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암에 걸리면 한 번쯤 내가 왜 암에 걸렸을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술도 많이 마시지 않고, 고기를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데 대체 왜?' 이런 생각들 말이다. 그런데 내가 암을 진단받았을 때 든 생각은 '아, 결국 암에 걸렸구나...'였다.
일전에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나의 유전자에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 변이는 없음을 확인한 바 있다. 직계가족을 비롯하여 친인척 중에 암 환자가 많으니 가족력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족들이 암에 걸렸다고 해서 모두가 암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암에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원인을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다. 명백한 원인이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극심한 스트레스'
이것이 내가 암에 걸린 이유이다. 8개월 전, 지금의 악성 종양이 처음 내 오른쪽 가슴에 자리 잡았을 무렵,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 환경에 노출되었다. 그 무렵 세 살배기 딸아이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그것이 사단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계속 가정보육을 하다 28개월 소은이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일주일이 되던 날, 사건이 발생했다. 집에 온 아이가 계속 불안해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잠에 들어도 바로 경기를 일으키며 눈이 뒤집혀 우는 것이었다. 태어나 아이가 그렇게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아이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말이 나왔다.
"선생님이 계속 소리쳤어. 뚝! 뚝! 뚝!"
"선생님이 그만! 그만! 소리쳤어."
"엄마 무서워, 무서워."
아직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였지만 일관되게 선생님이 소리쳤다는 의사를 표시하였기에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고, 일단 어린이집을 며칠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아이 상태는 며칠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았고 동네 맘 카페에 수소문을 해보니 딸아이의 담임교사로 인해 어린이집을 퇴소한 아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어린이집 부적응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있어 결국 어린이집에 cctv열람을 요청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설마, 우리 아이에게, tv속 뉴스에 나올 법한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cctv를 보고 기관에서 그날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는데 어린이집에서 cctv즉시 열람을 거절했다. 사유는 다른 아이의 얼굴을 모두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업체가 당장 올 수 없으니 당일 cctv를 보여줄 수 없고, 영상을 편집한 후 보여주겠다는 입장이었다. 석연치 않은 느낌이 현실이 되어 가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머문 시간은 1시간가량인데 거기 나오는 아이들을 어느 세월에 모자이크 처리를 할 것이며, 설사 cctv를 본다 할지라도 그렇게 편집된 영상을 믿을 수는 없었다.
법적 절차를 알아보니 cctv열람은 같은 반 아이 학부모에게 cctv열람 동의를 구하고 거절할 경우 해당 아이만 모자이크 처리를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어린이집 원장은 학부모들에게 동의하는 절차조차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당장 학부모들에게 동의 절차를 밟고 cctv를 보여주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 그렇게 실랑이 끝에 겨우 cctv를 확인할 수 있었고 cctv를 보고 난 후 며칠 동안 아이가 왜 그토록 힘들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오열하며 1시간을 방치되어 있었다. 교실 한가운데에서 딸아이가 울고 있는데 누구 하나 아이를 안아주지 않았다. 보조 교사를 포함하여 4명의 어른이 있었지만 모두 오감놀이를 치우는데 몰두할 뿐 아이가 우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는 목이 터져라 서럽게 울며 애타게 엄마를 찾았지만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딸아이는 그 교실에서 마치 투명인간 같아 보였다.
교실에서 울던 아이는 이내 놀이터로 끌려가서도 시종일관 울었다. 어찌나 크게 울었는지 놀이터에 있는 아이들이 모두 소은이를 둘러싸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를 달래는 구원의 손길이 없었다. 중간중간 담임교사가 허리에 손을 얹고 아이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나왔고 아이는 교실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울었다. 엄마에게 전화해달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그 요구는 묵살되었다. 담임교사는 우는 아이를 내버려 둔 채 다른 아이들의 옷을 갈아입히고, 아이가 안아달라고 손을 내미는데 계속 거절하는 사인을 보냈다.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그만 울라고 소리치고, 뚝! 뚝! 뚝! 그치라고 다그치는 모습이 보였다. 교실에서 아이가 목놓아 우는 동안 담임교사는 단 한 번도 아이를 다독이지 않았고, 아이가 우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아이들의 식판에 배식을 하고 있었다. 결국 얼굴도 모르는 보조교사가 와서 아이를 꼭 안아주자 아이가 서럽게 안겨 우는 장면이 나왔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르고 엄마가 데리러 갈 시간이 되자 담임교사는 아이를 내보내기 직전 아이 얼굴을 거칠게 물티슈로 박박 닦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이를 내보냈다.
cctv를 다 보고 나니 말문이 막혔다. 내 앞에 고개 숙이고 있는 젊은 20대 교사를 보며, 그저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너무 멍해서 따질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원장은 아이가 안정될 때까지 심리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비용을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원장과 담임교사가 눈물을 보이며 사죄를 했지만 정작 울고 싶은 건 나였다. 일면식이 없는 아이가 길바닥에서 울어도 지나가는 어른이라면 한 번쯤은 돌아보게 마련인데, 어떻게 담임교사가 아이를 그렇게 울게 내버려 둘 수 있을까. 애처롭게 허공으로 손을 뻗는 아이를 왜 단 한 번도 안아 주지 않은 것일까.
