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 사이
지금 생각하면 어릴 땐 책을 그래도 많이 읽었다.
그 당시 내가 책을 가까이하는데 영향을 준 사람은 학교 도서관책을 다 읽었다는 두 살 위인 언니와 그 당시 미리미리 읽으라고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문학 책들을 추천해 준 과외선생님이다. 덕분에 중학교 입학 전 방학까지 우리 집 응접실 벽면을 가득 채웠던 책들(국내외 고전문학부터 한 두권 꽂혀있던 무협책까지)과 언니가 읽고 난 책을 마구잡이로 다 읽었었다.
집중력이 좋을 때였는지, 가끔 엄마가 "이렇게 어두운데 눈 나빠지게 책을 보면 어떻게!" 하시며 불을 켜주셔서 밖을 보면 이미 어둑어둑 해진 저녁이었다. 암튼 그래서인지 중학교 1학년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학부 때까지도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곤 했는데... 대학원에 들어가고 어쩌다 길어진 학업기간 동안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전공 관련 텍스트 외에 읽고 싶어서 찾아서 읽은 책은 정말 거의 없었다. 피곤한데 여유 시간까지 활자가 보기 싫다는 이유로 책을 멀리한 게으른 시기였다.
그리고 중년이 되어 내가 사는 동 바로 옆이 도서관이 있는 곳으로 몇 년 전에 이사를 왔다. 그전 아파트에서 방음문제로 너무 괴로웠기 때문에 1) 내가 자는 방 옆이 옆집과 붙어 있지 않을 것, 2) 아파트에 사람이 많이 없고 조용한 곳, 이 두 가지 조건을 중심으로 찾았기 때문에 바로 옆이 도서관인 것이 이사오기로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사하고 나서 몇 번 신나게 책을 빌리러 가기도 했는데, 금세 뜸해진 이유는 도서관이 바로 옆 이래도 울타리로 막아놔서 아파트를 돌아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돌아 간대로 걸어서 5분 정도 되는 거리지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도서관을 두고 멀리? 돌아가는 게 영 내키지가 않았다. 뭐, 그래도 마음 단단히 먹고 종종 책을 빌리거나 주말 아침부터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기도 했지만, 앞에 맛있는 케이크를 통째로 두고 손가락으로 살짝 크림만 찍어먹어야 하는 것처럼 답답함이 있었다.
헌데,
작년에 아파트에서 설문이 돌기 시작했다. 우리 동 바로 옆 울타리를 터서 도서관에 바로 가는 길을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찬성에 한 표를 던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 떡! 하니 옆문이 생긴 것이다. 야호!
도서관으로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도서관에 자주가게 되고, 책을 더 자주 빌려 보게 되었다.
그런데, 도서관으로 문을 트는데 나처럼 다 찬성을 하진 않은 것 같다. 울타리를 트고 문을 만들면서 층계 위에 지붕을 만들어놨는데,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어머님은 베란다 밖을 내다보면 보이는 그 지붕 색깔이 미관을 해친다고 불평을 하셨다. "저는 창밖을 자주 안 봐서 몰랐는데요.. 하하..."라고 우물우물 넘어가긴 했지만.. 나는 도서관 가는 길이 가까운 이 아파트를 좋아한다.
책을 빌리러 가면 읽고 싶은 의욕은 많아서 제한된 분량을 꽉 채워서 빌려온다. 물론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하는 경우가 많지만, 집안 여기저기에 '읽으리라!' 결심하고 빌려온 책들이 널려 있어서 꽤 읽게 된다.
도서관도 옆에 있고, 시간도 여유가 있어서 책을 많이 읽고 싶은 마음이 큰데, 거슬리는 방해물이 하나 있다.
언제부터인가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글씨가 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돋보기를 준비해 놓고 책을 읽을 때 쓰는데 그럼에도 시간이 더 지나면 글씨가 두 개로 보이면서 어느새 내 눈썹 사이엔 주름이 파이고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ㅠㅠ
지난 5월 수술을 한 후엔 이런 현상이 유독 심해져서 혹시 복용하고 있는 호르몬 약 때문에 눈에 다른 병이 온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호르몬 약 때문에 눈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는 부작용 이야기도 있고 해서 눈 검사 한지 몇 개월 안 됐지만 다시 안과를 방문했다. 내가 걱정했던 백내장, 녹내장이나 황반변성이 아닌 "노안"이라고 의사 선생님은 다시 한번 나의 노화를 확인해주었다. 딴 병이 아니라 노안이라 다행인 건지 씁쓸했다.
요즘은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쉬면서 시간도 나름 여유가 생기면서 도서관이랑 더 친해질 환경이 되었다.
오전에 가서 컴퓨터 작업도 하고, 책도 읽고, 점심 먹고 또다시 가서 책을 보다가 저녁 전에 집에 돌아오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도 든든해지고 기분도 좋아진다.
오늘도 다른 날 보다 오전 컨디션이 좋아서 바리바리 짐 싸서 도서관에 가서 자리를 잡았더랬다. 시작은 좋았는데 중간에 또 글씨가 두 개로 보이기 시작했지만 마침 안경은 또 집에 두고 와서 흐린 눈으로 책을 읽다가 점심시간을 넘겨서 집으로 와버렸다. 어휴.. 눈에 좋다는 영양제를 심각하게 챙겨 먹어야 할 시기인가.. 불로장생에 집착하던 진시황에게 심히 공감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