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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Sep 21. 2023

드라마 쓰는 러너입니다. (08)

저질러라, 그러면 수습될 것이다!

자고로 번듯한 가정에는 가훈이 있고, 각이 잡힌 학급에는 급훈이 있는 법. 우리 반달런 크루들이 모여 있는 채팅방에도 물론 어엿한 방훈이 있다! 그것도 두 개나.


첫 번째 방훈은 우리 방 최연장자(로 예상되는) 러너 ‘노을’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참고로 노을님에 대해서 짧게 소개하자면 이 분은 우리 채팅방에 들어오신 지 꽤 오래되었고 러닝 경력도 꽤 있으신 것으로 유추가 되지만, 아직 멤버 중 누구도 만나본 적이 없어 정확한 프로파일링이 불가능한- 상상 속의  유니콘 같은 존재다. 왜냐면 아직 우리 방 오프라인 러닝 모임에 한 번도 참석을 하지 않으셨고 그 이유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젊은이들 사이에 끼면 민폐일까 봐’인데, 사실 우리 방은 같이 뛸 수 있는 자격에 나이나 거주지, 혼인 유무 등 어떠한 필터링도 없는 개방적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장담하시며 그저 젊은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뛰고 노는 걸 흐뭇하게 채팅방에서 지켜만 보고 계시는 그런 독특한 분이시다.


물론, 간간히 채팅방에서 우리와 수다는 잘 떨어주신다. 궁금한 게 있으면 불쑥불쑥 거침없는 질문도 던지시고, 본인이 경험한 것 중 조언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이것저것 자상하게 나눠주시기도 하면서.


그러다 우연히 우리 방 공식 방훈으로 등극한, 촌철살인급 가르침도 배출이 되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젊은 청춘남녀가 데이트 안 하고 달리기 주구장창 하고 있는 이유를 알겠네요.

소개팅은 그래도 좀 조용한데 가셔서 대화하는 거 아입니까?‘


예상치 못한 길이와, 예상치 못한 내용의 방훈일 것이다. 참고로 우리 방, 러닝크루 공식 채팅방 맞다. 그런데 러닝방이 아니라 무슨 연애코칭방 방훈으로나 어울릴 것 같은 이 기나긴 일침이 우리 방 방훈으로 등극한 데에는 재미난 사연이 있다.


100명에 가까운 멤버들이 모여 있는 우리 채팅방은 보통 러닝에 관한 대화가 60%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는데, 그 외 40% 정도는 자유분방한 사담이 오간다. 사담은 그야말로 주제가 없는 사사로운 이야기들이므로 그때 그때 일 관련 이야기, 점심 혹은 저녁 메뉴 공유, 생활 꿀팁 공유 등등 온갖 대화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이어지는데 가끔은 도파민이 확 도는 연애 이야기가 등장할 때도 있다. 가령, 소개팅 얘기라던가.


그날 역시 평화로웠던 어느 저녁이었다. 한 남성 회원이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며 채팅방에 소개팅 장소 추천을 요청했고, 그 요청에 응수한 회원 몇몇이 술집과 고깃집, 전집을 마구잡이로(?) 리스트업 하기 시작했다. 소개팅을 하라는 건지, 본인들이 먹고 싶은 걸 올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혼란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그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던 노을님이 참다못해 수면 위로 올라와 모두에게 광역 저격을 시전 하신 것.


‘젊은 청춘남녀가 데이트 안 하고 달리기 주구장창 하고 있는 이유를 알겠네요.’


여기서 단순히 뛰는 걸 좋아하는 뽀로로일 뿐이지만 대다수가 솔로인 우리 방 회원들의 H.P(게임 용어. A.K.A. 피통, 혹은 체력 게이지)가 반이 깎이고,


‘소개팅은 그래도 좀 조용한데 가셔서 대화하는 거 아입니까?’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노을님의 방향 제시에 연애를 글로 배운 몇몇 회원들의 척추 뼈가 아작이 났다.


이 짧지만 무시무시했던 광역 저격 이후로 우리 방은 누군가 연애초보스러운 기미를 살짝만 보여도 노을님의 훈계를 복사 후 붙여 넣기로 복기시켜 준다. 다시는 ‘청춘남녀가 소개팅에 전집 같은 소리를 하니까 밤낮으로 뜀박질이나 하고 있다’는 광역 저격에 대다수 솔로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다 보니 저 대사는 우리 방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레퍼런스(?)가 되었고, 그러다 이제는 어느새 암암리의 동의 속에 우리 방 공식 방훈이 되어버린 것.


그리고 그다음으로 소개할 것이 바로 내가 한 말 중 가장 빈번히 인용되곤 하는 우리 방 비공식 방훈,


'저질러라. 그러면 수습될 것이다'


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충동성이 강한 인간이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내가 그런 기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어떤 것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냐면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앞날에 대한 불안감은 부족한 편이고, 내 흥미를 끄는 것들에 대한 순간 몰입도는 높은 편이라 아주아주 전형적인 방학숙제 벼락치기꾼이었다.


