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창고방을 째려보는 것부터
세상 진리는 옛사람들이 다 말해버렸다. 그 중 하나가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내가 자꾸 미니멀라이프를 시도하면서도 실패하는 이유를 분석해봤다. 나는 어떤 순간 포기하지? 혹은 타협하게 되는 결정적 지점은 무엇이지?
일단, 마음은 비장하다. 꼭 하고 말리라! 나는 할 수 있다! 그리고 창고방 문을 연다. 아- 아득하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치워야하지. 갑자기 피곤해지면서 기분이 나빠진다. 큰일 났네. 나는 기분 나쁘면...막 나간다. 대책이 없다는 말이다. 어서 기분을 컨트롤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장 극약처방인 '책'을 꺼내든다. 읽는다. 재밌다. 읽는다. 너무 재밌다. 계속 읽는다. 재밌는데... 나 이거 계속 읽어도 되나. 시계를 본다. 어차피 아이 하원시간까지 창고방을 치우는 건 무리다. 그 순간- 에잇 모르겠다. 나는 본격적으로 책을 읽는다.
어제 김연수작가의 <소설가의 일>을 재독하다가 '가만히 두니 자꾸만 엉망이 되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글을 보았다. 엔트로니피 법칙에 의해서 우리의 글은 가만히 두면 엉망이 되어갈 수밖에 없으므로 퇴고를 해야 한다는 신박한 논리였는데 깔깔 웃었다. 아- 창고방은 철저히 엔트로니피 법칙에 맞게 가만히 두니 전쟁터가 되었구나.
퇴고를 하는 순서는 작가마다 나름의 노하우가 있겠지. 하물며 나도 글을 다 쓰고 나면 한 번 읽어보고 맞춤법이나 중복표현은 고친다. 그리고 영 부끄러운 글은 가끔 지우기도. 하지만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퇴고를 어마무시하게도 한다고 하니, 내가 좋은 창고방을 갖기 위해서는 정리정돈을 어마무시하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김훈작가처럼 단문이지만 깔끔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는 그가 문장에서 이미 퇴고를 마치고 창작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상상도 해본다. 진실은 작가만이...
타협하는 게 '기분 전환을 위한 독서'라는 점을 알았으니- 내가 타협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분이 나빠지지 않도록 계속 엔돌핀을 공급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나는 언제 기분이 좋지? 생각나는대로 써보자. 일단 재밌는 걸 보거나, 상상하거나, 창작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거나, 도움을 주거나, 주변사람들이 행복할 때 더불어 기분이 좋은 것 같다. 하나씩 적용해서 나의 엔돌핀 게이지를 올려야겠다.
1. 재밌는 걸 본다.
본다는 건 흥미롭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재미있으면 무척 매력적이다. 게다가 재밌는 걸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독서’다. 책을 읽는다는 건 텍스트를 보는 행위인데 그 텍스트가 평소 읽는 진부한 조합이 아니라 참신한 전개로 나아가면 자연히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고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한마디로 환장한다. 그러므로 미니멀라이프를 위한 엔돌핀 충전에 재밌는 걸 보는 건 '독서 삼매경'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으니 패스.
2. 상상한다.
상상하거나. 이게 좋겠다. 미니멀라이프가 실현된 방을 상상하는 건 즐겁다. 쌓인 짐들이 치워지고 창문을 열어서 환기시킬 수도 있다. 원하는 대로 방을 꾸밀 수도 있다. 이젤과 물감이 어우러진 아뜰리에로 할까? 전면책장이 있는 서재도 괜찮지. 아니면 만화작업을 할 수 있도록 본격적인 작업실을 꾸미는 거야! 이런 상상을 할 때면 홀가분함에 설렘이 더해져 더할나위 없이 기분이 좋다. 그런데 '어떻게?'하는 순간 막막함에 다시 시부룩하다. 상상은 실현 가능할 때 설렘이 더 오래 유지되는 법이다. 뭔가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을까?
3. 창작한다.
창작하거나. 가만 보니 이건 <여신강림>급 판타지스토리인 것 같다. 공간을 정리하여 작업실로 만든다는 가정 하에, 이토록 멋진 작업실(상상 속엔 그렇다.)이 사실은 매우 엉망진창이었던 창고방이었다는 말이잖아? 진짜 그렇게 만들 수만 있다면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했을 뿐인데 대박 스토리를 건지는 건가. 이게 바로 도랑치고 가재잡는다는 그 상황? 야나두 할 수 있어!
4. 문제를 해결한다.
게다가 난 평소에도 작업실을 갖고 싶어 했다. 작업이란 모름지기 작업실이 있어야 시작하는 법!(아- 그래서 내가 여태껏 작업에 진전이 없었던 것인가!)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면서 공간을 비워서 내가 필요로 하는 공간으로 재구성하기만해도 내 꿈을 향한 발걸음에 한 발 더 가까워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상상하고 창작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니 이거 매우 기분 좋다. 아- 역시 상상은 너무 행복해. 하지만 남편이 오면, 도대체 이 창고방은 발 디딜 틈이 없다고 잔소리를 하겠지.
5. 도움을 준다
아 선량한 아내로서 더불어 사는 남편의 정신건강에 심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잔소리는 스트레스의 발산인데, 잔소리가 멈추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스트레스도 멈추지 않고 주입된다는 거니까 남편도 힘들긴 힘들 거다. 맺고 끊는 법이 정확한 남편은 버리는데도 속전속결인데 그와 달리 나는 이상하게 물건에 연민과 미련이 많다. 혼자라면 어떻게 살아도 괜찮지만 함께 사는 이상 그에게 도움을 주려면 방법은 단 하나! 상상을 현실로 만들 필요가 있다. 먼저...가장 먼저. 저 창고방문을 열자! 그리고 바라보는 거다. 옴마니반메훔....불쌍한 중생을 도와 이 험난한 창고방 정리 여정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옵소서.
6. 주변사람들이 행복해 한다.
계획대로 정리를 무사히 마쳐 내게 작업실이 생긴다면, 아마도 나는 무척 기쁠 것이고 (몇 년 동안 도전했지만 성과가 없었던 숙원사업을 드디어 해결하는 홀가분함 이랄까.) 내가 기쁘면 남편도 아들도 덩달아 엄마가 기분이 좋으니 뭔지모르게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한 사람의 행복은 주변의 행복을 퍼트리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미니멀라이프는 가족의 행복바이러스가 되어 나의 ‘미니멀라이프 도전기’는 해피앤딩으로 마무리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아주 기분이 좋아지는 상상이다.
그리고 창고문을 열어 놓은 것은 현실. 과연 나는 창고방을 정리할 수 있을까? 사실 사람은 가만히 있는 게 진짜 어렵다. 시간 한 번 재보면 안다. 멍 때리기 잘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불안증과 조급증을 달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걸 잘 못한다. 그래서 기대하는 바. 창고방 정리를 목표로 하고 그 외에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반드시 창고 쪽을 향하여 움직일 것이다. 아마도? 사실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엄두가 안 난다. 그러나 진리는 이미 말해졌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