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와! 내가 정리해줄테니까
어제 드디어, 전쟁터에 입성했다. 제일 먼저 방문을 열고 창고방을 스캔한 뒤에 '옴마니반메훔.'하고 한 숨을 내쉬고는 사진을 찰칵 찍었다. 세상 부끄러운 사진이라- 찍고도 어디 공개할 수 있을까...했지만 그래도 기록의 의미로 찍었다. 그리고는 일단 세탁세제 찾기 미션을 시작했다. (세탁세제가 다 떨어졌는데 도무지 창고방에서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보이는 바닥에 발꿈치를 들고 폴짝폴짝 고개를 넘어 세탁세제가 들어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봉지들을 뒤적거렸다. 검은 비닐 안에는 그동안 못 찾아서 못 먹었던 곱창김이 있었고, 또 다른 박스에는 어울리지 않게 '과자 먹으면 밥 안 먹는다'는 원칙주의엄마 코스프레를 해야 했던 잃어버린 아이의 쌀과자가 있었다. 그리고 겨울이라 생명을 부지한 배도 귤도 고구마와 빵까지- 밖에 좀비가 나타나도 일주일은 버틸 것 같은 오래된 식량이 안 썩고 고이 잘 모셔져 있었다. 언제 다 찾지...하는 우려와 달리 뒤적뒤적 거리자 세탁세제는 금방 그 모습을 영롱하게 빛을 내며 드러났다. 우와앗 이 재회의 감격을 어찌 설명하리오!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한달음에 청소를 시작했다.
먼저 시작은 창고를 채우고 있는 물건을 들어내는 것부터 했다. 왜냐면- 발을 디뎌야 하니까. 그러자 금세 거실이 초토화되긴 했으나, 목표는 창고를 비우는 게 아니라 정리하는 것이므로 크게 안달하지 않았다. 왜냐면 거실의 물건을 다시 창고로 넣으면 거실은 원상복구 되니까. 정리정돈의 법칙은 간단하게 3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정리할 구역을 정하여 그 구역의 물건을 모조리 뺀다. 두 번째, 꺼낸 물건을 살펴 성격에 맞게 분류한다. 세 번째, 물건을 제자리에 다시 넣는다. 여기서 두 번째 꺼낸 물건을 살펴 분류하는 게 중요한데, 여기서 정리 고수들은 물건을 닦거나, 고치거나, 더 이상 쓸모가 없으면 비운다. 하지만 하수들은 물건을 비워야한다는 조바심에 물건을 꺼내는 일조차 두려워한다. 나는 이 차이점을 터득한 것이다! 움화화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첫 번째 단계인 물건 꺼내기는 다 했고 두 번째 단계인 물건을 분류했다. 그리고는 내가 가진 물건의 성격에 라벨을 붙여 모두 몇 박스가 나오는지 봤는데 대략 이러했다.
남편 추억물건 2
나의 추억물건 2
남편 공구함 1
아기 물건 6
카메라 및 디지털제품 1
창업관련 물건 2
영어관련 도서 1
창업관련 도서1
총 16박스가 ㄷㄷㄷ 그 중에서 아이관련물건이 6박스다. 결국 나는 둘째 아기를 갖고 싶은 욕심과 육아비용을 아낄 요량으로 첫째 아이의 옷을 미리 받아 이고지고 있는 탓에 육아용품이 제일 많았다. 그다음 창업관련 물건과 도서가 3박스였는데.... 나는 무슨 스티븐잡스가 될 거라고 창업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걸까. 창업도서만 1박스를 차지하는 걸보니 난 정말 뭐든 배울 땐 책에 많이 의지하는 게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공부해도 실전은 이론과 달라서 내 첫 창업은 실패하고 말았다. 나중에 실패한 창업기 이야기도 써봐야겠다. 아무튼 실패한 영역에 있어서 확실한 정리는 필요하다. 창업에 대한 미련 때문에 못 비운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이게 정리되지 않으니까 창업에 미련이 남는 건지도 모르겠다. 영어도 참 고질적이다. 굳이 영어를 공부해야할 직접적인 이유는 없지만, 훗날 아일랜드에 가서 친구라도 한 명 사귀려면 영어정도는 유창하게 해야한다는 약간의 허세가 있다. 그래서 영어 관련된 서적만 한묶음 모아놓고 공부는 뒷전이니- 이 책을 공부해서 치우든 그냥 속시끄러우니 치우든 결단을 내야겠다. 또 철지난 디지털제품들을 보니 정작 쓰는 건 폰이랑 노트북 밖에 없는데 내가 이렇게 장비가 많은 사람이었구나. 하면서 겸허히 반성하게 된다. 몇 번 쓰지 않는 장비는 중고물품을 파는 것을 고려해봐야겠다. 마지막으로 추억물건은 언젠가 정리하겠지만 일단은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그밖에 밖에 나와있는 물건은 가전제품(건조기,전기레인지,냉장고<-모두 창업의 잔재), 미술용품(붓,파레트,오일파스텔,물감,색종이 등등 아이 덕분에 요즘 열일한다.) 캠핑용품 (돗자리,의자 전부 은근 부피가 있다.), 선풍기2대(정말 고장 안나는 가전 중 하나인듯), 무,양파,쌀 등등이 있다.
일단 아이용품을 포기하면 6박스는 그냥 사라질 것 같다. 그리고 창업도 포기하면 3박스도 줄어든다. 게다가 디지털장비들도 실상 잘 안 쓰니까 포기하고, 평생 숙제 같은 영어책도 모두 버리면 11박스는 줄어들고- 그 11박스만큼의 공간이 확보될 수 있다. 아- 근데... 10박스의 공간이 내게 그토록 필요한가. 단지 공간을 갖고 싶어서 나는 나의 욕망을 포기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보니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일단- 또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분류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나온 물건을 넣기 시작했다. 포기보다 남겨야 할 것을 찾는 게 더 기분이 좋았을 텐데 접근을 잘못한 것 같기도 하다. 다음에 창고방을 뒤집으면 포기하는 것보다 남기고 싶은 것을 먼저 골라서 기분 좋은 비움을 하도록 유도해야겠다. 어쨌든 분류에 맞추어서 다시 넣으니 같은 공간이 (한 박스 정도 물건을 비운 것 뿐 인데도) 무척 넓어졌다. 아- 이것이 정리의 기적인가! 하며 혼자 뿌듯해하다가 남편에게 자랑했더니 남편 왈.
"뭐가 달라졌어?"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반응이 구릴까. 내가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정리정돈을 열심히 했다고 어필하니, 그러냐면서 시큰둥하게 휴대폰을 보며 밥을 먹는다. 아 정말... 그래도 국 한 그릇 더 주고 싶은 걸 보면, 나만 사랑하는 게 맞다. 확실하다. 젠장 결혼하고 짝사랑하는 듯한 이 비참한 기분은 뭘까.
오늘 정리 작업은 내가 가진 물건의 성격을 이해하고 개수를 인지했다는 점에서 큰 성과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 문을 열고 뭐라도 해보겠다며 두 팔을 걷어 부친 덕분이 아니었을까. 이번 계기로 말미암아 엄두가 안 나는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전쟁터 같은 창고 방에 입성하던 오늘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비록 무딘 내 남편은 알아차리지 못한 작은 변화였지만 방을 가득 메운 물건들을 꺼냈고 그 물건들을 분류했으며 물건들이 모인 박스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려주었으니 이는 절대 전과 같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도전은 내게 큰 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