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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Oct 22. 2023

미운 서른 새끼

30살이고 아직 대학생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그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이 없어 매일 사다리를 놓고 거둠을 반복하시며 살아오셨다.”          


#기쁜 연기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가 반드시 기쁜 일만은 아니다. 우리의 기쁨, 행복은 현실 앞에 얼마든지 주저앉을지 모르는 일종의 허상이다. 그날, 2년 만에 부모님과 재회하는 자리에서. 반가움에 피어난 웃음은 너무나 빠르게 흩어졌다.

 공항에 도착하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날은 내가 2년간의 호주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 한 달여의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께는 대충 언제쯤 한국에 갈 것 같다는 말씀만 드리고, 구체적인 날짜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일본에 얼마나 머물지 구체적인 계획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국에 간다면 부모님 모르게 도착해 반가움과 기쁨으로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다.

 공항을 나와 맞는 찬 공기와 익숙한 한글들이 여기저기 적혀있는 것을 보니 내가 한국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일본의 밤과 한국의 밤이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2년 만에 찾은 모국이어서 그런지 묘한 감상에 젖었다. 이내 면세점에서 산 부모님 선물과 짐을 바리바리 챙겨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내가 해외에 있는 동안 부모님은 기존의 가게를 정리하시고, 새로운 곳에 다른 가게를 차리셨다. 그래서 새로 차린 가게의 주소와 상호만 알고, 구체적인 위치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택시비가 걱정 됐지만, 조금이라도 집에 빨리 가고 싶었다. 막상 한국 땅을 밟으니 엄마 아빠가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거세졌다.

 조금은 낯선 듯 익숙한 길가가 보이기 시작했고, 부모님의 가게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멀리서 부모님이 알려주셨던 가게의 상호가 보이기 시작했다. 곧 엄마 아빠를 만날 생각에 선물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나눠 먹을 상상을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엄마 아빠가 많이 보고 싶었다.

 기사님께 이곳이 맞는 것 같다 말씀드리고, 차에서 내렸다. 손과 어깨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게 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엄마 아들 왔어!”      

 부모님은 이게 누구냐며 놀라셨고, 반가움과 기쁨을 담아 안아주셨다. 서프라이즈는 대 성공이었다. 2년 못 본 사이 조금 더 늙어 계신 엄마 아빠를 보니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엄마는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채셨는지 “엄마 아빠 많이 늙었지?”라며 얘기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늘 물어봐 주시던 질문을 건네셨다.     


“배 안 고파?”     

 그 말을 듣자마자 엄마의 배 안 고프냐는 물음을 내가 무척이나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고파. 엄마 나 배 많이 고파.”     


 집에는 보글보글 끓인 빨간 김치찌개가 있었다. 호주에 있는 동안 제일 먹고 싶었던 집밥. 김치찌개. 한국에 가면 어머니께 제일 먼저 김치찌개를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려 했는데 이미 집에는 돼지고기 가득한 김치찌개가 있었다. 집에 정확한 귀국 날짜도 알려드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김치찌개를 끓이셨는지 여쭤봤다. 어머니는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끓였다고 하셨다. 혹시 맛있는 김치찌개 냄새가 멀리까지 난다면 내가 더 빨리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요리했다고 말하셨다.

 조금 뒤 내가 사 온 양주와 함께 가족의 해후를 기념하며 자리는 무르익어 갔다.

 나는 그동안 호주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해드렸고, 오기 전 시드니에서 보고 온 동생이 잘 지내고, 있다는 말씀도 해 드렸다. 부모님은 둘 다 건강히 잘 지내서 너무 다행이라고 하셨다. 

 식사자리가 익어가면서 부모님은 그간의 힘듦을 이야기하셨다. 알고 보니 가게 장사가 잘 되지 않았고, 두 분은 조금의 생활고를 겪고 있었다. 더욱이 어머니는 장사를 지속하기 힘들 만큼 건강이 안 좋아지셨고, 아버지는 속상한 마음에 그간 매일 술을 찾으셨다. 힘든 가게 사정 때문인지 부모님 관계는 더욱 안 좋아진 것 같았다. 

 가족의 재회는 어느덧 두 분의 싸움으로 변질 돼 있었다.      


‘어떤 대화가 오가다 그렇게 됐을까? 오늘은 2년 만에 가족이 모인 날 아닌가? 분명 웃고 계셨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언성이 높아지고, 서로 상처 주는 말들이 오가는 거지?’     

