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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May 28. 2021

다시 쓰는 이야기


흐르는 강을 따라 걸었다. 걷다가 지칠 때면 쉴 곳을 찾아 앉아서 작가의 책을 읽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때쯤, 낡은 오두막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들어 오두막에 가까이 다가갔다.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삐그덕 소리가 났다.     


유화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오두막 안은 캔버스와 조각상들로 가득했다. 발 디딜 틈도 없어 힘들게 앞으로 나아갔다. 오두막의 한가운데에는 완성되지 않은 그림이 있었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형체가 여러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어딘가 기괴하면서 심오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림들을 감상했다.     


“누구야! 그림에서 떨어져!”     


우렁찬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완성되지 않은 그림이 그려져 있던 캔버스를 넘어트렸다. 그림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꾀죄죄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잔뜩 붉어진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남자는 그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내 그림! 내 작품 어쩔 거야! 이거 그리려고 사흘 밤낮을 꼬박 새웠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화가가 매섭게 몰아붙였다. 그는 당황하여 두 손을 높게 들고 다급히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문이 열려있길래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화가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화가의 기운이 가라앉았다. 화가는 그를 붙잡던 멱살을 풀고 온갖 그림들 사이에 숨어있던 오래된 의자 하나를 꺼내 걸터앉았다.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화가의 들쭉날쭉한 태도에 어리둥절했다. 두 손을 들고 그대로 굳은 채로 화가의 말을 기다렸다.     


“크흠, 내가 문단속을 깜빡했나 보군. 그래도 내가 공들여 만든 작품에 대한 배상은 받아야겠어.”     


“죄송합니다. 제가 저 그림을 사겠습니다.”     


“뭐? 난 내 작품 남한테 안 팔아! 저렇게 망친 작품은 더더욱.”     


“네? 그럼 제가 어떻게 배상해야 하나요?”     


화가의 눈이 반짝였다. 의미심장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왠지 불안해졌다.     


“내 작품의 모델이 되어봐.”     


“뭐라고요?”     


“지금 막 영감이 떠오르고 있어! 그쪽의 눈을 본 순간 내 안의 열정이 끓어올랐다고! 30년 예술 인생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모델은 처음이야! 간만에 살 맛이 나는군. 그냥 앉아있기만 하면 되니까 어려울 것 하나도 없어. 자, 얼른 준비해!”


화가는 신이 나서 휘파람을 부르며 그림 도구들을 준비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의자에 앉혀져 있었고, 화가는 그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다가 흐뭇한 미소를 보여준 뒤 작업의자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자신의 세계에 푹 빠져서 집중하고 있는 화가의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르게 숙연해졌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화가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작품에 몰두했다. 같은 자세를 유지하느라 몸이 근질거리던 그는 화가에게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이 그림들 모두 선생님이 그리신 건가요?”     


“그렇지. 다 내 작품이지.”     


화가가 웅얼웅얼 대답했다.     


“아까 작품들을 안 판다고 하셨는데 그럼 이 많은 그림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멋진 그림들인데요.”     


화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만 공간을 채웠다. 잠시 뒤, 화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내 작품들을 팔지 않아. 작품을 팔기 위해선 남들이 원하는 것을 그려야 해.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예술은 영혼이 담겨있지 않은 껍데기에 불과해. 난 그런 예술은 하고 싶지 않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바로 그거야. 그리고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겠지.”     


화가는 작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영혼’이라는 말을 듣자 그의 눈이 번쩍였다.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그는 화가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혹시 ‘영혼들이 모여 춤추는 곳’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나요? 제가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곳입니다.”     


화가가 드디어 작품에서 눈을 돌리고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영혼이 춤을 춘다고?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나? 요 근래 들어본 말 중에 제일 웃기는군.”     


역시나였다. 화가는 다시 작품으로 돌아갔다. 푸른색과 금색, 검은색이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림의 가운데에는 한 남자가 검은 무언가에 짓눌려 힘들어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삼키고 화가가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렸다. 물감이 잔뜩 묻은 오래된 앞치마, 며칠간 감지 않은 듯한 떡진 머리, 전부 헤져버린 셔츠의 소매, 앞이 다 망가진 더러운 부츠까지, 전체적으로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그 눈빛. 화가의 눈빛 만은 반짝였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반드시 이겨낼 것 같은 총명한 눈빛에 그는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화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저....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한 번 들어주시겠어요?”     


