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한 학교가 아니었다
5살 배기 쌍둥이를 데리고 인도 구자라트에 오는 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아내도 한국의 잘 짜여진(?) 육아 루틴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감당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 내심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인도에 가면 아이들을 유명한 국제학교에 보내면서 영어도 배우게 하고 좋은 경험도 시킬 수 있을 거야! “
걱정하는 아내를 설득할 수 있는 나의 유일한 호언장담이었다. 코로나로 1년 늦게 온 아이들은 처음 보는 인도 풍경에 놀라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본 아빠를 보고 연신 살을 비벼대며 좋아했다.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은 아이들 학교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아직 초등학생 입학할 나이는 되지 않으니 유치원에 보내야 했고, 아메다바드에서 최고로 좋다는 국제학교에 딸려있는 Pre School을 찾아서 아내와 견학에 나섰다.
40대 이상이라면 기억하는 ‘천사들의 합창’이라는 어린이 TV 프로그램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미국 학교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델리나 첸나이 대도시에 학비만 연간 2천만원이 넘는 미국, 영국계 국제학교가 있고 이미 얘기도 많이 들어서 내심 기대한 것은 사실이다. 학비가 회사에서 지원이 되니 아이들의 좋은 교육 환경은 나와 같은 주재원들의 목적 중에 하나였다.
아마다바드에는 그런 학교는 없었다. 인터내셔널이라고 학교명에 붙어있지만 외국학생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선생님 또한 모두 인도인들이었다. 영어로 수업은 진행되지만 국제학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낙후한 시설에 선뜻 아이들을 보내기 어려웠다. 학교 캠퍼스가 위치한 곳들은 시내가 아닌 시골길 비포장 도로를 지나가야 했다. 낡은 책걸상, 파리가 날렸던 주변 환경 그리고 녹슨 놀이터의 기구들에 우리 부부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메다바드도 작은 도시는 아니어 국제학교는 있었지만, 마치 조금 더 좋은 사립학교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외국인 자체가 많지 않아 외국인에게 맞는 학교가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몇 군데 돌아다녀 보니 아내는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더 다녀봐야 마음에 드는 학교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만 집에 가자고 했다.
“여기 몇몇 한국 아이들도 잘 다니고 있어. 시설은 그렇지만 나름 이곳에서는 유명한 학교들이야”
마치 학교 홍보대사가 된 거 마냥 아내 옆에서 설득력 없는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결국 어차피 유치원이니 꼭 국제학교에 딸린 곳으로 가는 것보다, 시설 좋고 깨끗한 독립 유치원으로 보내기로 했다. 수많은 조사를 통해 제법 깔끔하고 만족스러운 환경을 제공하는 인터내셔널 프리스쿨을 찾았다. 영어, 불어도 가르쳐주고 미술, 체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입학비도 꽤나 높아 등굣길에 보면 고급 수입차가 많이 보였다.
이렇게 아이들의 첫 인도 단체생활이 시작됐다.
자녀를 좋은 국제학교에 보내는 것은 주재원의 가장 큰 메리트이다. 아메다바드가 주재 지역으로 선호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한국사람에게 만족스러운 국제학교가 없어서이다.
결국 이곳에는 아이를 대도시 국제학교에 보내기 위해 인도에서도 따로 떨어져 사는 가족도 있었다. 아빠는 아메다바드에 아이들은 뭄바이나 델리에 거주하는 식이다. 비행기를 타야 해서 1-2주에 한 번씩 상봉한다. 해외에 같이 나와서 이산가족으로 산다는 게 아이러니한 것이다.
첸나이에서 좋은 국제 학교를 보내는 선배와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서 좋겠다고물으니, 국제 학교에 한국 학생이 절반이라며 영어보다 울산 사투리를 더 먼저 배워 온다고 자조 섞인 얘기도 전했다.
요즘 한국도 많이 발전해서인지 국제학교를 보내기 위해 가족이 함께 해외에 오는 경우는 많이 줄었다. 한국도 영어 교육이라면 이제 충분히 우수한 환경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대했던 좋은 학교는 보내지 못했지만 시간 맞춰 퇴근하여 아이들과 오랫동안 오후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국제학교보다 더 큰 메리트였다. 단지 안에 있는 수영장에서 다 같이 수영을 즐기고 아이들과 테니스, 축구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건 한국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제 5살이었던 아이들은 국제학교 인지 일반 학교인지도 모른 채 이웃에 있는 친구들과 하루 종일 즐겁게 놀며 아빠랑 오랜 시간을 갖는 게 오히려 더 좋은 추억이라고 얘기한다.
국제학교를 꼭 보내야 한다는 것은 나와 아내의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유치원을 보낼 때도 적응시켜야 한다는 아빠의 조급함에 매정하게 밀어넣고 우는 아이들을 모른척 했던 날이 가끔 생각난다.
엉엉 울며 들어가던 쌍둥이를 왜 그렇게 몰아세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