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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May 26. 2021

어둠 속에서


다음날 아침, 마을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그에게 촌장이 다가왔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일찍 떠나시는군요. 며칠 더 머물다 가시지.... 저희 마을이 학자님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어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요. 워낙 포근한 마을이라 잘 쉬었습니다.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어제 이후로 몸을 짓누르던 피곤함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주제넘는 참견일 수도 있지만 학자님, 영혼에 대해서 연구하신다 하셨죠? 사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가 잘 알고 지내는 작가님이 계시거든요. 그분이라면 영혼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주실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귀가 번쩍 뜨였다. 단서를 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기 때문에 사소한 기회라도 놓쳐선 안되었다. 그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곳이 어디죠?”   


“아, 마을 출구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쭉 따라가시면 아기자기한 정원이 있는 큰 저택이 있을 겁니다. 작가님께는 제가 따로 연락드려 놓을게요.”


촌장은 도움이 되어 무척 기쁘다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작은 꾸러미를 건넸다.     


“이게 뭔가요?”     


“그냥 소소한 선물입니다. 이것도 인연이니까요. 약간의 먹을  새 옷가지 몇 벌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요. 손전등입니다. 밤길에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럼 항상 몸조심하시고 하시는 연구도 잘 풀리시길 바라겠습니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손을 흔드는 그들에게 그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영혼들이 모여 춤추는 곳’을 찾아 떠난 여행은 긴 터널을 지나가는 것 같이 막막했었지만 이제는 한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설레는 기분으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그는 저택에 도착했다. 알록달록한 꽃들이 그를 반겼다. 많은 꽃들 사이로 가지런히 나있는 정원의 통로를 지났다. 문을 두드리자 저택 안에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커다란 리트리버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녀석은 새로운 만남이 기쁜지 꼬리를 연신 흔들며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엘리! 그만! 이리 와.”     


엘리라는 리트리버는 아쉬웠는지 그의 곁을 한 바퀴 더 돈후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은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집 안이 전체적으로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엘리는 그녀의 옆에 얌전히 앉아 주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이 아이가 불편하게 해드렸네요. 엘리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요. 학자님이시죠? 연락받았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아닙니다. 귀여운 녀석이네요.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들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은 굉장히 넓었다. 작가와 리트리버 말고는 아무도 살지 않는 듯했다. 작가는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로 가는 길은 복잡했지만 작가는 엘리와 함께 능숙하게 길을 찾았다. 그는 응접실의 소파에 앉았다. 작가가 따뜻한 차를 내왔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쓰던 글이 있어서요. 마저 마무리한 후에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그동안 엘리가 옆에서 있어줄 거예요. 그렇지 엘리?”


엘리가 알았다는 듯이 작게 짖었다. 작가는 양해를 구한 후 응접실에서 나갔다.     

작가가 다시 돌아온 건 그와 엘리가 마치 오래 만난 사이처럼 친해졌을 때였다.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쓰다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네요.”


작가가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엘리 덕분에 저도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사람을 잘 따르네요.”


그는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리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반대쪽 소파에 앉아있는 작가의 옆으로 돌아가 고개를 파묻고 엎드렸다.     


“마을 촌장님께 들었어요. 영혼에 대해서 연구하신다고....”     


“네. 혹시 ‘영혼들이 모여 춤추는 곳’에 대해 아시나요? 제가 반드시 그곳을 찾아야만 해서요. 꽤 오랜 시간 여행했지만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더군요.”


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 ‘영혼들이 모여 춤추는 곳’이요.... 죄송해요. 저도 처음 들어보네요. 아마 상징적인 뜻이 담긴 장소가 아닐까요. 어쩌면 장소가 아닐지도 몰라요. 명쾌하게 대답드리지 못해서 속상하네요.”     


정적이 흘렀다. 어색한 공기를 벗어나고 싶어서 그는 차를 홀짝였다. 이곳에 오면 확실히 깨닫는 게 있을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해 실망이 컸다. 작가가 침묵을 깨고 말을 이었다.     


“사실.... 전 영혼을 만난 적이 있어요. 현실 세계에서가 아닌 꿈에서였긴 하지만요. ”     


“네? 영혼을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그가 놀라워하며 물었다.     


“25년 전이었을 거예요, 아마. 전 어릴 적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어요. 주변 어른들은 제 글을 읽고, ‘천재 작가의 탄생’이라고 칭찬했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신나서 글을 열심히 썼어요. 자연스럽게 작가의 꿈을 가지게 되었고요. 그렇게 일찌감치 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저의 소설을 내기 위해 노력했어요.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않았죠. 보내는 원고마다 전부 퇴짜를 맞았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글을 썼어요. 저는 스스로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밤을 새워가며 소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쌓여만 가는 실패작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어요.”     


작가는 잠시 차로 목을 축였다.     


“그렇게 자신에게 실망하며 ‘내가 진짜 재능이 있는 걸까, 이 길을 가는 게 맞는 걸까’ 생각했어요. 어릴 적 소꿉장난 같았던 글에 칭찬했던 어른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죠. 그들이 그런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요. 저 자신에게 의심을 갖게 되고, 그 초조함과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풀어냈어요. 참 철없던 시절이었네요.”     


작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작가가 담담하게 하는 말에 깊게 집중했다. 엘리도 얌전히 엎드려 주인의 말에 공감하기라도 하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작가는 말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게 큰 사고가 찾아왔어요. 그 사고로 두 눈을 잃고 말았죠. 막막했던 인생이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어요. 글 쓰는 것 하나만 보고 달려온 삶이었는데 결과를 내보지도 못하고 세상마저 보지 못하는.... 이것보다 더한 지옥이 있었을까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을 이대로 마감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것마저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몸이 돼버린 제가 죽도록 미웠어요.”     


