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현주
파란 돌멩이
현주
옛날옛날에 신기한 샘물이 있었단다. 그 샘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누구든 한 살씩 한 살씩 젊어졌지. 이 샘물만 마시면 백 살 노파의 구부정한 허리도 꼿꼿이 펴지고, 쭈글쭈글한..... 소식을 들은 욕심쟁이 늙은 영감이 있었어. 원하는 만큼 젊어질 수 있다는데..... 엄마... 온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벌컥벌컥 물을..... 그만 갓난아기가 되고 말았단다. 아기가 되어버린 영감은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어..... 엄마... 샘물 근처에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해. 울음소리가 어찌나 구슬프고 한기가 서려 있는지, 사람들은 더이상 신기한 샘물을 찾아가지 않았단다..... 샘물의 위치는 자꾸자꾸 바뀐다고..... 엄마... 정확히 신기한 샘물이 어디에 있는지..... 아기 울음소리를 몰고 찾아온다는 샘물의 전설만 오래오래 남게 되었단다. 엄마... 엄마......
엄마!
날카로운 소리에 눈을 떴다. 가슴 위에 커다란 돌이 올려져 짓누르는 듯했다.
“엄마! 좀 일어나봐!”
몽롱한 시야로 걱정스러운 표정의 지수가 흐릿하게 보인다.
반복해서 몸을 흔들어대는 딸의 성화에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점점 선명해지는 곱게 풀메이크업한 지수의 얼굴. 잔머리 하나 없이 반듯하게 말아 올린 동그란 머리에, 지친 듯한 눈빛을 보니 이제 막 퇴근했나 보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보니 바로 옆에서 연이가 새근새근 나비잠을 자고 있었다. 그 옆으로 <신기한 샘물> 전래동화책이 보인다. 연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같이 잠든 것이 기억났다.
“엄마, 괜찮아? 얘는, 할머니 힘들게.”
지수는 내 무릎에 올려진 연이의 한쪽 다리를 내리고는, 연이를 바로 눕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면서 눈가를 스윽 닦는 나를 본 모양이다.
“뭘까. 맨날 우리 엄마 가슴을 아프게 하는 악몽의 정체가.”
“슬픈 꿈이었는데. 깨고 나면, 기억이 하나도 안 나더라.”
“원래 꿈이란 게 그렇잖아. 금방 없어져버리는 거.”
뭐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두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자던 연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순간, 지금까지의 긴장 상태가 허무하게 무장해제되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이 조그맣고 어린 생명체의 꿈만큼은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도록 내가 꼭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꿈에 옛애인라도 나오는 거 아니야?”
“얘는. 엄마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장난스럽게 말하는 지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꿈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 어느 한구석에서 빛나는 동그랗고 붉은 낮달,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 분명한데, 아주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묘한 기시감이 드는 공간이었다. 살면서 자주 반복해서 꾸던 이 꿈은, 깨고 나면 사무치는 그리움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동반했다. 잠에서 깨어 가슴을 부여잡고 울면서 밤을 지새곤 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며 단지 가위눌렸을 뿐이라고 외면해보는 현명한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뭐 그러고 보면 지수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반복해서 찾아오는 다섯 명의 아이들. 지구가 마흔다섯 번째 공전 후 또다시 제자리에 놓일 동안에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인 그 아이들은 사실 내가 잘 알고 있는 아이들기에. 모래사장을 뛰노는 아이들의 표정이 행복해 보여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늘 생각했다.
동화책을 책꽂이에 꽂으며 벽면에 붙여진 무수한 연이의 그림들을 눈에 담았다. 아이는 누구를 닮았는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불 꺼진 방에서 숨죽여 형상을 어른대는 그림들 속에는, 이 나이 때 여자애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공주니 고양이니 무지개니 유니콘 같은 것들이 없었다. 대신, 가본 적도 없는 저 먼 나라의 에펠탑이니 자유의 여신상이니 피라미드니 타지마할 같은 것들이 담겼다. 잠시 세계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에 빠지다가도, 저 많은 나라를 떠올리며 엄마의 발자취를 상상했을 한 아이의 외로움을 온전히 읽어내곤 했다. 세계여행이 우리 엄마의 직업이라며 동네방네 자랑하던 아이는, 아침 일찍 비행나가는 엄마의 그림자를 늘 그림으로써 함께 따라다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행기와도 같은 그림들을 빠르게 눈으로 따라가다가 삐뚤빼뚤 그려진 세계지도 그림에서 멈췄다. 세계지도 속의 태평양 어느 부근에 나비 모양의 섬이 그려져 있었다.
할머니, 이 세상에는 나라가 엄청 많대.
