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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Oct 22. 2023

추의환향(醜衣還鄕)

금의환향(錦衣還鄕)


“나를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준 것은 나의 자존심이 아닌 동기의 작은 호의였다.”     


#안전귀가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호주로 떠났다. 그래서 남들보다는 길게 휴학을 했다. 비교적 긴 휴학을 마치고, 29살의 늦은 나이에 복학했다. 복학을 결정한 뒤 개강 시기를 1~2 달여 남기고 매일 도서관에 갔다. 오랜만에 보는 미적분과 역학을 공부하며 대학교 1학년 때와는 체력도 머리 회전도 다름을 느꼈다. 그렇게 서서히 복학 준비를 했다. 복학을 며칠 앞두고, 한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했다며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야, 우리 며칠 뒤에 다 같이 모이기로 했는데 너도 와라.”

 “당연히 가야지. 다들 보고 싶네.


 그로부터 며칠 뒤 우리는 종각역의 한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잔, 두 잔 술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추억을 곱씹었다. 누가 누구에게 고백했다 차인 사건. 술 먹고 남긴 흑역사. 시험 기간에 학교 도서관에서 밤샌 나날. 꼰대 같던 선배. 한 손엔 컵라면 한 손엔 키보드를 두드리며 PC방에서 보낸 공강 시간. 낮술을 마신 채로 참여한 강의. 남자만이 가득한 기계과에 혼자 소개팅을 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차려입고 등교한 친구를 학교 분수대에 밀어 넣었던 일. 좁은 학과 방에서 삼삼오오 새우잠을 자며 병행한 학교 행사와 시험공부. 추억은 술과 함께 무르익어 갔다. 하지만 무르익는 추억만큼이나 조금의 불편함과 불안감이 야금야금 피어올랐다. 저들에겐 이제 추억이지만 나에게는 고스란히 추억이 될 수 없었다. 직장인으로서 대학생활을 회상하는 것과 복학해서 동기들 없는 학교를 홀로 다녀야 하는 나의 회상은 그 처지가 같을 수 없었다. 입장이 다른 두 집단은 기억을 바라보는 관점이 닮을 수 없다. 다음 주에 출근 안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동기들은 어느덧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대학생은 나뿐이었다. 동기들은 자연스럽게 회사 이야기를 꺼내며 사회 초년생의 노고를 토로했다. 회사 생활, 연봉, 재테크, 세금, 주식, 부동산, 대출 등의 이야기를 했다. 어른들의 이야기라 생각했던 주제를 얘기함에 어색해하면서도 나름 사회인으로서 느낀 생각과 감정을 공유했다. 나도 호주에서 겪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 친구들의 이야기 주제와 결이 달랐기에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언젠가 취직했을 때 필요한 이야기라 생각돼 귀를 기울였다.

 역시 본인이 복무한 군부대가 제일 힘든 법인가 보다. 동기들은 갓 제대 후 만난 군인들 같이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제일 힘들다고 했다. 남자들만 있는 자리에서 과시와 허세는 필수가 아닌 자연스러운 대화의 구성 요소다. 그렇게 허세와 과장이 적당히 녹아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반 농담 반 진담이 섞인 동기들의 말속에서 사회인의 노고가 느껴졌다.

그러던 와중 어색한 공기가 나와 동기들 사이에 흐르는 듯했다. 동기들의 이야기가 무르익을수록 나는 조용해졌다.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기에 할 말이 없었다. 중간 중간 감탄과 질문을 섞어가며 추임새 넣는 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귀 기울이려 할수록 왠지 모를 공기가 나를 거부하는 듯했다. 그 공기가 마치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너는 무능해!"

"너만 못났어!"

"네가 한 행동은 시간낭비야!"     


 같은 테이블에 앉아 떠들었지만, 나 홀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몇 십 미터나 되는 긴 테이블의 반대편에 혼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긴 테이블은 한쪽은 점점 왁자지껄 해졌고, 다른 한쪽은 점점 고요해 져 갔다. 여물어가는 술자리 분위기와 달리 그 분위기가 점점 안개로 변해 내 시야를 가렸다. 점점 동기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잘 안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안듣고, 안보고 싶었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친한 동기들이 모두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친구들은 이제 직장인이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만 대학생 신분일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연락을 받고, 약속을 잡은 후에도 그 친구들과 나의 신분이 다름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신분의 경계선이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종각역으로 향하는 길에도 오랜만에 만날 반가운 얼굴에 들떠 있었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 때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 괜찮음이 익어가는 술자리는 조금씩 불편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 두 잔 잔을 기울일수록 나만 다른 신분이라는 사실이 더 날카롭게 다가왔다. 조금씩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군중 속에서 고독감은 짙어져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초라해 보였다. 호기롭게 호주로 떠나 금의환향하고 싶었던 목표가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장, 농장을 떠돌며 일한 2년이 하찮아 보였다. 도서관에서 묵묵히 공부하고, 자소서를 써가며 기업을 분석한 그 친구들의 시간이 훨씬 가치 있게 느껴졌다. 비교가 또 다른 비교를 불렀고, 이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내 안에서 반복됐다. 그럴수록 이 괴물은 점점 커졌고, 내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저마다의 삶이 있고, 우리는 이 다양성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배웠지만, 어느새 그 가르침은 교훈보다 자조 섞인 자기 위로에 불과했다. 그들의 경험 앞에서 내 경험은 ‘다른 삶’이 아닌 철저히 ‘틀린 삶’이었다.