'때리는 것만이 학대가 아니다. 저것은 아이에게 정서적인 폭력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할 수가 없었다. 말을 시작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고작 28개월 된 어린아이였다. 아직 어린이집에 적응도 안된 아이가 낯선 환경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이가 그토록 엄마를 찾는 데 도대체 왜 엄마를 불러주지 않은 걸까. 아이가 가정을 벗어나 처음 만난 사회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아무리 울어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는 좌절과 무력감을 느꼈을 것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아이가 울면 공감해주고 지지해주는 게 교사의 기본적인 역할인데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교사를 때려치우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이는 그 후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새로운 어린이집을 찾았지만 분리불안이 심해져 엄마와 잠시도 떨어질 수 없었다. 명랑하고 밝았던 아이의 태도가 180도 변했다. 첫 기관에서 적응을 잘해 첫날부터 밥을 먹고 왔던 아이가 그 사건이 있은 후 엄마가 같이 있어도 교실에 들어가질 못했다. 아마 교실에서 교사에게 거부당하고 오래 울었던 기억 때문이리라. 잘 놀다가도 엄마가 교실 밖으로 나가려 하면 기겁을 하고 그때부터 극도로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였다.
코로나로 인해 적응 기간을 오래 가질 수 없어 4일만 아이와 함께 등원할 수 있었고, 적응 기간이 끝나고 아이를 혼자 보내려 했으나 아이는 필사적으로 내게 매달렸다. 아이를 바라보는 선생님들도 '저 아이는 아무래도 기관에 다닐 수 없겠다'라는 눈빛이었다.
"어머니, 일단 나가셔야 될 것 같아요."
쫓겨 나오다시피 나오는데 눈물이 나왔다. 왜 우리 아이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그때가 복직까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나는 어떻게든 아이를 기관에 보내야 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 기관에 보내지 않으면 아이가 더 움츠러들고, 엄마와 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에게 세상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님을, 따뜻한 선생님도 있음을, 집이 아닌 곳에서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당시 소은이는 분리불안 외에도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를 보였는데 낯선 사람을 극도로 무서워하여 다가가지 못하고, 특정 사람을 무섭게 느끼면 경기를 일으키며 울어댔다. 무서워하는 사람의 인상착의도 특정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모르는 그 어떤 요소가 아이를 끊임없이 자극하는듯했다. 하다 못해 커피숍조차 들를 수가 없었다. 아이는 낯선 공간에 잠깐이라도 들어가려 하면 소리를 지르고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두려워하고, 오토바이라도 지나가면 '무서워, 무서워'를 외치며 바들바들 떨었으며 주차장과 같은 어둡고 밀폐된 공간에서 경기를 일으켰다. 외출이 거의 불가능했다.
가정에서도 불안 증세는 계속되었다. 드라이기를 켜면 그 소리에 과민하게 반응했고, 물이 무서워 머리를 감을 수도, 욕조안에 들어가 샤워를 할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밤마다 악몽을 꾸며 울면서 깨는 지옥 같은 날이 반복되었다.
나는 당장 아동상담센터로 발길을 돌렸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상담을 하고, 아이와 맞는 상담 센터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첫 상담센터에서 상처만 받고, 두 번째 센터에서는 시간만 낭비하고, 세 번째 센터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보았다. 상담 결과 아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상황 속에 놓여 있었고, 그 트라우마는 최소 6개월은 갈 것이라 하였다. 말을 유창히 할 수 있는 나이였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아직 아이가 너무 어리다는 게 문제였다. 보다 정확한 검사를 위해 K-CBCL검사(유아 행동평가)라는 심리평가를 실시한 결과 아이는 문제행동 총점에서 준임상 범위에 들고 있으며 특히 내재화 문제에서 임상 범위에 드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내재화 문제의 하위인 불안, 우울 및 수면문제에서 백분위 99점으로 매우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었으며 정서적 반응성 또한 준임상 범위에 속하고 있었다. 전문상담사의 치료적 개입이 필요하고 타인에 대한 신뢰 및 안정감을 획득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므로 다각적인 도움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는 소견서를 받았다. 도저히 복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일단 분리불안이 해결되어야 새로운 어린이집에 적응할 수 있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일주일에 두 번, 놀이 치료를 하고 행복한 기억으로 나쁜 기억을 덮을 수 있을까 싶어 온 가족이 여행을 가기도 했다. 여름 방학 기간에도 담임 선생님이 당직인 날에 아이를 데려가 기관에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다행히 따뜻하고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아이는 서서히 어린이집에 적응해갔다. 처음 엄마를 찾으며 불안해하던 아이는 차츰 선생님의 무릎 위에서 놀고, 밥도 먹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 듯 보였다. 놀이 치료를 한 달 정도 지속하며 분리불안을 극복하고 어린이집에 적응했지만 나머지 정서적 반응들은 해결되지 못했다. 결국 상담 선생님과 상의 끝에 소아 정신과를 예약했다.
