대해서는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제자와 함께하는 덕질....? 상상만 해도 끔찍함ㅋㅋㅋㅋ 그래서 최대한 자제를 하며 일코아닌 일코를 했다. 적당히 아이돌에 관심있는 1세대 빠순이마냥... 샤이니는 노래가 참 좋더라 얘덜아. 근데 너희 신화라고 아니? ㅋㅋㅋㅋ 사실 담임이 매주 목요일 엠카 챙겨보는건 비밀. 금요일 야자감독이라 뮤뱅 못봐서 슬퍼한것도 비밀. 밤샘하고 공ㅋ방ㅋㅋㅋㅋ간 건 진짜 무덤까지 가야할 비밀임.


암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비보가 닥침. 4교시 수업이 없어서 먼저 가서 급식먹고 있는데 친구들이 카톡으로 엑소 누구 탈퇴한다고 웅성웅성 난리가 남. 왠지 불길한 마음에 점심시간에 교실에 들렀더니 애들이 막 실신할 듯 울고있곸ㅋ  몆 몇은 탈수증세 보여서 양호실에 데려다주고 옴. 다시 교무실로 돌아와서 부장님께 엑소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애들이 울고 상태가 좀 안좋다고 보고고 그랬음ㅋㅋㅋㅋ 애들 우는 거 보니까 에쵸티 해체 발표하던 날이 생각났음 중학교 운동장 난간에 이불처럼 널부러져있던 언니들이ㅠㅠㅠ 그 때나 지금이나 수니마음은 같은거죠? ㅇㅇ


암튼 무거운 분위기 속 하루를 마치고 다음날 교실에 갔는데 교실바닥에 뭐가 덕지덕지.. 치우려고 봤더니 왠 아이돌 사진이....  애들은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외쳤다. 쌤 그냥 밟으세욧 밟고 지나가세여헝어헝헝헝 그러고 또 너덜거리는 오빠를 주워서 품에 안고 대성ㅋ통곡ㅋㅋㅋ 아이고 난리도 그런 난리도 없었음. 그러고 좀 진정될 때 쯤에 두번째 둘기가 하늘로 날ㅇㅏㄱㅏ눈ㄷㅔ...... 애들이 그 때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각장에 앨범을 버리는 둥 온갖 기행을 저질렀음. 결국 종례 때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너희 마음 내가 알지만 걔네가 너네 인생 살아주는거 아니다. 김동완이 그랬다. 모르면 찾아봐랔ㅋ 뭐 그랬음ㅋㅋㅋㅋ 그 때가 하필 중간고사 기간이었나 모의고사 앞이었나 암튼 시험을 앞두고 있어가지구.


세번째 둘기 때는 그나마 다소 침착한 모습이었는데 난 얘네가 탈덕을 하는지 안 하는지가 너무ㅋ 궁금한거임ㅋㅋㅋㅋ 근데 끝까지 탈덕 안하더라. 역시 첫순정은 오래간다ㅠㅠ 그녀들은 현재 20대 중후반으로 엑소의 코어팬덤이 되어 있을 듯ㅋㅋㅋㅋ 암튼 그 뒤로 부장님은 누가 울기만 하면 왜? 엑쏘가 또 뭐!!!?! 해가지고 애들이 짜증을 냈다고 한닼ㅋ


기숙사가 있던 학교라서 애들 택배가 교실로 오는 일도 가끔 있었는데 애들이 정리를 제대로 할 리가. 특히 교실 뒷쪽. 사물함 위는 늘 난장판이어서 문제 푸는 시간 주고나면 거기가서 잔소리도 하고 구경도 하고 그랬. 그 날은 책이 몆  권 널부러져 있었는데 제목도 안 적혀있고 표지도 예뻐서 무심코 집어들고 몇권 읽었다가..... 경수가 어쩌고 누가 저쩌곸ㅋㅋㅋ 책 잡고 뒤돌았더니 마주친 애들 눈에서 동공지진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게 잘 좀 숨겨놓지 그랬어. 모르는 척 넘어가줬지만 얘들아 안심해. 민셩릭진완디 공커세대 나야낰ㅋㅋㅋ 홈오에 목숨걸던 어린시절 나야나..........


돌이켜보면 힘든 일도 많았던 계약직 노비생활이었지만 발랄한 애들 덕에 몇년이나 잘 버틴 것 같다. 정말 사건사고가 없는 날이 없었는데 갱장히 다이나믹하고 재밌었음. 잘 기록해뒀으면 좋았을텐데 기억나는게 몇 개 없다. 잘 갈무리해서 이것도 언젠가는 적어야지. 이제 사회초년생일 그녀들이 열정뿜뿜하며 자유롭게 덕질하고 있길 바랍니다. 빠멘ㅋㅋ

작가의 이전글 백수가 망돌 파던 썰 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