 그날의 식사는 기쁜 건배로 시작해 아버지의 고성과 어머니의 눈물로 끝났다.          


#다락집     


어머니 아버지는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가게에 딸려있는 다락방에서 지내셨다. 다락방은 성인이 허리를 피고 생활할 수 없는 구조였다. 천장이 무척이나 낮아서 앉아 있거나 누워 있어야만 했다. 성인 한 명이 생활하기에도 협소한 공간이었다. 창문조차도 없었다. 

 부모님의 집은. 아니, 집이라 할 수 없는 그 다락방은 창고로 쓰면 썼지, 방으로 쓸 수는 없는 공간이었다. 그런 곳에서 환갑이 다 돼 가는 부모님이 살고 계셨다. 나는 한심하게도 그날까지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락방 구석에는 남루한 옷가지만이 켭켭이 쌓여 있었다. 그 켭켭이 쌓인 틈 속에 부모님의 그간 노고와 애환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일하다가 잠깐 쉬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하루가 끝나고, 잠을 청해야 하는 곳이었다. 옷가지 옆에는 낡은 이불과 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집이라 할 수 없는 그곳에는 당연히 욕실도 없었다. 부모님은 그동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주방에서 씻으셨다. 매일 아침 장사를 시작하기 전 주방 스토브로 물을 끓이시고, 그 물로 씻으셨다. 겨울철에는 무척이나 더 쌀쌀하셨을 터였다. 씻는 동안 벌거벗은 몸을 가릴 수 있는 커튼 따위는 당연히도 없었다.


 부모님이 지내온 다락방에는 출입구가 없었다. 그 방으로 향할 수 있는 복도, 계단 등도 없었다. 가게 천장에 붙어있는 그 다락방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다리 뿐이었다. 그 점이 무척이나 사무쳤다. 매일 장사가 끝나면 부모님은 집이 아닌 집으로. 가게  밖의 다른 공간이 아닌 가게에 딸린 한 구석 공간으로.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이 아닌 사다리를 놓고 거둠이 부모님의 출퇴근 방법이었다. 다락방은 또 어찌나 높던지. 사다리 끝 부분을 겨우 댈 수 있을 정도였다. 허리도 피지 못할 정도의 좁은 공간 주제에 왜 이리 높이 달려있는 것인지.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그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이 없어 매일 사다리를 놓고 거둠을 반복하시며 살아오셨다. 천장에 달려있는 그 공간이 참으로 야속했다. 무엇보다 가게 한쪽에 기대어 있는 사다리가 참으로 초라하고, 슬퍼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는 오죽하셨을까.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들이 반가우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야 했음이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그 속상함을 헤아릴 수 없겠지만 그날 어머니의 표정과 말투에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담겨 있었다. 자식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인 부모의 마음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어머니는 울먹이며 말씀하셨다. 


 “엄마가 미안해. 아들 왔는데 마땅히 잘 곳도 없어서.”

 ‘아니야 엄마. 내가 쓸데없이 호주를 다녀오지 않고, 한국에서 열심히 학교를 잘 마쳤다면, 취업 준비를 했었다면. 그래서 작은 회사라도 얼른 취업을 했더라면. 그랬다면 평수 넓은 아파트는 힘들더라도 엄마 아빠가 그나마 사람답게 지낼 수 있는 원룸 정도는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적어도 나 혼자 앞가림은 했을 텐데. 다 나 때문이야 엄마. 미안해.’


 어머니의 사과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죄송하고, 스스로가 너무 못난 놈으로 느껴졌다. 참으로 면목이 없었다.

 며칠간은 나도 가게 한쪽에 있는 방에 문을 설치해 지냈다. 얼마 안 되어 부모님은 친척 몇몇 분으로부터 돈을 빌리셨다. 그 돈으로 방 한 칸 딸린 월세 집으로 이사했다. 몇 달 뒤 부모님은 가게를 접으셨고, 아버지는 인력사무소로 새벽마다 출근하셨다.


#귀한 손가락아픈 손가락     


 부모님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동생이었다. 동생은 제대 후 23살의 어린 나이에 호주로 향했다. 동생은 자신의 전공인 요리를 무기 삼아 시드니에서 잘 적응해 나갔다. 호주에 오기 전부터 영주권을 목표로 철저히 준비했다. 호주에 온 뒤에도 착실하게 하루를 살아갔다. 그렇게 내실을 다져가며 동생은 스폰서십 비자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스폰서십 비자를 받는다고 반드시 영주권을 따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유리해진다). 그리고 동생은 몇 년 뒤 영주권을 받았다.

