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1)

카이사르와 크레오파트라

by 산내



인류 최초 그리고 최대 문명의 발상지인 중동에서 발현한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중동 지역 내 문명 교류의 산물이다.

유럽의 십자군 전쟁이 있기 전까지 이 종교는 형제의 종교였다.


기원전 1250년경 모세가 죽은 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 땅에 들어가 통일 왕국의 기초를 세웠고

200-250년에 걸쳐 부족연합의 시대를 거쳐 사울을 초대 왕으로 추대했으나

취임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고

서른 살에 왕이 된 다윗이 북쪽의 10개 부족을 통합해

사상 최초의 통일 왕국을 세우는데 이때가 기원전 993년이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 왕 통치시절

이스라엘은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했고

40여 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솔로몬은 기원전 926년 숨졌다.



고대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상부 마케도니아와

저지대의 본토 마케도니아로 나누어져 있었다.

마케도니아 왕가는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서야 그리스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데

필리포스 2세(재위기간 기원전 359-336)가 주위 민족들을 정복하면서 급속도로 국력이 신장되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필리포스 2세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해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맡겼고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을 떠날 때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기원전 334년 봄,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기원전 332년 1월 이집트는 무저항 백기 투항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맴피스에서 파라오 대관식을 치렀고

나일 텔타의 서쪽에 처음으로 식민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불과 12년 만에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땅을 수중에 넣었고

인도의 일부 지역에까지 지배 영역을 넓혔다,

알렉산드로스 죽은 후 마케도니아 왕국은 기원전 214-167년 사이

로마로부터 세 차례 침공을 당했고

그 후에 일으킨 저항운동마저 진압되면서 기원전 147년에는 로마의 속국으로 전략했다.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기원 51년, 프롤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 왕위에 오른다.

당시 이집트 왕조에는 형제자매끼리 결혼해 공동 통치하는 풍습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18세, 프롤레마이오스 13세가 10세 때의 일이다.


당시는 로마 공화정이 끝나갈 무렵으로

로마 정권의 향방은 크라수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3명의 세력 다툼에 달려 있었다.


기원전 53년 페르시아 원정 중에 크라수스가 전사하자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로 군대를 진격시켜 폼페이우스를 압박했고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버리고 이집트로 도망쳐서 프롤레마이오스 13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프롤레마이오스 13세와의 파벌 싸움에서 패해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시리아 국경 부근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프롤레마이오스 13세의 측근들은 폼페이우스의 요청을 받아들이면

로마를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

교묘하게 폼페이우스를 살해한 후 뒤쫓아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목과 반지를 바쳤다.


대머리를 고민했던 카이사르는 호색을 탐하고 방탕했다.

카이사르의 여성 편력에 관해, 원로원 의원의 1/3은 아내를 카이사르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역사자가 있을 정도이다.


이 중에는 삼두정치 체제로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던 크라수스의 아내 테르투라,

폼페이우스의 아내 무키아,

폼페이우스의 부관이었던 가비니우스의 아내 로리아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카이사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부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였고

20년 가까이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둘의 관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남동생 프롤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쳐들어온 카이사르를 만나려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어둠을 틈타 조각배를 타고 왕궁에 잠입한 뒤

하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담요로 싸서 밧줄로 묶어 짐짝처럼 들고 들어가게 했다.


담요를 풀어헤치며 카이사르 앞에 나타난 클레오파트라의 지성과 매력에 카이사르는 반했고

남동생 프롤레마이오스 13세와 화해시키고 왕위를 공유하도록 했다.


그러나 프롤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추종자들이 카이사르의 개입에 반발해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카이사르 군은 초반에 적은 병력 때문에 고전하다가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까지 불에 타게 되었지만

소아시아에서 이집트로 원정군이 도착하자 싸움은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보다 열세 살 어린 남동생 프롤레마이오스 14세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지만,

실질적인 클레오파트라의 왕정이 시작되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제거함으로써 독재관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46년 독재관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했고,

기원전 44년 2월에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로마에서 카이사르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회의장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

공보자들은 카이사르를 들러 쌌고,

그중 한 사람이 카이사르에게 다가가 그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이것을 신호로 사방팔방에서 카이사르를 향해 칼끝이 겨누어졌다.

카이사르는 모두 23군데나 칼에 찔렸고

이 중에는 세르빌리아의 아들 브루투스도 있었다.

“브루투스 너마저도!”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 공모자들을 제거하고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유혹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42세, 클레오파트라는 28세였다.

쾌활하고 소탈한 성격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피트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 후 수개월간 두 사람은 정치를 떠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랑에 빠져 지냈다.

안토니우스가 떠난 후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라는 쌍둥이를 낳았다.


기원전 37년 가을 클레오파트라를 잊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불러들여 정식으로 결혼했고

키레네와 키프로스를 이집트에 반환하고

새롭게 페니키아, 시리아, 실리시아, 크레타 등 로마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어

그녀를 ‘모든 왕의 여왕’, ‘왕 중의 여왕’으로 불렀다.


이 말을 들은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며

안토니우스를 이집트 여자에 정신이 나가 돌았다고 수군거렸고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그 유명한 악티움 해전을 치렀다.


대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기울었고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자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클레오파트라도 그 뒤를 따랐다.

이렇게 로마 역사에 얽히었던 클레오파트라는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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