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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May 30. 2021

마지막 조각(1)


화가의 오두막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영혼들이 모여 춤추는 곳’을 찾는 여행을 계속 해갈 것인지, 아니면 태엽 없이 춤을 추는 연습을 시작해야 할지 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고민되는 것은, 태엽을 감지 않고 어떻게 춤을 추느냐는 것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춤을 춰보려는 시도를 했다. 역시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괴로워하는 와중 설상가상으로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앞이 가려 안 보일 정도로 내리는 비에 커다란 나무 밑으로 몸을 피했다. 가지고 있는 옷 전부로 몸을 꽁꽁 싸맸지만 파고드는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 덜덜 떨며 무릎을 껴안고 웅크렸다. 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천둥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들려왔다. 눈앞이 흐릿해져 갔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정신을 잃고 축축한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 아저씨, 많이 아팠나 봐. 땀 흘리는 거 봐봐.”     


“근데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어? TV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에이, 그런 유명한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야, 작게 말해! 우리 여기 있는 거 들키면 혼나.”     


어렴풋이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기분 좋은 햇살이 느껴졌다. 그는 푹신한 침대에 눕혀있었다. 옷도 보송보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옹기종기 모여 그를 구경하던 어린아이들은 깜짝 놀라 방에서 뛰쳐나갔다.     


“너희들 맘대로 거기 들어가지 말랬지!”     


귀여운 앞치마를 두른 아담한 체구의 젊은 여자가 도망가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으려다가 기운을 차린 그의 모습을 보고 기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에게 살가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일어나셨네요. 하루를 꼬박 주무셨어요. 그저께 밤에 숲에서 쓰러져 계셔서 급하게 이곳으로 옮겼어요.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내셨나 봐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이 어디죠?”     


그가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피며 말했다.     


“아, 제가 운영하는 작은 고아원이에요. 방금 아이들 때문에 일어나신건 아니죠? 그랬다면 정말 죄송해요. 워낙 활발한 아이들이라....”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그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정말 잘 쉬었어요. 민폐 끼쳐서 제가 더 죄송하죠.”     


“더 편하게 해드렸어야 했는데 이곳 시설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충분히 회복했는걸요.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그와 그녀는 서로 연거푸 사과를 하다가 눈이 마주쳤다. 함께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준비한 음식이 있다며 방에서 잠시 나갔다. 그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입었던 옷들이 깨끗하게 빨아져 벽에 걸려있고, 선물 받은 손전등과 책, 그림이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따끈한 음식을 건네주었다.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몸은 상쾌해졌다.  


밖으로 나가보니 하늘은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화창했다. 어린아이들 대여섯이 넓은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는 살랑거리는 바람을 들이마시며 마당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곁에 그녀가 다가와 앉았다.     


“아이들이 참 사랑스럽네요. 이곳을 혼자 운영하시는 건가요?”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요. 원래 다른 한 분이 더 계시는데 개인적인 일로 잠시 안 계세요. 둘이서 아이들을 돌보기도 쉽지 않았는데 혼자 하려니까 벅차네요.”     


그녀가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도움을 받았으니 저도 보답해드리고 싶어서요.”     


아니에요. 그냥 편하게 계세요. 손님에게 일을 맡길 수는 없죠.”     


“사양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가 완강하게 부탁하자 그녀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그렇다면 잠시 아이들을 봐주고 계실 수 있나요? 별 건 아니고 그냥 같이 있어주기만 하시면 돼요. 한창 까불거릴 나이라 어디로 튀어나갈지 몰라서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놀던 아이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다가왔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다.     


“아저씨! 이제 괜찮아요? 우리 다 같이 아저씨 옮기느라 힘들었어요.”     


“나 TV에서 본 적 있다니까! 아저씨 유명한 사람이죠?”     


“바보야! 그런 사람이 여길 왜 오냐고. 여긴 완전 시골인데.”     


아이들은 앞다투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 공세에 그는 당황했다. 그녀는 달라붙는 아이들을 떨쳐냈다. 이어서 입모양으로 ‘부탁드릴게요’라고 그에게 속삭인 후 자리를 떠났다. 아이들은 천방지축이었다. 궁금한 게 어찌나 많은 지 일일이 답해주느라 힘들었다. 아이들은 지치지 않았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한시라도 아이들에게 눈을 뗄 수없었다. 아이들을 쫓아다니는데 지쳐 기진맥진했을 때, 한 아이가 소리쳤다.


“기억났다! 아저씨, 발레 하는 사람이죠?”     


“야, 남자가 무슨 발레를 하냐? 그건 여자들만 하는 거야.”     