화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붓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어갔다.     


“한 무용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용수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요. 그 힘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설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고요. 하지만 어느 날 무용수는 능력을 잃게 되고,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여기까지 제가 생각한 내용인데 그다음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요. 결국 무용수는 능력을 되찾고, 무대로 복귀한다는 결말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선생님께선 이 이야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는 힘들게 말을 마쳤다. 약간 바꿔서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비밀을 남에게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화가의 반응을 기다렸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작가 지망생인가? 만약 그렇다면 빨리 포기하는 게 나을 듯싶은데. 형편없는 이야기구먼. 뻔하디 뻔한 이야기야.”     


화가는 그를 비웃었다.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뭐라 쏘아붙이려고 했으나 더 이상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화가의 태도에 포기하였다.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때쯤, 화가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어. 늦었으니까 자고 가.”     


이런 복잡한 곳에서 잠을 청하고 싶지 않았으나 화가는 막무가내로 오두막의 문을 걸어 잠그고 조명을 꺼버렸다. 빨래한 지 몇 달은 넘은 것 같은 담요를 그에게 던졌다. 화가는 능숙하게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도 어쩔 수 없이 많은 캔버스들 사이로 몸을 뉘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세 가지 선택지가 있지. 안 그러냐?”     


잠든 줄 알았던 화가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네?”     


“네 소설 말이야. 능력을 잃었다면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첫째, 능력을 되찾아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 이건 너무 식상하지 않아? 소설은 주인공의 첫 모습과 마지막 장면의 모습이 같으면 안 돼. 주인공이 변화하는 모습, 거기에 독자들은 감동받는다고. 다가오는 시련을 이겨내고 무언가를 깨닫는 주인공이 매력적이지. 네가 쓰려는 결말은 너무 평범해. 둘째, 무대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 거야. 그깟 춤이 뭐라고. 나도 예술을 하는 사람이지만 예술이 밥 먹여주냐? 춤, 음악, 미술, 문학.... 굳이 이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일은 많아. 한 곳에 목멜 필요는 없다는 거지. 다른 길을 찾아 떠나는 주인공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어. 물론 두 번째 선택은 네가 말하고 싶은 것과 거리가 멀긴 하지.”     


오두막의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럼 세 번째 선택지는 뭔가요?”     


그가 물었다.      


“도전해보는 거지. 능력 없이 무대로 복귀하는 거야. 힘든 선택이겠지. 항상 무언가에 의지하다가 스스로 해보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 충분히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해. 능력이 언제 돌아오는지 모른 채로 마냥 기다릴 거야? 다시 힘을 되찾을 방법만 찾아 헤맬 거야? 그러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주인공은 끝내 잊힐 거야. 잘 들어. 아까 두 번째 선택에서도 말했듯이 예술이 돈을 벌어다주진 않아.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술을 하는 걸까? 그건 바로 아름답기 때문이야. 끝이 없는 예술을 이루기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리는 예술가의 열정, 간절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 거라고. 네 소설의 주인공이 진정으로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면, 그만큼 춤을 사랑한다면 능력 없이도 무대에 설 수 있어야지.”     


화가는 이 말을 끝으로 잠에 들었다.     


화가의 말이 모두 옳았다. 태엽은 영영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젠 무대를 떠나보내야 하는 걸까? 아니다.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만 한다. 태엽의 춤이 아닌 그의 춤을 추기 위해서 움직여야만 한다. 간절함과 열정을 가지고. 그가 노인을 만난 것도, 영혼을 찾아 헤맨 것도, 작가와 화가를 만난 것도 모두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달이 밝게 빛나는 밤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뒤척이며 잠에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났다. 화가가 오두막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있었다. 뽀얀 먼지가 일었다.     


“일어났냐? 너도 일 좀 도와라.”     


그들은 아침 내내 오두막을 정리했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기 전, 화가가 그에게 물었다.     


“어제 쓴다던 소설 말이야. 사실 네 이야기지?”     


화가가 정곡을 찔렀다. 그는 세차게 놀라 애써 부인했다.     


“그럴 리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하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자, 이거나 가져가라. 너한테 필요할 것 같다.”     


화가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림을 건넸다. 어제 그를 모델로 두고 그렸던 그림이었다. 그림을 펼쳐보았다.     


검은 무언가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남자.

하지만 남자의 가슴에는 푸른빛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태엽에서도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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