정신과 의사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날의 경험이 세 살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경험이었으며, 지금처럼 놀이치료를 하는 것 외에는 병원에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아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의사와의 면담도 불가능했고, 결국 아이가 회복하는 데에는 부모의 각별한 관찰과 돌봄이 필요하다는 게 결론이었다.
결국 나는 학교에 지금의 사정을 얘기하고 육아휴직을 연장할 것을 요청했으나 여러 여건 상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마와의 애착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정말로 아이가 나아질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일주일에 두 번 상담센터를 방문하는 날만 육아시간을 쓰는 것으로 협의하고 나는 2학기에 복직을 하게 되었다.
복직을 하고, 삶은 더 힘들어졌다. 매일 왕복 3시간의 거리를 출퇴근하며, 집에 와서는 여전히 불안해하는 소은이를 돌보고, 학교에서는 새로운 업무를 맡아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코로나 이후의 학교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기에 더 힘에 부쳤다. 원래부터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닌 데다 소은이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드니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오후 6시 반에 집에 오면 꼬박 12시간을 밖에서 보내게 되었고, 집에 오면 아이는 감당할 수 없게 화가 나 있었다. 이유 없이 "엄마 싫어."를 외치며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손톱 주변의 살을 계속 뜯어서 상처가 나고, 입술을 뜯어서 피가 마를 새가 없었다.
해가 바뀌고 아이는 4살이 되었지만 그때까지도 머리를 신생아처럼 안아서 감겨야 했고, 응가도 변기에 하는 법이 없었다. 변비에 걸려 대변을 보기 힘들어도 절대 변기에 가서 하지 않겠다고 버티기 일쑤였다. 2시간 동안 쉬한 바지를 입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누군가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소리를 질러댔다. 훈육을 하려 하면 아이는 발작 수준으로 울어댔다.
남편도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자지 못했다. 자기가 육아휴직을 내든 지, 내가 사직을 하든지 이대로는 못 살겠다며 수명이 짧아질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우리 가정이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눈물이 났다.
너무 힘들어 주변의 선생님들께 조언을 구하자 아이를 상담센터에 데리고 갈 것을 권했다. 이미 8개월 동안 꾸준히 상담센터를 다니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는데 아이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우리 부부의 삶은 피폐해져 있었다. 부부싸움이 늘었고, 더 이상 상담을 받는 것도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센터를 바꾼다고, 소아 정신과를 찾아간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오은영 박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모를까. 그야말로 희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무렵 암을 진단받게 되었다.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졌다. 9개월을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살았으니몸도 마음도 정상일 수 없었다. 어린이집 사건부터가 9개월일 뿐, 아이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뭐하나 쉬운 게 없었다. 유난히 예민한 아이를 키우며 우리 부부는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워낙 민감하고 까다로운 기질을 가진 소위 키우기 어려운 아이였는데 그러한 사건까지 겹치자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 많이 들어서 별 감흥도 없는 식상한 말이 이제야 가슴에 와닿는다. 거기에 안 좋은 식습관과 운동 부족까지 겸비했으니 암에 걸리기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었다.
나는 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혹시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된다면 어떻게든 그 상황을 피하거나 바꾸라고.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을 한순간에 바꾸기는 어렵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을 벗어나는 건 조금의 여지가 있다.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 만나지 말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다면 손해를 보더라도 좀 포기하고, 최대한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만이 살 길이다. 나의 경우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질병 휴직을 내며 일을 잠시 포기했고, 남편 또한 남자로서는 쉽사리 내기 힘든 육아 휴직을 냈다. 둘 다 휴직을 하며 경제적 손실이 컸지만 우리 부부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건강을 회복하는 데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걱정하고 신경 쓰고,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처리하려고 하는 습관까지 버리면 금상첨화이다. 부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임을 우습게 보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