어느날 세계지도라는 것을 배워가지고 집에 돌아온 연이었다. 세계지도의 모양을 잊을새라 연이는 어서 스케치북을 북 뜯어 배웠던 그 모양을 기억해가며 삐뚤빼뚤 그림을 그려나갔다. 일곱 살짜리가 그린 것치고는 나름 완벽한 세계지도의 모양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았더랬다. 할머니 내가 어른이 되면 할머니랑 세계여행할 거야, 할머니는 어느 나라를 제일 가고 싶어. 이 말에 왜 몇십 년도 더 된 그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그 옛날, 늘 세계지도에 그려넣으며 꿈꾸었던 곳. 구겨지고 찢기고 바랜 나만의 세계지도 종이를 품고 울음을 삼키던 시절이 있었다. 연이야, 여기에 사실 섬 하나가 더 있단다. 연이의 세계지도 속 태평양 어느 부근에 나비 모양의 섬을 그려주었다. 할머니는 여기를 꼭 가고 싶다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업데이트된 그 지도를 열심히 눈에 담던 연이었다. 연이의 세계지도 사랑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수십 장의 세계지도를 그려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태평양의 어느 부근에 이름 모를 나비 모양 섬이 항상 그려져 있었다.
“내가 아까 말한 게 이거야.”
문틈으로 불쑥 끼어든 목소리가 세계 곳곳에 흩뿌려져 있던 몽상 조각들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그러고 보니 지수가 뭘 사 왔다고 했었지. 보나마나 또 어디서 주워듣고 홀라당 넘어가 한 뭉텅이 사왔을 영양제가 뻔했다. 갱년기가 벼슬이란 말이 맞았다. 어느날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 봉투에서 무심코 발견해낸 ‘58’이란 숫자에 정작 유난을 떤 것은 딸이었다. 엄마도 이제 갱년기야? 기괴한 외계어를 보듯 숫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날의 지수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이후 지수는 틈만 나면 빗을 가져와 내게서 흰 머리카락을 찾아내기 시작했고, 갱년기에 좋다는 온갖 음식들을 사다 나르다가, 어느날은 우리 엄마 언제 이렇게 주름이 많아졌냐며 괜히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지수는 비행을 마칠 때마다 캐리어에서 기념품처럼 그 나라의 영양제를 꺼내어놓았다. 딸의 비행기록과도 같은 세계 각국의 무수한 영양제 통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정말 늙은 건가, 하고 서글퍼지곤 했다. 엄마가 한시라도 나이를 잊지 않도록 하는 아주 고마운 딸이다.
“이걸 몸에 지니고 있으면 좋은 꿈꾸고 잘도 잘 들 수 있대. 요즘 통 잠을 못 자잖아. 잘 자야 오래오래 백 살까지 살지.”
딸이 의기양양하게 내놓은 것은 웬일로 영양제가 아니었다. 돌멩이처럼 묵직하게 생긴 것이 요상하게도 퍼런빛을 띠고 있었다. 딸이 이번에 어딜 갔다 온다고 그랬더라. 아프리카 저 어디쯤,
“잠비아. 거기에 빅토리아 폭포라고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넓은 폭포래. 떨어지는 물소리가 얼마나 큰지 잠비아 전체에서 폭포소리가 들린다잖아. 이름도 포효하는 연기래. 포효하는 연기. 그 폭포 아래에 고이 잠들어있던 행운의 돌이야. 색깔 봐봐. 예쁘지? 파란색이 진할수록 그 효험이 강한 거래.”
지수가 건넨 손바닥만한 퍼런 돌멩이를 들고서 돌멩이와 수면과 잠비아, 행운, 그리고 포효하는 어느 폭포의 상관관계에 대해 골몰했다. 또 순진한 딸은 어느 사기꾼에게 당한 게 분명했다. 아프리카 비행 후 가져온 기념품이란 게 한낱 돌멩이인 이유를 딸은 열심히 설명 중이었다. 차라리 영양제가 나았다. 안타깝게도 아프리카에는 마땅한 영양제가 없었나보다.
“이번에 간 데가 잠비아야?”
“아니, 내가 간 데는 케냐구.”
“그럼, 이건 어떻게 난 건데?”
“잠비아를 다녀온 여행객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하나 주더라고. 잠비아는 우리나라에서 바로 못 가고 케냐를 거쳐서 가야 하거든.”
돌멩이가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란 말에 그래도 안도했다. 그제야 돌멩이에 대한 경계심이 풀리며 그 묵직함이 얼추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수면을 책임지기 위해 저 먼 아프리카 땅에서 날아온 낯선 돌멩이. 어느 여행자의 손에서 딸의 손으로 버려진 것이 분명한 고향을 떠나온 이 돌멩이가 가져올 신비한 효험이란 게 어떤 종류의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그동안 사연이 많았겠구나 하며 왠지 모를 연민이 들었다. 한낱 돌멩이한테.
“바로 앞에서 폭포를 보면 어떤 기분일까. 가슴이 먹먹하다던데. 살아생전에 그 먹먹함 느껴보고 싶네.”
저 먼 땅의 포효하는 폭포를 떠올리며 꿈에 젖어있는 지수를 보면서, 어쩌면 이건 나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수가 엄마를 위한 것이 아닌, 본인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무언가를 집에 들여온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이미 그것만으로 효험을 다한 돌멩이를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낯선 타지에서 이국적인 빛을 내뿜으며 돌멩이는 고요히 잠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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