 영화감독이라는 근거가 없는 신념을 앞세운 나와 달리 영주권과 요리사라는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목표를 세운 동생이었다. 주방에서 땀 흘리며 목표한 바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고, 자랑스러우셨을까? 어머니는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몰랐던 어린것이 저렇게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늘 말씀하셨다.

 당시 동생의 연봉은 5만 불이 넘었다. 몇 달 뒤에는 6만 불이 돼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동생의 연봉은 매번 높아져 갔다. 액수가 얼마 이상이 되고 나서는 못 들은 척했다. 동생은 시드니에서 만난 한국인 여자친구와도 행복하게 지냈다. 자신의 능력으로 구한 집도 있었다. 동생은 도요타 캠리를 몰았다. 동생은 나보다 5살이나 어렸다. 동생은 어머니의 유일한 자랑이자, 귀한 손가락이었다.


 동생이 약 한 달간의 휴가를 받고 한국에 온 때였다. 여자친구도 함께였다. 일가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동생은 여자친구를 소개했다. 동생의 여자친구는 싹싹하고, 인사성도 밝았다. 어른들이 모두 예뻐했다. 가족 친지들이 몇 년 만에 재회하는 자리에 동생과 동생의 여자친구는 화목함을 더 해 주었다.

 다행히도 졸업, 취업, 결혼 등을 비롯한 숙제검사를 하시려는 어른들은 없었다. 동생과 나의 비교가 오가거나 하지 않았다. 그날 모인 어른들 중 누구도 알림장 검사를 하며 누가 더 성실한 청년이고, 누가 더 모범생인지를 따지지 않으셨다. 그저 숙제를 성실하게 수행한 청년과 그렇지 못한 낙제생이 공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만 보는 내 콤플렉스가 꿈틀 대며 나를 괴롭힐 뿐이었다. 오히려 더 밝게 행동하려 애씀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식사가 끝나고 친척 어르신들은 먼저 일어나셨다.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동생과 동생 여자친구에게 따뜻한 인사말들을 건네고 가셨다. 그리고 호주에서 잘 적응해 사는 동생의 모습을 대견스러워하셨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막내아들이 홀로 호주에서 버텼을 나날이 안쓰러우셨는지 애틋한 시선으로 동생과 동생 여자친구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또한 안쓰러우면서도 자랑스러운 눈빛이 동생에게 향해 있었다. 동생은 두 분의 유일한 자랑이었다.

 이내 곧 동생과 동생 여자친구가 일어났고,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00아 또 와~”     


 어머니는 동생 여자친구를 꼭 안아주며 또 보자는 말을 건네셨다. 어머니는 정말 행복하다는 듯이 웃으셨다. 그리고 행복함이 눈까지 번져 조금은 어려 있었다. 그 기쁨이 충만한 웃음은 단순히 배웅 인사를 건넬 때만이 아니었다. 식사 시간 내내 뿌듯하고, 행복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사랑하는 아들을 몇 년 만에 보는 자린데 어찌 반가움, 행복, 웃음이 멈출 수 있을까?


 ‘내가 귀국한 날도 엄마 아빠가 분명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왜 그때 우리 웃음은 지속되지 않았지? 나 때문이 구나. 내가 30이 다 되도록 취업은커녕 대학교나 다녀야 하는 신세여서 그랬구나. 안 그래도 막막한데, 지 앞가림도 못하는 아들놈이 덜컥 나타났으니 얼마나 숨이 막히셨을까. 나만 아니었다면 그날 부모님이 싸우시는 일도 없었을 텐데. 모든 게 나 때문이었구나.’


 며칠 뒤 동생은 여자친구와 함께 국내 여행을 떠났다. 차를 하나 렌트해 전국 곳곳을 돌았다. 각지에 있는 양가 친척 어르신들께 인사도 드리고, 그간 먹고 싶었던 한국 음식을 실컷 먹었다. 부러웠다. 여자친구와 여행을 다니는 것보다 집안 어른들께 인사드리는 모습이 더 부러웠다. 동생은 나보다 더 어른이 돼 있었다. 대학생인 나는 다음 주에 있을 시험공부를 했다.

 어느 집에나 하나씩은 있다는 천덕꾸러기, 말썽쟁이, 철없는 놈, 사고뭉치, 돈 잡아먹는 귀신, 웬수, 백수, 꼴 보기 싫은 놈, 문제아, 미운 오리새끼.

 나는 우리 집의 유일한 아픈 손가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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