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극장의 예술적 사명
독일의 공공극장은 문화예술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문화정책의 일환이며 역사적으로 유지되어 온 유산이다. 문화예술의 공급이 수도권에 밀집된 영미권이나 한국에 비해 지역에도 분포된 환경은 문화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큰 장점이다. 또한 상근 예술가, 제작, 운영을 담당하는 인적자원과 지자체로부터 지원되는 안정된 물적자원은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보이고 관객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예술적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된다.
보통 9월 중순부터 다음 해 7월 중순에서 말까지를(극장마다 다름) 시즌으로 설정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오페라나 발레의 경우 솔리스트의 섭외 때문에 대략 2년 전에, 연극은 1년 전에 기획한다. 물론, 이미 짜여진 프로그램도 중간에 코로나와 같은 악재나 지원금의 삭감, 솔리스트의 문제 등 변수를 감안하여 수정과 보완을 거듭한다. 완성된 프로그램은 시즌 마감하기 4~5개월 전에 책자와 함께 공개된다.
프로그램 구성의 핵심은 새로운 시즌의 콘셉트이다. 예술감독과 드라마투르기를 중심으로 각 파트의 수석들은 수차례 회의를 거쳐 콘셉트를 정하는데 이전 시즌과 새로운 시즌 그리고 다음 해 시즌 프로그램을 연장선상에 두고 논의한다. 유명인의 말이나 좋은 글을 인용할 수도 있고 의미있는 한 두 단어, 시대의 화두, 풍자 등 다양하게 열어 놓고 선정한다. 시즌의 모토는 작품 선정 시 제한적일 수 있지만 그만큼 테마에 집중한 레퍼토리를 구상할 수 있다. 시즌 모토 없이 전체적 콘셉트만 정하기도 하며 열린 프로그램으로 다양성에 집중하기도 한다.
법과 정의 Von Recht und Gerechtigkeit! - 잉골슈타트 시립극장 2023/2024
그리움(갈망, 동경) Sehnsüchte - 자를란트 주립극장 2023/2024
콘셉트가 정해지면 기존에 올려진 작품 중 예술적으로 인정받고 흥행했던 레퍼토리 항목에서 작품을 고른다. 되도록 작가, 작곡가 그리고 시대가 중복되지 않도록 선정한다.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은 신인 작곡가 발굴이나 고전 작품의 재해석, 창작 위촉작이며 고대 ~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쓰인 작품까지 시대별로 고려한다. 또한 어린이 및 청소년을 위한 작품, 뮤지컬,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는 프로그램도 포함한다. 대중에게 친숙한 오페라 갈라, 마티네, 작곡가와의 만남, 미술관과 협업, 미디어 아트, 축제, 오픈에어 콘서트 등과 같은 특별 프로그램도 기획한다.
다음은 중간 규모 시립극장의 음악과 무용 파트의 시즌 프로그램의 예시이다.
- 중간 규모의 시립극장: 200~400명의 예술가, 무대, 경영, 시설 관리자가 고용되어 있으며 보통 연극, 음악극(오페라, 오페레타, 뮤지컬)과 이에 속한 오케스트라, 무용 그리고 청소년(청년) 연극팀 운영
- 공연장: 대략 1,000석 -, 500석 -, 200석 안팎의 공연장 2~3개 운영
- 앙상블: 성악 솔리스트(게스트 포함) 15-20명,
합창: 20~40명, 작품의 규모에 따라 엑스트라 합창단 20-40명, 어린이 청소년 합창단 및 시민 합창단도 투입
- 오케스트라: 약 60~70명
- 무용수: 15~20명
*프로그램 구성의 예시 1
*프로그램 구성의 예시 2
*프로그램 구성의 예시 3
프로그램의 개요가 완성되면 예술, 경영, 회계 파트의 책임자들은 실행 가능성을 논의한다. 여기서 경영, 회계팀에서는 선정된 작품의 예술적인 부분에는 관여하지 않지만, 운영상 차질을 빚을 수 있는 과한 프로젝트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다. 반대로 아주 멋진 프로젝트를 실현하기에 지원금이 부족하다면 추가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다.