“정말 유감입니다.”


그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작가는 손을 휘저었다.     


“아니에요. 결과적으로 그 사고가 지금의 저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괜찮아요. 너무 우울한 이야기를 해드려서 제가 더 죄송하네요.”


해가 저물며 저택의 창문 틈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영혼을 보게 된 건 어느 때였나요?”


그가 물었다.     


“시력을 잃고 펑펑 울며 잠든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어요. 꿈속도 어두운 세상이었어요. 그런데 저기 멀리서 푸른빛이 반짝이고 있었어요. 전 그 빛을 향해 다가갔죠. 빛에 가까워지자 어디선가 따뜻한 기운이 저를 감쌌어요. 마치 어머니의 품 속 같았어요. 갈기갈기 찢긴 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어요. 빛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전 깜짝 놀랐어요. 그 푸른빛은 저 자신이었어요. 그것을 보자마자 깨달았죠. ‘아, 나의 영혼이구나....’.”     


작가는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는지 잠시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영혼은 신비로웠어요. 영혼은 글을 쓰고 있었어요. 그래요. 저처럼요. 영혼이 쓰는 글은 아름다운 문장이 되어 어두웠던 저의 주변으로 날아올라갔어요. 문장들은 밤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반짝거렸죠. 저는 광활한 우주 위에 떠있는 기분이었어요. 빛나는 저의 글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어요. 제 영혼이 썼던 글들은.... 글들은  이야기였어요.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이야기, 살아오면서 느꼈던 감정들, 포기하지 않았던 꿈과 열정, 날 소중하게 지켜주던 가족들과 감사한 인연들.... 그 글들은 바로 나였어요. 결국.”     


작가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이내 호흡을 가라앉히고 이어 말했다.     


“영혼은 글 쓰는 것을 멈췄어요. 저에게 다가왔죠. 눈을 맞췄어요.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마주 봤어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죠. 영혼은 나의 이야기를 하라고 했어요. 자신이 진심으로 되고 싶은 것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이 이끄는 곳을 찾아가라고 했어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어떤 평가를 내리건 나의 이야기는 내가 써 내려가는 것. 저는 꿈에서 눈물을 흘렸어요. 여러 감정이 교차했죠. 전 지금까지 남들에게 어떻게 하면 재밌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만 생각했어요. 정작 중요한 저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자신의 진심을 담은 이야기에 더 감동할 텐데 말이에요. 어둠을 비추던 글들이 한데 모여 가장 찬란한 빛이 되었어요. 그 빛은 영혼에게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영혼은.... 여기, 제 가슴속으로 들어왔어요. 꿈은 거기서 끝이 났어요.”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는 작가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그 꿈 이후로 저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어요. 암울한 기분을 떨쳐내고 점자를 공부했죠. 다시 글을 쓰고 싶었어요. 남에게 ‘잘 보일’ 이야기가 아닌 나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고되고 힘든 시간이었죠. 종종 너무 힘들어 주저앉을 때도 있었지만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았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저에게는 마음 깊은 곳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는 제 영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니까요. 영혼이, 제 마음의 소리가 이끄는 곳을 바라보고 걸어가다 보면 속도가 느리더라도 반드시 꿈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어요.”     


“정말 놀라운 이야기이군요. 영혼이란 것이 진짜 존재하다니, 저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저도 그 놀라운 경험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 덕분에 전 마침내 작가가 되었고, 사람들은 제가 쓴 책들을 재밌게 읽어주었어요. 저의 솔직한 이야기가 큰 힘이 되었다는 독자들의 메시지를 받을 때면 포기하지 않길 잘했구나라고 생각한답니다.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고 있죠. 여기까지가 제가 영혼을 만난 이야기예요. 학자님께 도움이 되었나 모르겠네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복잡했던 생각이 한결 정리가 된 기분이에요.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영혼들이 모여 춤추는 곳’. 여전히 어디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작가는 영혼을 만났다. 그리고 그 영혼에게서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작가의 입장에 그를 넣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춤을 췄는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춤은 그의 춤이 아니었다. 태엽이 추는 춤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태엽이 이끄는 대로만 하면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으니 굳이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몸은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태엽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손님방이 많으니 하루 머물고 가시죠.”


작가가 소파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엘리도 주인을 따라 꼬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아니에요. 여러모로 민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도 응접실을 나서며 말했다.     


“아, 그렇다면 이걸 가져가세요. 아까 작업실에서 챙겨 온 책이에요. 만나게 된 기념으로 선물드릴게요. 제가 쓴 책이랍니다.”


작가가 그에게 책을 건넸다. 그는 감사히 받았다. 작가와 그는 작별인사를 했다. 엘리가 컹컹 짖으며 그를 배웅했다.     


길을 걷다 지친 그는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잠시 쉬었다. 쉬는 김에 작가에게 받은 책을 꺼내 읽었다. ‘나는 두 번 태어났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한 번, 끝이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한 번.’ 책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펼쳐진 책 사이로 쪽지가 떨어졌다. 작가가 남긴 글인 것 같았다. 쪽지를 열어보았다.          



‘당신의 무대를 기다립니다.’          



그는 벅차올라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은 오랜 시간 멈추지 않았다.


태엽 안쪽에서 전율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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