아이들은 대답해주길 바라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발레를 한단다. 발레리노라고 하지.”     


“누가 발레를 여자만 하는 거라고 했니? 춤추는 남자가 얼마나 멋있는데. 남녀가 조화롭게 호흡을 맞추며 추는 춤이야 말로 정말 아름다운 춤이야. 그렇죠?”  


할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가 그를 거들었다.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기분이 묘해졌다. 아이들은 TV에 나온 유명인이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춤춰주세요! 발레 보고 싶어요!”     


그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가 빠르게 눈치를 채고 아이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런 부탁은 실례란다. 자 얘들아. 얼른 들어가서 간식 먹자!”     


다행히 아이들은 그에게 관심을 거두고 간식을 찾아 뛰어 들어갔다. 눈빛을 교환한 그와 그녀도 아이들을 쫓아 들어갔다. 이후로도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그는 세상 모든 어머니들에게 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드디어 아이들이 잠에 들어 고아원의 불을 모두 껐다. 마당에서 밤공기를 쐬는 그에게 그녀가 따뜻한 차를 들고 다가왔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어요. 감사해요.”     


그녀가 차를 건네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동안 혼자 어떻게 해오신 건가요? 대단하십니다.”     


그는 그녀를 추켜세웠다. 그녀는 부끄러운지 수줍게 웃음을 보였다.     


“아까 낮에 아이들이 짓궂었죠. 죄송합니다.”     


그녀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저는 괜찮습니다.”     


그와 그녀는 나란히 앉아 밤의 숲을 바라보았다. 바람과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귀뚜라미 울음이 들려왔다. 평온한 밤이었다.


“저 혹시....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그녀가 침묵을 깨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맞추고 질문을 기다렸다.     


“폭풍우 치던 숲에서 당신을 발견했을 때, 깜짝 놀랐어요. 사실 오래전에 당신의 공연을 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고아원으로 옮긴 후에 제가 젖은 옷을 갈아 입혀드리다가 당신 등 쪽에서.... 태엽을 보게 되었어요.”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개를 숙이는 눈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그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녀는 그의 반응을 묵묵히 기다렸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였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어요?”     


그렇게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태엽의 힘으로 해온 공연들, 태엽이 움직이지 않게 되어 더 이상 춤을 추지 못하게 된 것, 노인이 알려준 ‘영혼들이 모여 춤추는 곳’을 찾아 떠난 것, 어느 한 마을에서 보았던 축제와 작가, 화가와의 신비한 만남까지. 그녀에게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을 털어놓았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 앞에서 만큼은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태엽의 춤이 아닌 저 자신의 춤을 춰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아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네요.”     


그는 이야기를 끝마쳤다. 누군가에게 오래된 비밀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후련해진 것 같았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로 말을 이었다.


“저 되게 별로죠? 지금까지 이뤄온 것들이 사실 저 스스로 해낸 것이 아니었다는 거....”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그녀가 갑자기 크게 외쳤다.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살짝 흥분한 상태였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태엽도 당신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태엽이 멈춰도 다시 무대로 돌아가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정말 감동이에요. 당신이라면 반드시 복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     


“당신의 춤을 찾아가는 거요.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요. 춤을 추려면 음악이 필요하잖아요? 사실 제가 어릴 적에 음악을 배웠어요. 도중에 그만두고 고아원 일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신이 춤을 추는 동안 피아노를 연주해드릴 수 있어요. 잠시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손을 잡고 숲으로 이끌었다. 그는 어리둥절 그녀에게 이끌려 달려갔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숲 속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피아노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악기들이 있었다.     


“여기는 아이들이 음악 수업을 할 때 사용하는 곳이에요. 아이들이 잠들었을 때 가끔 이렇게 혼자 이곳에 와서 연주를 하곤 했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멍하니 서서 그녀의 연주를 감상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그녀의 주변을 부드럽게 비췄다.     


그녀가 연주를 마쳤다. 음악은 멈췄지만 그 여운은 여전히 주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왔다.     


“우리 이렇게 해요. 고아원에 머물러 주세요. 오늘처럼 낮에는 저와 같이 아이들을 돌봐요. 그리고 밤에는 이곳에 와서 당신이 춤을 연습할 수 있도록 제가 피아노를 연주해 드릴게요. 당신의 춤을 출 수 있게 될 때까지,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들은 눈을 마주친 채 머물렀다. 그 시간은 한참이나 길게 느껴졌다.     


“저도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왜 도와주시는 건가요?”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냥.... 오늘 낮에 너무 편해서요. 계속 일을 도와주셨으면 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녀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가슴속이 울렁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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