작품 준비 기간은 규모와 난이도에 따라 6~8주가량 소요된다. 언제, 어느 공연장에서, 어떤 작품에 누가 어떤 배역을 맡을지 배치하는 것은 중요하다. 월, 주 단위로 각 단원의 연습 스케줄을 짜고 출연자의 병가 등 결원이 생겼을 경우를 대비한 예술가 리스트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예술가뿐 아니라 무대 기술, 분장, 의상, 음악 파트 등 스케줄 계획도 세운다. 이렇게 프로그램이 확정되면 모든 일정은 여러 개의 톱니가 맞물린 시계처럼 시즌 마지막 공연을 향해 빈틈없이 돌아간다.
공공 극장의 시즌 프로그램은 한 해 동안 그 도시 문화예술의 이슈를 담당한다. 사전에 제작된 프로그램 책자는 극장, 학교, 공공기관, 도서관 등에 비치된다. 정기회원인 관객들은 미리 시즌 책자를 받아 볼 수 있다. 매월 한 장짜리 펼칠 수 있는 브로슈어 형태로 '이 달의 프로그램'도 만들어 진다. 지하철, 버스정류장의 벽보에는 매월 프로그램이나 극장의 작품 광고 포스터가 붙는다.
3년 전 그때 ‘아이다’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 이번 시즌에 드디어 재상연 한다나 봐.
이번에 극장장이 바뀌었는데 라 트라비아타 모던 버전으로 선보인다던데.
올해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으로 겨울왕국 어린이 오페라 하네요. 아이들이 좋아하겠어요.
그 소설이 오페라로 만들어진다고!! 너무 기대되는데!
지난달 옆 도시 극장에서 토스카를 봤는데 다른 버전 연출작으로 우리 도시 극장에서도 한다나 봐
새로운 안무가가 왔는데 지난달 공연에서 정말 반했어.
독일 사람들은 과거에 올려진 작품이 재공연 되기를 기다리며 지역 극장의 가수, 배우, 무용수를 그 극장과 도시의 자랑으로 여긴다. 또한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적절히 조화된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재미도 느끼며 극장을 찾는다. 이처럼 극장은 레퍼토리 프로그램을 통해 순수예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부터 조예가 깊은 사람까지 아우를 수 있는 예술장으로서 역할 한다.
한국은 대형 뮤지컬이 아닌 이상 순수예술의 재상연에 대해 식상하다, 우려먹는다는 반응이다. 어쩌다 수억을 들여 무대에 세운 오페라는 최소 한 달 연속 상연이 아닌 몇 회에 그친다. 엄청난 돈을 들여 외국 오페라단을 초대하기도 하는데 그 금액이면 국내 최고의 성악가와 제작자들이 작품 서너 개는 만들고도 남는다. '유명한', '국내 최초' 라는 타이틀이 붙지 않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시민들을 특히 오페라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프로그램 선정과 홍보 방식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한국에는 노래, 춤, 연주 기량만 놓고 보면 단연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인재들이 많다. 게다가 지방 곳곳 이미 잘 지어진 예술(문예)의 전당은 250여 개나 된다. 인구 약 20~40만 명이 거주하는 지자체 서너 곳을 선정하여 상근 예술가와 제작 및 운영자를 고용하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판을 깔아놓아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국의 지역 공공 극장에서도 오페라 카르멘을 감상하고 연말에는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한국 소설이 오페라로 창작되는 것은 흔한 일이 되려나? 한국의 공공 문화 서비스도 단발성 공모 사업이 아닌 촘촘하게 짜인 체계적 시스템 안에서 긴 텀을 가지고 운영되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1. 프로그램 1~3은 필자가 작성한 예시일 뿐이며 각 극장의 전통과 지역의 문화, 극장장, 연출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여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진다.
2. Premieren은 이미 어딘가에서 상연된 작품을 그 극장에서 시즌에 새롭게 선보이는 상연작으로 Urauffühung인 초연과는 다른 의미이다.
[참고자료]
T. Schmidt: Die Regeln des Spiels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