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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Oct 21. 2021

마지막 조각(2)


그렇게 그는 고아원에서 머물며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와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이 활동하는 낮에는 그녀를 도왔다. 낯설어하던 아이들도 어느새 그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일은 쉽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생각과 행동에 그도 함께 맑아지는 것 같았다. 밤이 되면 그녀의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춤에 대해서 깊은 사색을 하였다. 그녀는 연주를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물론 여전히 태엽 없이 춤을 추는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시간이 쌓이고, 쌓일 때마다 자신 안쪽에서 오묘한 꿈틀거림을 느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꿈틀거림은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웠다.          


“춤에 대해서 아는 건 없지만 그래도 제가 봤을 땐, 당신은 춤을 너무 어렵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이제 춤을 출거야’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하는 행동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때요? 그냥 걷는 것도 ‘음악의 리듬에 맞춰 걷는다’라고 생각하고 움직여보는 거예요. 작은 움직임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거죠. 아무리 태엽의 힘으로 지금까지 춤을 춰왔다고 해도 당신의 몸은 그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을게 분명해요. 춤을 출수 없다고 단정 짓지 말아요. 몸치인 저도 춤을 추는 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틀고 그의 앞에서 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듯 머뭇거렸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음악에 몸을 맡겼다. 어설픈 동작이었지만 즐거워 보였다.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손을 당겨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도록 하였다. 춤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경직되었다. 춤을 출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 갑작스레 가까워진 그녀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알 수없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깊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는 어딘가에 홀린 듯 그녀의 리드에 따라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춤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움직임이었지만 그에게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천천히, 부드럽게 몸을 움직였다. 풋풋한 그들의 왈츠는 음악이 멈출 때까지 이어졌다. 음악이 꺼졌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채로 방금까지 추었던 춤이 자꾸만 생각나 얼굴을 붉혔다. 밤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음악이 사라진 공간을 채웠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그녀였다.     


“봐요. 춤, 출 수 있죠? 그냥 하면 되는 거예요. 당신은 춤을 추고 싶잖아요. 하고 싶은 마음대로 가는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며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았다. 발그스레 상기된 표정의 그녀에게 그는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피아노는 언제부터 배웠나요? 연주하시는 걸 보면 정말 놀라운데요.”     


“그런가요? 칭찬해주시니 기분 좋네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실력은 아니에요. 피아노를 시작한 건 단순히 음악이 좋아서였어요. 피아노 앞에 앉아 손을 올리고, 건반과 손가락이 맞닿을 때마다 울리는 음들을 들으면 좋았어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죠. 하지만 역시 만만치 않더라고요.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아서 이 길이 아니구나,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렇게 시작한 고아원 일이 저에게 딱 맞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아이들을 보살피고, 음악을 가르치는 게 정말 행복해요. 고되긴 해도 아이들이 해맑게 웃어줄 때마다 보람차요.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을 이루지 못했지만 인생의 정답이 꼭 그것만이 아니잖아요.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그게 바로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요?”     


말을 마친 그녀가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요? 어쩌다가 춤을 추게 되었어요? 태엽이 생기기 전에도 춤을 추었나요?”     


그녀의 질문에 그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태엽이 없었던 시절의 그는 분명히 있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흐릿한 안갯속에서 헤매는 듯한 짧은 장면, 장면만이 뇌리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음....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태엽 없이도 춤을 췄던 때가 있긴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봐도 그때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네요.”


그가 시무룩한 모습을 보이자 그녀가 위로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곧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그 기억이 당신이 태엽 없이도 춤을 출 수 있게 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겠어요. 마음을 편히 가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를 향한 믿음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다시 피아노로 몸을 돌려 앉아 음악을 연주했다. 따뜻한 선율이 오두막을 벗어나 숲으로 퍼졌다. 그는 머릿속을 가득 헤집는 춤에 대한 고민과 그녀 곁에 있을 때마다 느껴지는 마음속의 울림에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이제 그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눈이 소복하게 쌓여 온 세상이 하얘진 어느 날이었다. 그와 그녀는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가 맡아서 가르치는 한 아이가 뜬금없이 그의 귀에 귓속말을 하였다.          


“아무래도 선생님이 아저씨한테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뭐라고?”          


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이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기 보세요. 선생님이 자꾸 아저씨만 쳐다보잖아요. 아저씨가 처음 왔을 때부터 그랬어요. 아저씨가 오고 나서 선생님은 하루 종일 행복해 보여요. 제가 책에서 읽었어요. 자꾸만 보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사랑에 빠진 거래요.”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뭐라고 대꾸할 수 없었다. 아이는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신나서 소리쳤다.       


“아저씨도 그렇구나! 얼굴 빨개졌대요!”          


조용하던 공부방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자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이의 입을 막느라 애를 먹었다. 그녀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아이의 말을 듣고 나서 그는 그녀를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의 마음 한 구석에 특별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사랑’.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 걸까. 그녀에게 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춤을 연습해야 하는 것도 급했고, 사사로운 감정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실 그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혹시나 거절한다면, 그에게 베푼 친절을 그저 착각한 것이라면.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고, 그의 마음도 계속 불어났다. 어느새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찾아왔다. 개인적인 일로 잠시 떠났다던 다른 선생에게서 곧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그와 그녀가 단 둘이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날도 어느 때처럼 춤을 연습하기 위해 숲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평상시보다 더한 긴장감이 흘렀다.          


“오늘은 꼭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더 정성 들여 연주할게요.”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네. 저도 더 즐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는 그녀를 기다렸다.          


“당신의 춤을 다시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당신이란 사람의 이야기, 진심이 담긴 무대가 보고 싶어서. 그리고.... 그리고 앞으로 춰나갈 당신의 춤에 제 흔적이 남아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도와주겠다고 한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연주를 시작했다. 음악은 감미로웠다. 그녀의 손 끝에서 펼쳐지는 음악은 마치 마법 같았다. 강하고도 부드럽게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는 음악 안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춤을 위해서 연주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때였다. 그는 춤을 추고 싶었다. 오직 그녀를 위해서, 사랑하는 그녀를 위한 춤을 추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그녀의 음악에 몸을 던졌다.          


그는 춤을 추었다.

태엽의 힘으로 추는 것이 아닌 자신의 춤을.

그녀에게 바치는 사랑을 표현하였다.          


음악이 멈췄다. 그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춤을 멈췄다. 시간 또한 멈춘 것 같았다. 이 세상에 그와 그녀만 남겨진 것 같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해냈어요! 당신이 춤을 췄어요!”          


누구보다 기뻐하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미안해요. 너무 기뻐서 그만....”          


그들의 눈빛은 서로를 향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입술을 포갰다.

그는 뜨겁게 반응했다.

달빛 아래 그들의 그림자가 한참 동안 겹쳐있었다.          


그의 태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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