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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Oct 26. 2023

드라마 쓰는 러너입니다. (10)

내 인생의 첫 마라톤 上


러닝을 하기 전에 ‘마라톤’에 대한 내 이미지는 이랬다.


올림픽,

아저씨 취미,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아프리카(?),

아테네,

승전보...?


고대 국가 시절, 치열했던 전쟁의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한 병사가 40km에 가까운 거리를 뛰어가 보고를 마친 뒤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는데 그 병사의 영웅적인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대회라는 마라톤의 역사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건 나와 전혀 연관이 없는 세계라는 인식이 강했다. 뛰어난 기량을 가진 어나더 레벨의 선수들만 참여하는 것이거나, 혹은 아저씨들이 하는 운동(?)이라는 기원을 알 수 없는 편견.


그 편견이 박살 난 것은 당연히 내가 러닝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러닝크루에서 활동을 해보니 크루들 간에 각종 대회 정보들이 활발히 오갔다. 그게 마치 러닝크루의 존재 이유 중 한 부분 같기도 했다.


그들은 수시로 대회 신청 일자 정보를 주고받고, 대회 준비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며, 대회 참석자들을 파악해 함께 대회 준비를 하기도 했는데 그런 모습을 1~2년 가까이 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대회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풀이니, 하프니, 섭스리, 섭330, 섭포니 하는 대회의 기본적인 용어들조차 몰랐다.


풀이 마라톤 대회의 기원인 42.195km 거리를 완주하는 풀코스를 의미하는지도(하프는 정확히 그 반절 정도인 21km를 뛰는 코스다. 초보들을 위해서 10k, 5k 코스가 마련되어 있는 대회도 꽤 있다), 그게 얼마나 걸려서 뛰어야 대충 잘 뛰는 건지, 또 기록과 상관없이 일단 완주를 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도.


나는 공명심(이게 정확한 단어가 맞나 싶어 공명심의 국어사전적 정의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공을 세워 자기의 이름을 널리 드러내려는 마음’이라고 한다. 정확한 쓰임이 맞는 것 같다.)이 생각보다 많지만 또 생각보다 없는 인간이라 러닝크루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대회 출전을 통해 공명심을 불태워볼(?)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왜 그럴까 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스스로가 나의 한계를 일찌감치 정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러닝은 취미로 하는 거야. 어차피 기록을 세울 정도로 대단히 잘 뛰지도 못할 테니까.’ 이런 마음?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마라톤 대회는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하고 멋진 기록을 세우기 위해 출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소에는 뛰기 힘든 도심이라던가 대회 측에서 준비한 특별한 코스를 뛰며 뛰는 행위 자체를 최대한으로 즐기기 위해 참가하는 측면도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러너들의 축제 같은 느낌?


마라톤 대회에 대한 편견이나 부담이 지워지자 나도 한 번 나가볼까 싶었다. 사실 더 정확히는 ‘나 빼고 놀지 마’의 심정이었다고 고백한다.


7월 즈음 우리 단톡방에서 10월에 열리는 서울 도심 마라톤, <2023 서울 달리기> 대회 신청 정보를 주고받으며 꽤 많은 인원이 속속들이 참가신청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저들이 힘든 대회를 나가는 게 아니라 ‘나만 빼고 뭔가 대단히 즐거운 걸 하러 간다...’는 불길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서 그때까지 단 한 번도 6k 이상을 뛰어 본 적 없었던 주제에 덜컥 11k 코스에 참가 신청을 해버렸다.






신청 당시 세 달 뒤 대회 날까지 거의 두 배의 거리 기록을 늘려야 한다는 심적 압박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하지만 그 부담감 때문에 신청일로부터 며칠 뒤 난 신기록인 7k를 뛰었고, 또 그로부터 며칠 뒤 10k를 뛰어 거리 기록 경신을 연달아 해냈다.


당시 나는 줄곧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커다란 장벽 하나를 무너뜨렸는데, ‘내가 장거리를 못 뛰는 것은 어쩌면 내 신체의 한계보다는 마음속 한계 때문이다’라는 깨달음 뒤 스스로 무너뜨린 ‘한계 설정’이라는 장벽이었다. (여기에 대한 소감은 '드라마 쓰는 러너입니다 (04) - 내 인생의 첫 10k’ 편에 더욱 자세히 나와 있다.)


러닝 실력을 늘리는 방법은 내 몸으로 겪어보자 생각보다 간단했다.


나는 못 할 것이다,라는 마음속 한계를 지운다. (이 부분이 사실 가장 어렵다.)

