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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May 31. 2021

굴레를 벗어나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는 그녀와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따뜻한 햇살이 그들을 비추는 봄이었다. 아이들은 헤어짐이 많이 아쉬운지 그에게 앞다투어 다가와 포옹을 했다. 그는 울먹이는 아이들에게 반드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아이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가득 담은 미소를 보냈다.     


“다시 무대에서 춤추는 날에 알려주세요. 아이들이랑 다 같이 보러 갈게요. 그리고 이거.... 제가 녹음한 음악이에요.”     


그녀는 작은 상자를 건넸다. 상자 안에는 음표 모양의 USB가 달린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그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는 USB를 목에 걸었다. 그녀의 온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침내 무용단으로 돌아갔다. 무용단 동료들과 스텝들은 크게 환영했지만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무리도 있었다. 이런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에게는 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루 종일 무용단에서 연습을 하고, 몸을 만들며 다가올 복귀 무대를 준비해 갔다.     


어느 날, 단장이 땀을 흘리며 춤을 추고 있던 그를 불렀다. 단장의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단장 옆에는 전에 만났던 노인이 앉아있었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굳은 그에게 노인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단장은 노인을 소개했다.     


“인사해. 이번 너의 복귀 공연 안무를 맡아주실 안무가님이셔. 안무가님, 아까 말씀드렸던 저희 무용단 수석 무용수입니다. 슬럼프를 이겨내고 멋지게 돌아왔다는 주제로 좋은 작품 부탁드립니다.”     


“만나서 반갑군요. 우리 같이 즐겁게 작업해봅시다.”     


노인이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얼떨결에 악수를 받으며 이게 무슨 일이냐고, 왜 여기 계시는 거냐고 눈으로 물었다. 노인은 재밌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이어서 그의 귀에 대고 단장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그곳은 잘 다녀왔나?”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은 단장과 함께 사무실에서 나갔다. 그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노인과 그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노인의 안무는 놀라웠다. 음악을 밀고 당기는 순간에 걸맞은 움직임과 그의 장점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동작을 만들어냈다. 슬럼프에 빠져 고뇌하는 무용수의 처절한 몸부림을,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웅크리는 기다림의 시간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그는 노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몸으로 이해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연습은 쉽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태엽의 힘으로 춤을 추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춤추는 와중에 종종 실수가 나오고, 전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동작을 구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행복했다. 비 오듯이 흐르는 땀방울이 소중했다. 격한 움직임으로 벅차 올라 거친 숨을 몰아쉬는 지금이 그에겐 짜릿했다. 세세하게 움직이는 근육이 느껴지고, 쿵쾅거리며 피를 내뿜는 심장 소리가 전신을 맴돌았다. 춤을 춘다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리허설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무용단에서 그의 복귀 무대 날짜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표를 예매했고 순식간에 매진이 되었다. 모든 매스컴이 그의 복귀에 초점을 맞췄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리허설을 마친 그에게 노인이 말을 걸었다.     


“귀여운 목걸이구먼.”     


그가 부끄러워했다.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예술을 풍부하게 하는 데에 사랑의 힘이 크지. 안 그런가?”     


“그런 것 같습니다.”     


목걸이를 바라보며 그가 대답했다.     


“곧 공연인데 기분이 어떤가?”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 기분이 드네요. 오랜만에 서는 무대라.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서는 무대일 수도 있죠.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하고, 살짝 걱정도 됩니다. 그래도 제 춤을 원 없이 추고 내려오고 싶어요.”     


스튜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동료 무용수들이 숨을 헐떡이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그는 말을 이었다.     


“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곰곰이 생각했어요. 이 목걸이를 선물해준 그녀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춤을 추기 시작했냐고, 태엽이 없을 때에도 춤을 추었냐고요. 그때 전 대답할 수 없었어요. 기억이 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태엽이 제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나. 그때의 눈빛과 지금은 확실히 다르네. 같이 리허설을 해봐서 알 수 있지. 자네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물론 실수가 나올 수도 있고,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못한 무대를 할 수도 있다네. 실수 좀 하면 어떤가? 우리에게는 다음 무대가 있지 않는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어. 예술에 완벽은 없다는 거야. 예술은 수학처럼 정답이 없네. 누군가에게는 감동적인 예술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어. 완벽한 예술은 없지만 완벽한 예술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 결국 우리 예술가가 해야 하는 일이지.”


그는 아무 말 없이 연습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혼들이 모여 춤추는 곳’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만난 인연들을 생각했다. 노인과 마을 촌장, 작가, 화가와 사랑하는 그녀. 그들이 그에게 준 깨달음들.


“다시 묻겠네. 자네에게 태엽은 무슨 의미인가?”     


노인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명이 꺼졌다. 그는 아직 막이 오르지 않은 무대의 센터에 섰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앞으로 1분 후면 춤을 출 것이다.     


막이 올랐다. 그를 향해 조명이 비쳤다.     


춤을 즐겼다. 음악에 몸을 맡기고 날아올랐다.

그 자신의 춤을 위해 몸을 움직였다.

행복했다. 간절했던 무대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객석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그녀에게 사랑을 표현했다.     


그때, 그는 영혼을 보았다.

푸른빛이 감싸고 있는 영혼은 그와 함께 춤을 추었다.

그들은 호흡을 맞추며 아름다운 듀엣을 하였다.

그는 알았다.

‘영혼들이 모여 춤추는 곳’은 그의 진심을 담은 무대였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영혼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영혼은 가슴을 통해 등을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태엽이 깨졌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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