내 머릿속에 스스로 숙제를 차근히 대비해서 체계적으로 일을 진행시켰던 기억 같은 것은 아예 없다. 늘 불안감이 극도로 커질 때까지 하고 싶은 것들만 하고 빈둥빈둥 놀다가 개학을 3일 혹은 이틀 정도 앞두고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불안감을 원동력 삼아 재빨리 숙제를 해내곤 했는데 그러면 당연히 숙제의 퀄리티는 그다지 좋을 수 없다. 심지어 정해진 양을 끝끝내 다 못 마칠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완성한 숙제에 대한 벌이 피눈물을 흘리며 깊이 후회할 만큼 호되진 않았던 걸까? 나는 딱히 반성 없이 매번 같은 짓을 반복하곤 했다. 숙제뿐 아니라 시험, 대본 마감 등 여태껏 내 인생의 To-do list 대부분이 이런 벼락치기 히스토리로 덕지덕지 뒤덮여있다.


이렇게 말하면 대책 없는 인간의 답 없는 인생 회고를 내가 왜 듣고 있어야 하나- 싶겠지만, 이 낮은 불안감으로 인한 <될 대로 돼라 식 인생>에도 큰 장점이 있다. 바로 큰 두려움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걸 마구 시도해 보며 다채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일을 수습해 내는 데는 그야말로 도가 텄으므로.


그리하여 프로 저지름러이자 프로 수습러라고 당당히 자부할 수 있는 나는, 우리 방에서 함께 뛰자며 사람들을 유인할 때 <저질러라, 그러면 수습될 것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현혹을 참 많이도 시켰다.


예를 들면, 이번 주말에 하드코어 한 산행 일정이 있어서 이틀 전인 오늘 러닝은 아무래도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는 회원에게 나는 다짜고짜 저 말을 갈긴다. "저질러라. 그러면 수습될 것이다!"


비논리적이면서도 논리적인 것 같은 저 말에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저 말을 몇 번 곱씹다 보면 갑자기 대책 없는 짓을 생각 없이 저지르는 오늘의 나는 상당히 자유롭고 멋있을 것 같고, 그런 오늘의 자유롭고 멋있기만 하고 대책이 좀 없는 나를 수습하는 내일의 나도 꽤 능력 있고 멋있을 것만 같은 희한한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복잡하게 말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 낚기에 참 좋은 멘트라는 거다.


실제로 이틀 뒤 하드코어한 산행 일정이 잡혀있었던 그 회원은 결국 그날 밤 운동장에서 나와 같이 5k를 뛰고서 이틀 뒤 토요일에 무리 없이 5시간에 걸친 계곡 트래킹을 완주했다. 그것도 나와 같이.


나의 가스라이팅(?)에 세뇌되어 대책 없이 저지르고 어떻게든 수습하기의 매력에 푹 빠진 우리 방 몇몇 회원들은, 그 뒤로 인생을 계획적이고 철두철미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보이면 일단 발목부터 잡고 본다.



하도 많이 확대재생산(?)이 되면서, 어느새 내 인장(?)이 새겨진 ‘짤’까지 탄생했다. 무차별 부추김으로 사람들 낚는데 재미가 들린 회원들의 광기로 인해 때로는 나까지 발목이 잡히기도 한다. 이제는... 도저히 러닝을 못할 핑계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ex. 몸이 안 좋다 -> 뛰고 나면 괜찮아질 수도 있다

ex. 비가 온다 -> 뛴 김에 운동화도 빨고 오히려 좋아

ex. 친구가 집에 놀러 오기로 했다 -> 친구를 데리고 나와라

ex. 한 번도 그런 장거리를 뛰어 본 경험이 없다 -> 오늘 경험해 보면 되겠네

ex. 오늘 아침에 이미 마라톤으로 10k를 뛰고 왔다 -> 밤에 또 뛰면 그야말로 리커버리(회복)런


실제로 이 기적의 논리에 낚여 도저히 무리일 것만 같던 러닝을 어떻게든 소화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러닝뿐 아니라 인생에 대한 이상한 자신감이 생긴다.


‘오... 어떻게든 다 수습은 되긴 되네?’


그러다 보면 나중엔 무겁고 낯설었던 첫 시도들이, 점차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저지르기>에 중독되어 밥 먹듯이 시도하고, 밥 먹듯이 실패하고, 그러고도 다시 일어나서 툭툭 털고 또 저지르는 경험이 몇 번 더 쌓이고 나면... 나중엔 이런 궁극적인 깨달음까지 얻을 수 있다.


‘인생은 절대 망하지 않네.’


가끔 살다 보면 인생은 ‘어떤 방식’으로 살면 반드시 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난 그런 사람들의 눈을 보면서 이렇게 또박또박 말하고 싶다. "인생은, 절대 망하지 않아요. 우리의 인생은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우리의 인생은... 숨 쉬듯이 가볍게 시도하고, 무언가를 향해서 달려가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달고 짜고 시고 매운 순간들로부터 배우고, 느끼고, 강해지는 그런 방식으로만 존재한다고 난 믿기 때문에.






우리 러닝크루 멤버들이 모두 나와 같은 생각으로 ‘저질러라, 그러면 수습될 것이다!’라고 밥 먹듯이 외치는 것은 아닐 터다. 하지만 나는 걱정쟁이와 염려꾼들이 수두룩한 이 세상에서 때로는 대책 없는 충동과 낭만을 열렬히 응원해 주는 ‘저지르기 치어리더’들이 많은 우리 방이 참 좋다.


그런 면에서 언젠가는 노을님도 ‘세대 차이’라는 마음속 벽을 허물고 <대책 없이> 한강으로 나와서 땀 흘리고 웃고 떠들며 지칠 때까지 같이 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P.S.

아 저질러보자고요 노을님! 수습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드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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