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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May 20. 2021

오르골 무용수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용수가 있었다.


기다란 팔과 조각 같은 쇄골 라인, 매끈하게 뻗은 다리를 가진 환상적인 신체 비율, 사람들 모두 한 번씩 돌아보게 되는 놀라운 미모,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인 테크닉, 하늘을 뚫고 올라갈듯한 근육의 탄성, 여자 무용수를 부드럽게 다루는 능숙한 파트너링, 무대를 장악하는 아우라까지.     


그의 무대를 본 관객들은 ‘세계 최초, 최고의 무용수!’, ‘천사가 내려와 춤을 춘다.’, ‘그의 춤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등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공연은 언제나 매진이 되었고, 암표가 거래될 정도로 사람들은 열광했다. 단 한 번의 동작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그를 보고 ‘예술을 하는 무용수가 아닌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기계 같다.’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소수집단이 있었으나 그에 대한 여론을 뒤집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사실 그에게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그의 넓은 두 날갯죽지 사이에는 조그마한 ‘태엽’이 숨겨져 있었다.

태엽에는 놀라운 능력이 담겨있었다.

춤을 추기 전, 머릿속으로 자신이 추게 될 한 치의 오류도 없는 춤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태엽을 감으면 태엽이 풀리면서 상상했던 대로 춤을 추게 되는 능력이었다.

그는 매번 춤을 추기 전에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 태엽을 감았다. 교과서에 실릴법한 완벽한 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이것이 그가 세계 최고의 무용수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는 태엽에 관한 사실이 세상에 밝혀질까 두려워 반드시 대기실을 혼자 사용하며 상체를 드러내는 작품을 할 때는 문신을 가린다고 말하고 테이프로 등을 칭칭 감았다. (태엽은 등 안쪽으로 살짝 집어넣을 수 있었다.) 매체와 인터뷰를 할 때는 혹시나 태엽에 대해 실수로 언급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그는 매일 노심초사하며 몰래 태엽을 감았고 다행히 태엽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별 탈 없이 공연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김없이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공연은 많은 관객들이 오랫동안 기대하던 아주 큰 공연이었다. 그의 춤을 보기 위해서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온 사람도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 이미 로비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공연 시작 30분 전이 되었다. 그는 대기실의 문이 확실히 잠겼는지 몇 번이고 확인한 후 겉옷을 벗고 태엽을 감을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태엽이 감기지 않았다. 태엽 안 쪽에 무언가 걸려있는 것처럼 아무리 힘을 써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크게 당황했다. 이런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침착하게 태엽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태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태엽과 씨름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다. 관객들이 입장하고 10분 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며 태엽을 감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무대 스태프가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공연 시작 5분 전입니다. 이제 대기하셔야 합니다.”     


“제가 아직 준비가 덜 서 그러는데 공연 10분만 늦춰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준비되시면 무대로 와주세요.”     


그는 이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태엽은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원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부탁했던 10분도 이미 지나가고 객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우스매니저는 연거푸 안내 방송으로 사과를 했다. 그는 결국 태엽을 감지 못하고 무대로 향했다. 무대로 걸어가는 그의 온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용수로 데뷔한 이후로 단 한 번도 태엽을 감지 않고 춤을 춘 적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공연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객석에서 잔뜩 기대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실망을 줄 수는 없었다.     


조명이 꺼졌다. 그는 아직 막이 오르지 않은 무대의 중앙에 섰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심장이 요동쳤다. 앞으로 1분 후면 춤을 춰야 했다. 태엽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태엽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 춤을 춘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음악은 계속 흘러갔다. 무대 옆에서 신호를 보내는 무대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막이 올랐다. 그를 향해 조명이 비쳤다. 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오직 자신만을 쳐다보는 수만 개의 눈들, 시야를 가리는 조명, 바닥에 깔린 스모그의 냄새, 몸을 짓누르는 객석의 압박감. 태엽을 감고 그 힘에 몸을 맡겨 춤을 췄을 때는 느껴볼 수 없던 무대 공포였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춤추기 시작했어야 할 음악의 타이밍을 놓쳤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는 그를 보고 관객들은 이것 또한 퍼포먼스의 일부라 생각하고 큰 박수를 퍼부었다. 박수 조차도 그에겐 귀를 찢어내는 소음처럼 들렸다. 무대 스태프들은 당황해 백스테이지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무대 감독이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귀를 막아버렸다. 무엇을 춰야 하는 건지, 어떻게 춤을 추는 건지 전부 기억하지 못했다. 이 끔찍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도망쳤다.

음악이 흐르고 있는 무대에서, 관객들을 뒤로한 채로 무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화려한 인생에 금이 가버렸다.

태엽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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