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5. 떠나지 않은 아이, 돌아온 아이

02 현주

by HANA


떠나지 않은 아이, 돌아온 아이






현주




나는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불나방처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에게 삶과 죽음이란 종이 한 장 차이. 바람 한 점에도 힘없이 펄럭이며 운명을 시험하는 종이들은 매순간 아슬하게 죽음의 고비를 넘겨가고 있었다. 종이가 뒤집히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사는가. 무엇으로 사는가. 끝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하는 인생레이스에서 멈춰서거나 이탈하거나 처음을 향해 되돌아가는 자들이 발생하곤 한다. 마치 죽음과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며 삶을 연장하려는 것처럼.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삶을 연장할 수 있을까. 그렇게라도 삶을 꾸역꾸역 연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차피 끝은 똑같을 텐데. 그동안 더 오래 살고자 하는 그들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던한 노력에 미안하게도 제일 먼저 나가떨어지는 쪽은 그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내가, 언제 죽어도 상관없었던 내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다. 사실 나는 열세살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내가 죽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 그게 이유였다.

그리고, 준원이도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일단, 누나. 거기에서 가장 필요한 건 시간이야.”

“시간?”

“거긴 시간이 흐르지 않거든. 밤만 없는 게 아니었어. 그냥 시간이 그대로 멈춰져 있는 거였어. 다들 그대로야.”


마치 그동안 자라지 않았던 것이 시계가 없었던 탓인 마냥, 집에 있는 시계란 시계들을 모조리 가방에 넣는 준원이다. 시계들을 얼추 챙겼는지 이번에는 시계 안에 넣을 건전지들도 한웅큼 쓸어 담았다.


“아, 전부는 아니고.”


가방 주머니 지퍼를 채우던 준원의 손이 멈칫한다. 복잡한 생각들이 스쳐가는지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 누나가 생각하는 범석이랑 승혁이가 아닐 수도 있어. 좀 많이 변했거든. 정범이도.”

“그런데, 그 애들이 나를 기억할까.”

“처음엔 좀 서로 낯설어도, 기억해낼 거야.”

“이제 와서 반겨줄까? 나를 원망하진 않을까?”

“왜? 그때 같이 안 가서?”


45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케케묵어 갈수록 역한 기운을 풍기는 그 감정. 세상의 숱한 손가락질보다도, 의리없이 친구를 버린 배신자 낙인으로 늘 혼자였던 학창시절보다도, 가문의 창피라며 더욱 심해졌던 부모님의 냉대보다도, 가장 무서운 것이 그 감정이었다.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매순간마다 숱하게 나를 죽였고, 자꾸만 되살아나는 나를 죽이고 또 죽였다. 그게 그 아이들을 버린 내가 받는 벌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불쑥 이렇게 찾아온 준원이, 너는 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하러 온 오랜 내 죄책감의 환영이 아닐까. 아이들이 죽은 건 아니었다고. 그동안 어딘가에서 잘 살아가고 있었다고. 그러니 이제 벗어나도 괜찮다고. 그런 같잖은 위안을 전하러 너라는 형태로 여기에 온 걸까.


“너무 오래된 일이야. 그런 건 상관없어, 걔네들은.”

“그럼 너는?”

“나? 나는 좀 상관있었지. 그런데 뭐, 이렇게 지금 같이 가는데. 옛날 일이 뭐가 중요해. 누나, 나랑 같이 갈 거잖아.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야.”


뭘 그렇게도 많이 챙겼는지 불룩한 가방을 등에 멘 준원의 표정이 밝다. 마치 첫 소풍을 떠나 들떠있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에 비해 내 가방에는 몇몇 옷가지와 돋보기안경, 지팡이가 전부였다. 준원의 말에 홀린 듯이 가방을 챙긴다고 챙겼는데 대체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준원의 이야기를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사실 준원의 존재 자체도 아직 확실히 믿지 않고 있으므로.

그래서 선뜻 준원을 따라나선다고 말한 걸 수도 있다. 내가 정말 이 모든 걸 내버려두고 그 아이를 따라나설 용기가 있을 리가 없다. 그때도 없었던 용기가 이제 와서 샘솟을 리는 없었다.


“아, 우리 약도 많이 챙겨야 해. 정범이가 아프거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상약의 위치를 묻는 준원을, 금방이라도 사라질까 싶어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야밤에 홀린 듯 캐리어를 끌고 준원을 따라 힘겹게 걸었다. 걸음이 무척 빠른 준원을 따라잡느라 애를 먹었다. 자꾸만 뒤쳐지는 나를 기다리느라 준원은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가 나를 잡아 이끌어주러 되돌아오기를 반복해야 했는데, 45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도착한 곳은, 어둠 속에서 잔잔하게 출렁이고 있는 한강이었다.


“뭐? 이건 죽으라는 거잖아?”

“나를 믿어. 내가 그렇게 해서 왔다니까.”


며칠째 서울 하늘에 떠있는 붉은 보름달이 오늘따라 그 핏빛을 더욱 발광하고 있었다. 달 주변으로 뿜어나오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무척 기괴하다.


“며칠째 고민해봤는데. 달! 저게 바로 정답이었어.”

“알기 쉽게 좀 말해봐.”

“얼마 전에 하빈이도 똑같이 샘물에 빠졌단 말이지. 그런데 걔는 돌멩이가 되었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때는 달이 붉은 색이 아니었어. 나는 기억나. 물속이었는데도 진짜 기분 나쁘도록 주변이 온통 빨갰거든. 나는 그게 다 내 피인 줄 알고, 죽어가면서도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냐, 그건 피가 아니라 붉은 달빛이었던 거야.”

“...대체 뭔?”

“저 달이 뜨면,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있는 거야. 내가 여기로 왔던 것처럼. 그게 내 결론이야.”

“... 그게 너의 결론이라고?”


준원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아니, 두 발짝 세 발짝 떨어졌다. 붉은 달빛을 가득 담은 준원의 눈빛이 꿈에 부풀어 반짝반짝 일렁였다. 제정신인가. 아니면, 지금 내가 제정신인가.

언제 죽어도 상관없었다. 사실 내 인생은 죽어있는 시간이 많았으므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알았다. 나는 여직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나는 오늘 죽어서는 안된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동안 외면했어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사실은 너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분신과 같은 그 아이를 두고 죽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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