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엄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닉네임을 가진 방장을 만나다.
내가 오픈카톡에서 찾아낸 방은 이전의 소모임 동호회처럼 내가 사는 지역 기반의 러닝클럽(이하 편의상 런방이라고 줄여부르기로 함)이었다. 소모임 동호회(이하 편의상 런모임이라고 줄여부르기로 함)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8시 즈음에 정기런, 그 외 이따금 주말이나 공휴일에 올라오는 비정기런이 있었는데 부디 이 런방도 그 정도의 활발한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이길 기대하며 입장했다.
런모임 시절엔 운영진이 정한 룰로 인해 실명 활동이 필수였는데 이 런방은 입장하자 ‘닉네임/사는 동네/성별’로 아이디를 맞추라는 안내가 제일 먼저 떴다. 짧게 고민하다, 내가 종종 쓰곤 했던 ‘sue’라는 닉네임으로 변경했다.
아이디를 바꾸고 둘러보자 환영의 인사가 재빠르게 몇 명에게서 건네졌고 ‘오늘 벙이 있으니 시간 되시면 나오세요’라는 안내도 누군가 붙임성 좋게 건네왔다.
마침 잘 됐다 싶어 얼른 채팅방의 스케줄러를 확인해 보곤, 저녁 일정에 <참석>을 눌렀다. 참석자는 열 명에 가까운 숫자였다. ‘월요일 저녁부터 이 정도 참석 인원이면 꽤 활발한 방인 건가?‘ 일단은 시들시들 죽어가는 방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감과 기대감이 살짝 올라왔다. 한 때는 활발했던 모임이었지만 운영진의 부재로 인해 몇 달에 걸쳐 서서히 활기를 잃어가는 분위기를 바로 얼마 전까지 겪었던 게 꽤 마음이 아팠었기 때문이다. 이 런방은 일단 그 런모임보다 인원도 몇 배로 많았다.
내가 <참석> 버튼을 누른 뒤 곧바로 누군가 ‘오, sue님도 오시는군요!’하고 붙임성 있게 반가움을 표했다. 닉네임이 ‘굥’이라는 여자였는데 괴상하게 생긴 고라니 이모티콘을 적절히 활용해 대화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퍽 우수한 친화력의 보유자 같았다. 살펴보니 사는 동네도 나와 같았고, 여자인 데다, 사회성이 매우 좋아 보이니 잘 지내고 싶었다.
나는 ‘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짧지만 활기찬 인사를 건넨 뒤 그날의 저녁 러닝을 두 근 반 세 근 반 못내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급작스런 약속이 잡히는 바람에 참석 의사를 철회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며칠간 방 분위기를 살폈다. 이전 런모임에서처럼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정기런은 없었지만 수시로 1~2일에 한 번씩 러닝벙이 올라왔다. 방장 외에 아무나 덜렁 러닝벙을 개최할 수 있다는 것도 특이했다. 게다가 방 인원이 100명 가까이 될 만큼 많은데 그 인원들의 거주지가 한강 남단에 고루 걸쳐 분포하고 있는 특성상,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인 시간차 러닝벙이 올라오기도 했다. 운동장 벙 하나, 한강 남단 벙 하나, 이런 식으로.
러닝에 관한 한은 룰이 거의 없다시피 자유롭지만, 열정적인 회원들이 많아 운영진의 주도가 아니더라도 유기적으로 잘 굴러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적절한 때를 기다리다가 일주일 뒤 저녁쯤 올라온 러닝 일정에 시간이 맞아 참석의사를 밝히고 달려 나갔다. 가면서 첫 참석이다 보니 좀 긴장이 되어 이런저런 상상들을 했다.
‘처음 참석하는 거니 인사를 시키겠지? 다들 통성명을 하겠지? 그런데 다들 닉네임으로 자기소개를 하나? 방장님은 남자인데 닉네임이 밍키던데... 밍키입니다. 이렇게 인사를 할까? 설마 아니겠지? 그럼 어떤 식으로 소개를 할까...? 닉네임을 써도 실명으로 자기소개를 하려나?‘
내 성차별적 편견에 근거한 망상은 기우에 불과했다. 첫 참석, 운동장 한 편에 8명이 뺑그르르 둘러선 자리에서 태닝을 다부지게 한 매서운 눈빛의 방장은 ‘밍키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를 위시해 하나 둘 ‘굥입니다.’ ‘제이입니다.’ ‘며니입니다.’ 등 한 명도 웃지 않고 진지하게 닉네임 관등성명(?)을 하는 분위기에 나는 웃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바들바들 깨물며 떨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내 이름을 소개하는 순간에... 그만 터져버렸다. ‘ㅅ....ㅅ..ㅅ..ㅠ....입니ㄷ..(푸흑)’
이름을 대다가 결국 소개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박장대소하는 내 모습에 사람들도 웃음이 터지며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왜 웃어요?’ ‘이름도 정상적이구만 왜 그래? 왜 부끄러워해?’