동기들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주머니 속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애꿎은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동기들의 연봉 앞에서 주머니 속 꼬깃꼬깃한 돈 몇 장이 초라했다. 그날 집에 나서기 전 어머니께선 5만 원을 내게 쥐여 주셨다. 나는 먼저 취업한 친구들에게 얻어먹어도 된다 했지만, 어머니는 혹시나 내가 기죽을까 염려하셨다. 우려는 현실이 됐고, 그저 어머니께 죄송했다. 택시 탈 돈도 부족한 나는 먼저 술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일어나면서 내가 먹은 만큼의 돈을 내려했지만, 동기들은 그냥 가도 된다 했다.      


 “아니야. 내가 먹은건 내가 낼게. 나 돈 있어.”     


 아니. 나는 돈이 없었다. 엄마 돈이었다. 친구로서 베푼 호의였지만 알량한 내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을 텐데 혼자 호기를 부렸다. 지하철역까지 뛰었지만, 막차가 떠난 직후였다. 버스도 끊겼었다. 다행히 집과 비슷한 방향의 버스가 몇 대 남아 있었다. 버스를 타고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내렸다. 그리고 택시를 탔다. 동기의 호의 덕에 택시비가 부족하지 않았다.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나를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준 것은 나의 자존심이 아닌 동기의 작은 호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과거의 나를 질타했다. 내가 내린 선택이 후회가 되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오랜만에 볼 친구들의 얼굴에 들뜬 채로 집을 나섰지만 돌아오는 길은 정반대의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후회, 미련, 비교, 열등감만 남은 술자리였다. 나를 낮추거나 무시하는 동기는 없었다. 다들 착하고 좋은 친구다. 그저 나만의 유치한 열등감일 뿐이었다. 당시에는 그 열등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 뒤로 동기들과 만남을 피했다. 피할 수밖에 없었다. 소중한 인연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졌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 지질한 선택이 나를 지켜주었다.


 

#금의환향(錦衣還鄕)


 그 후, 동기 무리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그들은 사회인으로 나는 대학생으로 각자 위치에서 살아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학교 공학관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익숙한 이름이 게시판에 붙어있는 듯해서 자세히 살펴봤다. 기업 설명회(?)에 관한 내용이 복도 게시판에 붙어있었다. 졸업생 중 취업한 사람들이 모교로 찾아와 본인이 몸담고 있는 기업, 회사 분위기, 현장 이야기, 실무 경험, 본인의 취업 경험담, 노하우 등을 얘기해주는 일종의 멘토링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 멘토에 익숙한 동기의 이름이 있었다.


 ‘00 건설, 이00’


 반가운 마음에 그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설명회 날 그 친구와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다. 동기가 자랑스럽고 오랜만에 반가운 이와 같이 밥 먹을 생각에 설렜다. 다만 설명회 날이 다가올수록 설렘은 줄어들고, 열등감이 커졌다. 스스로 나와 그 친구를 비교했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학교로부터 연락이 와 강연을 하는 친구가 자랑스러우면서 부러웠다. 그 번듯함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금의환향이 이런 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엄청난 모험을 바탕으로 남들이 우러러보는 사회적 지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하루하루 착실함을 쌓아가고, 그 착실함의 누적을 어느 날 다른 누군가가 알아봐 주는 것. 그것이 금의환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약속을 잡은 뒤로 나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 동굴을 찾아 헤맸다. 결국, 동굴을 찾지 못한 채 기업설명회 날이 다가왔다. 동기가 ‘00 건설’의 사원으로 금의환향하는 날이었다.

신입생 시절 졸업 후 누구나 알법한 대기업에 취직해 학교를 찾는 선배들을 봤다. 누군가는 교수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누군가는 후배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기 위해. 누군가는 멘토로서. 그들은 각자의 이유로 졸업 후 학교를 찾았지만 모두 번듯한 직장인이란 공통점이 있었다. 신분 없는 사회에서 사회인으로 그리고 직장인으로 신분 상승을 하고 돌아왔다. 1학년 당시 그런 선배들이 멋있어 보였다. 동기들과는 우리도 열심히 노력해서 저렇게 되자고 약속했다. 어느덧 내 동기이자 동갑내기 친구는 그런 선배가 돼 있었다. 그 친구의 다짐은 현실이 됐고, 나의 다짐은 후회가 됐다. 그 친구의 옷은 비단이었고, 나의 옷은 추하기 그지없었다.

 강연 차 친구가 학교를 방문한 날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지만, 아르바이트 핑계를 대며 도망쳤다. 내 안의 열등감이 도망치도록 부추겼다.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찾아 헤맨 끝에 발견한 동굴이 나의 지질함을 위로해 줬다. 동굴 속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부끄러움을 마주하지 않아도 됐기에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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