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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Jun 08. 2024

미래는 대충대충 정해진다

1993


친구가 언젠가 나에게 말했다. '되돌아보면 중2 때가 제일 좋았던 거 같아, 그때는 하루하루가 기대되고 재미있었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왜냐면 그때는 희망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40이 훨씬 지난 지금 우리는 새 학년으로 올라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대학은 어디를 가게 될까, 언제 누구와 연애를 하고 결혼하게 될까 같은 기대 같은 건 없다. 그저 매일매일 무슨 일이 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을 뿐이다. 어렸을 때는 변화를 꿈꾸고 나이를 먹어서는 안정을 추구한다. 안정이란 것은 원래 기대나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청소년기에 가장 기대되는 인생의 이벤트 중의 하나는 한국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대학 입학일 것이다. BC주에서는 12학년이 되면 본격적으로 대입을 준비해야 한다. 사실 계획은 10학년때부터 세워야 한다. 12학년 과목을 배우려면 그 이전 학년 과목들을 수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12학년이 되어서 갑자기 의대가 가고싶은데 생물 10, 11을 미리 수강하지 않았다면 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야망이 있는 학생들은 미국 대학도 알아보았다.  미국 대학으로 가려면 과외활동도 많이 해야 했고 SAT 니 SAT II 니 하는 시험들도 준비해야 했다. 나도 아이비리그나 MIT 같은 대학을 목표로 나름 서점에서 참고서와 문제집을 사다가 미국 대입 시험공부를 혼자 했었다. 입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고 몇몇 미국 대학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자 팸플릿과 지원서들이 돌아왔고 난 그걸 사전을 찾아 읽어보면서 그냥 여기 쓰여 있는 대로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미국 명문대의 입학이란 건 어중간한 실력으로 깔짝댄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전문 컨설턴트의 코칭도 필요하고 자원봉사 경력이니 대회 수상 이력이니 같은 것도 쌓아야 했다. 집안이 좋으면 성적이 신통찮아도 입학허가를 내 주기도 한다. 그런 걸 전혀 몰랐던 나는 그냥 성적 잘 받고 문제집을 열심히 풀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나는 단추 두 개로 사탕을 사려고 했던 어린아이였다. MIT의 경우에는 그 학교를 졸업한 대학 교수까지 찾아가서 면접도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붙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사실 붙어도 낼 학비도 없었다. 아버지는 미국 대학에 합격하면 집을 팔아서라도 등록금을 대 주마했지만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캐나다에서는 비씨주의 대학 이외에도 워털루와 토론토 대학에 지원했다.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은 워털루 대학 수학과였지만 그곳에서는 내 고등학교에서 성적표가 제때 오지 않았다고 불합격 통지가 왔다. 학교 측의 실수였던 것이다. 나는 학교 담당 카운슬러를 찾아가 어떻게 된 거냐고 따졌지만 카운슬러는 전형적인 일을 대충 하는 중국인이었고 나는 모르는 일인데, 하며 발뺌을 했다. 다행히 토론토 대학에서는 1월에 조기전형으로 합격통지가 왔다. 캐나다 아이들은 '토론토는 너무 도시도 크고 삭막한데 웬만하면 우리랑 같이 퀸스나 맥길을 가지?' 하고 나에게 권했지만 그때 나는 아무래도 제일 큰 도시에 있는 대학이 제일 낫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주위의 한국 아이들도 토론토 대학을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공부를 좀 한다면 맥길이나 퀸스를 갔다. 가장 큰 이유는 토플 성적이었다. 캐나다에 온 지 4-5년 미만의 학생들은 토플 성적을 제출해야 했는데, 그때 기준으로 맥길은 560점, 퀸즈는 580점, 그리고 토론토대학은 600점이었다.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시험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문법은 580으로 제일 낮았고, 듣기는 만점이었다. 시험 결과가 말해주듯 나는 남의 말을 듣는 걸 좋아하지만 말을 할 때는 중언부언하는 경우가 많다. 


내 주위에는 공부를 곧잘 하는 한국인들이 있었지만 의외로 토플이 600이 넘는 사람이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한국인들끼리만 어울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국인들은 조금 배타적인 경향이 있었다. 일단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거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했다. 우리들끼리 농구를 하다가 백인 아이들이 와서 시합을 하자고 하면 아이들은 '저 백인 놈들이 또 시비 거네' 하면서 화부터 냈다. 우리끼리만 있고 싶은데 모르는 사람이 내 공간에 들어오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데려오면 인사하고 대화하는 루틴이 있는 서양의 문화와는 많이 다르다. 한국은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들도 흔치 않다. 남이 한참 이야기하면 "그게 아니라-" 혹은 "난 그건 모르겠고 하튼-" 식으로 대답하는데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지 잘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 달라졌겠지만 그때의 한국 아이들은 또래의 캐나다 아이들에 비해서 세상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남들 다 좋아하는 음악 듣고, 유행하는 옷 따라 입고, '질투' 나 '마지막 승부' 같은 한국 드라마 비디오를 빌려보고, 야구나 농구를 보는 걸 빼면 딱히 취미랄 게 있는 아이들이 없었다. 그 와중에 한국 소년들의 모든 궁극적 목표는 여자였다.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자동차 면허를 따고, 여자 보러 교회에 가고, 여자한테 멋있게 보이려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여자한테 아는 척을 하려고 책을 읽고, 좋은 여자랑 결혼하려고 좋은 대학을 가려고 했다.  그런 왕성한 번식욕구가 없었다면 한국 남자들은 집에서 누워만 있었을 것이다. 취미나 관심분야가 적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는 너 몇 살이냐, 어느 동네 살았냐, 너 거기 살던 누구 아냐 정도의 호구조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현지인과는 더더욱 대화할 거리가 없었다. 영어를 못해서 대화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뭘 말해야 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요새는 엄마들이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아이가 좋은 학교 들어가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여기 이민 온 부모들도 그렇다. 반면에 나의 부모님은 내가 언제 대학 원서를 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너무 무관심한 게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다닐 학교는 내가 알아서 정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 대학도 보내야 하고, 결정사 등록해서 결혼도 시켜줘야 하고, 손주들도 봐줘야 한다. 출산율이 떨어지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부모들은 죄라도 진 듯 아이들에게 뭘 해주지 못해서 안달이고, 아이들은 해줘를 입에 달고 산다. 난 사실 그런 아이들이 많아질수록 좋다. 쓸모없는 젊은이들이 많아야 내가 하루라도 일을 더 할 수 있으니까. 젊은이들이 모두 똑똑하고 독립심이 강하고 사리분별을 잘한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당장 싼 값에 나를 젊은 사람으로 갈아치울 것이다. 


언젠가 회사의 한국인 후배 하나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몰랐는데, 사회에 나와서 보니까 멍청한 인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회사에도 어떻게 저런 실력으로 월급을 받을까 싶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회사가 굴러가는 것이 신기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아꼈기 때문에 그에게 인생의 진리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세상은 원래 멍청한 사람들로 득시글해, 근데 네가 그걸 알아차렸다는 걸 눈치채게 하면 안 돼. 항상 말로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걔네들한테 뭐라도 뽑아낼 생각을 해야 해. 그런 애들이 바닥을 깔아주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편하게 사는 거야. 다른 똑똑한 사람들도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잠자코 있는 것 뿐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너나 나처럼 똑똑하다면 이 작은 회사 들어오는 것도 얼마나 피 튀기게 경쟁해야 하는지 알아?  그런 애들 없으면 우리가 만드는 물건은 누가 사주고 유튜브 조회수는 누가 올려주겠니."


그는 이후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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