대답을 못 하고 마구 웃으며 생각했다. ‘아니, 정상적(?)인 게 뭔데요? 정상 비정상의 문제가 아니잖아...!’
자기소개시간 다같이 주고받은 웃음 때문에 약간은 부드러워진 분위기에서, 마침내 첫 번째 러닝이 시작되었다.
그날 오랜만에 5km를 사람들과 함께 뛰었다. 크루 대열의 맨 앞에서는 아주 귀여운 닉네임을 가진, 그러나 매서운 눈빛의 밍키 방장이 리드를 하며 뛰고 나머지는 그 뒤에 두 줄씩 열을 맞춰 동일한 페이스로 뛰었는데 몸이 무척 가벼워 보이는 밍키 방장은 수시로 대열을 이탈하며 뒤에 뒤처지는 사람이 없는지 다른 사람들의 주법은 어떤지 점검하고, 크루들이 달리는 모습을 좌측이나 뒤에서 사진과 동영상으로 촬영하기도 했다. 그 모습이 이전에 다녔던 런모임 운영진과는 뭔가 포스(?)가 달라 보였다.
런모임 시절 운영을 맡았던 N오빠도 솔직히 개인 시간을 할애해 크루들을 이끌기 위해 무진 많은 애를 썼고, 경기도 외곽으로 발령이 난 뒤에도 남겨진 크루들을 위해 왕복 4시간을 오가며 1년 가까이 자신이 애정을 갖고 꾸린 러닝클럽의 존속을 위해 노력했다. 그 엄청난 책임감과 성실함에 내가 무수히 많은 존경심을 표한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그 조차 밍키 방장 정도로 포스(?)가 비장하진 않았다. 밍키 방장은 달리기나, 리딩에 있어 흡사 프로(?)의 냄새가 났다.
또 그런 엄격한 관리자 스타일들을 좋아하는 나는 자기는 사진을 찍기만 하고 찍히지는 못한다고 투덜거리는 방장의 작은 푸념을 귀담아 듣고, 힙쌕의 휴대폰을 얼른 꺼내 들었다.
‘그럼 제가 찍어드릴게요.’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파파라치처럼 그의 뒷모습을 무차별적으로 찍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머지 인원들도 갑자기 카메라를 꺼내들고 밍키 방장을 찍어댔다. 근엄한 얼굴의 밍키 방장은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그 상황을 즐기는 듯 보였다.
솔직히 그날 뛰기 전까지만해도 간만에 5k를 뛰는 거라, 그리고 쉬지 않고 5k를 뛴 경험이 많지는 않았던 터라 걱정이 조금 되었었다. ‘내가 3k밖에 못 뛰면 어떡하지? 페이스를 못 맞춰 민폐가 되면 어떡하지?’ 그런데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페이스가 많이 떨어져 진상이 되는 불상사도 없이, 무난하게 5k를 완주했다. 심지어 그렇게 사람들과 중간중간 수다도 떨고 장난도 치며.
가뿐하게 완주를 끝내고, 다들 땀에 절어서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고서 단체 인증샷을 신속하게 찍은 뒤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깔끔했다.
돌아가는 길에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굥님이 '00동 살죠?'하며 특유의 친화력 좋은 얼굴로 말을 붙여왔다. 자기는 거리가 애매해서 따릉이를 애용한다며 내게 함께 따릉이를 타고 갈 것을 첫 날부터 대뜸 권하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나도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던 마당에 귀가 태극기만큼 커다래져서 펄~럭! 소리가 났다. 잠깐의 고민도 도도함도 없이 (그녀가 먼저 가버릴까봐) 재빨리 제로페이를 뒤져 따릉이 30일 정기이용권을 끊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딴딴해진 허벅지로 자전거 페달을 쉴새없이 밟아 힘차게 내달리며, '이게 웬 무리인가?' 싶었지만... '힘든데 괜히 오버했네'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땀으로 젖은 몸이 상쾌한 바람을 맞으니 자전거를 타고 달로 날아가는 ET처럼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혼자였다면 그렇게까지 상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흡사 심령사진처럼 정신없이 흔들려 나온 사진들을 채팅방에 쭈루룩 올리며 ‘고생하셨습니다’하고 인사를 건넸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서로 ‘고생하셨습니다’, ‘즐거웠어요’, ‘푹 쉬세요’같은 인사말들을 건네며 서로의 채팅에 ‘하트’ ‘따봉’을 눌러댔다. 나는 모임이 끝난 뒤 아무런 뒤풀이도 없이, 깔끔하게 각자의 본거지로 흩어지는 이 러닝 부나방 같은 사람들이 첫날만에 좋아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러닝은 같이 해야 해.’
운동이 아니라,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잔뜩 떨다 돌아온 느낌이었기에 벌써 다음 모임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