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d 강상원 Oct 22. 2023

서른의 혐오

성공 역학(力學)

     

“월 5만 원의 일조(日照)권을 지불하지 못했던 0.7 평의 공간에는 낮과 밤이 없었다.”


#3살 어린 대기업 N 년 차 대리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학번 후배가 강연 차 학교를 찾는 날이었다. 그녀는 학교 다니는 동안 우등생으로 워낙 유명했는지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그 후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수님들께선 그 선배에게(나한테는 후배지만) 배울 점이 많을 거라는 말과 함께 설명회 참여를 독려하셨다.
  나에게 피와 살이 될 만한 이야기가 오갈 거로 생각했다. 당연히 그 강연에 참석해야 했지만 창피함과 두려움이 일었다. 내가 강연자보다 선배라는 것이 창피했고, 그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웠다. 여태 대학도 졸업 못 한 나는 단상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대기업 N연차인 그 후배는 단상 위에서 나를 내려다볼 것을 생각하니 괴로웠다. 30살에 아직도 대학을 다니는 주제에 체면은 차리고 싶었나 보다. 머리는 그 강연에 참석하라 했지만, 심장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내 안의 하찮은 열등감이 나를 말렸다. 결국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도피했다. 여전히 나는 자존심을 앞세우는 멍청이였다.     

 그 후 설명회에 참석한 다른 후배와 교수님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취직하기 위해 한 노력과 취직 후에도 끊임없이 땀 흘린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그녀는 휴학 한 번 없이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대기업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그리고 입사 이후에도 회사에서 승승장구했다. 내가 쓸데없이 휴학을 하고, 호주를 다녀오는 등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동안 그녀는 성실하게 숙제를 해 나갔다. 그녀의 알림장에는 ‘참 잘했어요’가 무수히 그리고 진하게 찍혀 있었다.     

 ‘하루빨리 졸업하고, 취업한다며? 그래서 최소한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놈이 무슨 모양새나 따지고 앉아 있냐. 한심하게.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 황금 알일지도 모르는 정보를 그냥 못 본채 하는 게 더 한심한 거 아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체면 차릴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금의환향이 부러웠지만, 질투는 내려놓고,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강연에 참여한 다른 학우에게 부탁해 강연 내용이 정리된 파일을 건네받았다.

 고시원 방에서 파일을 열었다. 집중하기 위해 이어폰을 꽂은 뒤 한쪽에는 종이와 펜을 놓고, 필기할 준비를 했다. 강연을 들수록 그녀(강연자)의 이야기는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생각에 공감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노력하고, 실천해 내고, 성취해 낸 그 후배를 멋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나와 달랐다. 어른이었다. 

 집중하며 강연 내용을 살펴보던 중 약간의 부아가 나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수치심과 분노가 조금씩 격양되기 시작했다. 울컥 한 마음에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봤다.     

‘휴학 = 시간낭비’


#성공 역학(力學)     


 '휴학 = 시간낭비일까? 휴학하고, 영어 공부를 한다는 둥,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쌓는다는 둥,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둥, 워홀을 다녀온다는 둥,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본다는 둥, 책을 엄청 읽는다는 둥. 다 헛소리 일까? 1학년 때 졸업한 선배가 그랬는데. 학교 다니는 동안 휴학하고 그렇게 하는 친구 한 명도 못 봤다고. 휴학하면 대부분 맨날 술만 마신다고. 그러고 보니 나도 한심하게 술만 마신 것 같네. 휴학하기 전에는 무슨 엄청난 계획이나 포부가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막상 아무것도 없었네. 나는 그냥 백수였구나. 휴학을 할 거면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성실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 했었어. 학점을 꽉 채워서 수강하는 것보다 더 한주가 꽉 차 있어야 했어. 휴학은 배움을 쉬는 것이 아니었던 거야. 전공 공부를 쉬는 만큼 다른 공부를 채웠어야지! 내가 휴학하는 그 순간이 바로 뒤처지는 순간이었어. 휴학은 그냥 시간낭비였어. 내가 휴학하고 해보고 싶었던 것들? 학교 다니면서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지 몰라. 방학도 충분히 긴 시간인데 나는 왜 더 낭비할 시간을 찾았지? 이미 대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굳이 휴학을 하지 않을 거야. 내 주변 학점 좋고, 지금 대기업 다니는 선배, 동기, 후배 전부 휴학 안 했잖아. 배운 거 까먹으면 안 되니까. 걔네들은 성실하게 대학생활을 했으니까. 착실하게 전공 공부를 했으니까. 나만 잘 못 선택한 거였어. 내 선택만 멍청했어. 나의 휴학은 학점관리도 제대로 못한 놈이 별로 까먹을 것도 없는 주제에 도망치고 싶어서 하는 선택이었어. 내 인생만 망치면 되는데 부모님까지 괴롭게 했어. 나 진짜 나쁜 아들이다. 분하고, 내가 너무 못난 놈처럼 느껴진다.'


 ‘나도 동기들처럼, 강연 온 저 후배처럼 대기업 다니고 싶다. 삼성, 현대, SK, LG, 한전, 한수, 두산, GS, POSCO 등등 가고 싶다. 대기업 사원증 목에 걸면 부모님을 뵐 면목이 생길까? 그 면목이란 것 참 어려운 거구나. 30살 대학생은 고개 들기가 참 힘든 거구나.’     

 호주에서 보낸 내 2년간의 삶이 하찮아 보였다.     

 ‘역시, 강연에 참석 안 하길 잘했어.’     

 나는 조용히 이어폰을 뺐다. 어느덧 정보를 적어가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이 무거웠고, 모멸감이 울컥 차올랐다. 분노를 내뱉고 싶은 마음과 내뱉고 나면 더 초라해질 것 같은 이성적 사고가 충돌했다.     

 ‘휴학=게으름 또는 시간낭비 인가?’


 F=ma. 학과 4년 내내 배우는 여러 기계공식의 근간이 되는 공식. 기계공학은 역학(力學). 즉, 물리적인 힘이 어떻게 적용 또는 응용되는지를 배우는 학문이다(물론 이보다는 더 복잡하다). 수강하는 강의가 무엇이든 종종 뉴턴 제2법칙을 마주할 때면 뉴턴의 천재성에 항상 탄복(탄식할 탄:歎, 옷 복: 服, 매우 감탄하여 마음으로 따르다)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휴학=시간낭비’라는 공식에 탄복(꺼릴 탄: 憚, 옷 복: 服, 두려워하 여복종하다.)했다. 30살에 대학생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는 이유. 오늘의 내가 실패자가 된 이유. 그 공식이 내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나의 현실이 한심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 주는 공식에 복종해야만 했다. 복종과 경배의 의미로 고시원 방 한편에 ‘휴학=시간낭비’, ‘나=못난 아들’이라고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 두었다.

이전 02화 미운 서른 새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