부담 없이 편안하게 뛰는 거리를 서서히 속도 경신을 해 보며 신체 능력을 향상시킨다.

평소보다 긴 거리를 속도 욕심을 내지 말고 느리게 뛰어본다. 중간에 지치더라도, 속도를 걷는 것과 진배없이 뛸지언정 걷지는 말고 뛰어서 완주한다.

그 거리에 조금 적응이 되면 속도를 천천히 향상시켜본다.


거리를 늘리고, 그 거리를 반복해서 뛰며 속도를 늘리고, 다시 거리를 늘리고, 그 거리를 반복해서 뛰며 속도를 늘리고, 이런 식으로 번갈아 내 신체를 새로운 한계에 매번 내몰고 적응시키는 것이 러닝 실력을 늘리는 방법의 전부다.


하지만 사실 말이 쉽지, 새로운 한계에 도전한다는 것은 매번 마다 새로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 있게 도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목표 달성에 실패할 수도, 자칫하면 자신의 신체 능력을 오판해 부상을 입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계를 극복하고 내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했을 때의 경이로움과 성취감은 그 모든 리스크를 감당할만한 충분한 보상이 된다. 러너들끼리는 그 경이로움과 성취감을 ‘러닝뽕’이라고 부른다. 일명,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 중 146번째 마약이다.






대망의 내 인생 첫 마라톤 전날,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집결해야 하는 대회 스케줄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밤 10시가 조금 넘자마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대회 당일 대회 세 시간 전(즉, 새벽 5시)에 미리 소화가 잘 되는 걸로 탄수화물을 적당히 채워준 뒤 출발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훨씬 긴 코스인 하프코스에 출전하는 우리 방 크루들은 아침(이 아니라 새벽) 식사 메뉴로 미리 죽 같이 부드러운 걸 준비하는 둥 치밀한 준비 태세를 보였지만 난 사실 그때쯤 한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거리 늘리기 연습을 해와 11k라는 거리가 부담감이 거의 없어진 데다, 타고나길 긴장감이 좀 떨어지는 태평한 성격 탓에 그냥 먹고 싶은 베이글에 땅콩버터를 잔뜩 발라 먹으며 탄수화물과 지방을 빵빵히 충전했다.


그리고서 ‘정확히 6시 20분까지 접선 장소에 모이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버리고 간다’는 굥언니의 살벌한 충고를 몇 번이나 떠올리며 6시에 집을 나서 따릉이를 탔다. 자전거 위에서 꽤 선뜻한 10월의 새벽 공기를 느끼며 한 생각은... ‘나 참 별 짓을 다 해보네’였다.


내 돈 6만 원을 내고 11k라는 긴 거리를 달리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꾸역꾸역 아침을 챙겨 먹고, 해가 뜨기도 전에 집을 나서다니... 이게 웬 가혹한 자기 학대인가?


하지만 그러한 자기 학대, 일명 셀프 고문을 사랑하는 이들은- 자만심 혹은 자부심을 느끼기엔 나 외에도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크루들과 접선해 집결지인 서울 광장으로 향하기 위해 지하철을 탔더니 그 신 새벽에 지하철 안이 대회 참가자들로 온통 득실득실했던 것이다. 충격도 잠시, ‘2023 SEOUL RACE’라고 새겨진 대회 기념 티를 입거나 혹은 저마다의 개성 있는 러닝복을 맵시 나게도 차려입은 들뜨거나 긴장한 얼굴의 러너들 사이에서 나는 뛰기도 전에 벌써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말 한 번 해 본 적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들 사이에서 은은히 기분 좋은 유대감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사랑하는, 그리고 그런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 같은 종류의 것.


그 느낌을 언어로 적확하게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 복잡한 설렘 속에서 서서히 깨달았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 기분을 느끼며 뛰기 위해, 마라톤 대회라는 게 있는 거구나.’


거칠게 요약하자면 사서고생러들 틈바구니에서 뛰기도 전에 러닝뽕이 단단히 차오른 그 상태에서, 우리는 마침내 도착 장소인 서울역에서 우르르 내려 한 방향으로 생기 있는 좀비 떼들처럼 행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대회장에 도착해 짐을 맡기고, 기념사진을 찍고, 스타트 라인에서 단체로 몸을 풀고 대기하며 서울시장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의 축사를 들었다.


길고 긴 축사를 듣는 시간은 솔직히 좀 지겨웠지만 어차피 날도 춥고, 첫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서 컨디션 저하로 인해 낙오하는 일만큼은 꼭 피하고 싶으니 몸을 미친 듯이 풀자 싶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몸을 풀었다.






(下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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