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나 고생만 시키는 남편의 엉터리 심리학 1

열정기 회귀본능

by 작은별송이

*워킹맘인 아내와 프리랜서로 일하는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글쓴이 마음대로 심리학적 관점을 들이댄 이 글은 정통 심리학과 별 관계가 없습니다.



“연애하고 싶어.”


아내가 삼십대일 때 이따금 던진 말이다. 주로 텔레비전에서 소지섭, 조인성 같은 멋진 연예인을 보면서 꿈을 꾸듯 웅얼거렸다. 처음에 나는 결혼 전 우리의 연애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아내의 말은 진짜 소지섭이나 조인성과 연애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어떨 땐 꽃미남 배우가 아닌 미지의 대상이 연인 후보였다. 연인의 자리에 내 자리는 없었다.

참뜻을 알고 섭섭하지는 않았다. 의외라는 생각이 컸다. 연애하는 동안 잘해 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함께 낭만을 누렸다고 은근히 자부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우리는 1년 반 정도 연인으로 지내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 소소한 다툼은 있었지만 예쁘게 연애했다. 아내도 나와의 연애가 행복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왜 딴 사람과의 연애를 꿈꾸는 걸까?


아내는 스물여덟에 면사포를 썼다. 2007년, 그 무렵에도 삼십대에 결혼하는 여성이 많았으니, 이른 나이에 결혼한 편이다. 신혼의 유효 기간에 대한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3년 남짓이 아닐까 싶다. 3년이 지나니까 생계 걱정이 아내와의 달콤함을 삼켜버렸고, 어느 순간 신혼이란 낱말이 낯선 외국어처럼 들렸다.

아내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겠다. 언젠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부질없이 느껴져 묻어 두었다. 신혼의 시간을 무 자르듯 딱 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명하기 힘든 서글픔마저 배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내 맘대로 짐작을 해본다면, 아내의 신혼은 2년 남짓이 아닐까 싶다. 연애하고 싶다는 말을 뱉은 그 순간까지.


“왜 나랑 연애하고 싶은 게 아닌 거야?”


한때 이렇게 묻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그 마음도 꾹 눌러 삼켰다. 아내가 날 사랑하고 그 사랑이 내게 행복을 주는데, 굳이 아내만의 상상의 세계를 넘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내는 상상 속에서 연애를 즐길 테고, 그 안에서 누구와 연애하든 아내의 자유였다. 게다가 나 역시 아내에게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아내에게서 연애하고 싶다는 말을 서너 번쯤 들었을 때 했던 걸로 기억한다.


“여대생이랑 커피 한잔하면서 얘기 좀 나눠 봤으면 좋겠어. 요즘 이십대 여성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그냥 알고 싶네.”


이때 아내는 내게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 내 소망을 이해해 주겠다는 웃음이었다. ‘어떤 여대생이 너랑 커피를 마시겠니?’라는 무시도 살짝 섞인 듯했지만.


아내는 소지섭과도 조인성과도 끝내 실제 연애를 못 했다. 그리고 아기를 낳았다. 일과 육아를 나란히 하는 삶을 살면서 드라마와 멀어졌다. 나도 일과 육아에 매달리면서 여대생과의 티타임은 아기 기저귀에 싸서 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도, 나도 삶보다는 생활에 더 몰두했다. 연애나 티타임처럼 생활에 도움 안 되는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기가 둘이 되면서 생활을 우선하는 상황은 한층 더 단단해졌다. 그렇다고 부부 사이가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내는 아빠인 나를, 나는 엄마인 아내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우리는 나름의 사랑을 쌓았다. 연인이나 신혼부부의 사랑과는 모양과 빛깔이 다른, ‘중고부부’의 ‘생계형 사랑’이라고나 할까?


2022년은 별아가 열두 살, 수인이가 일곱 살 먹게 된 해이다. 아내가 사십대 중반을 향해 발을 디딘 해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드라마를 본 해라는 의미가 있다. 본디 드라마를 거의 안 보는데,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시간적 배경 때문에 호기심이 동했다. 그 시간적 배경은 IMF 시기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로 잡을 수 있다. 나의 경우 군 제대 후 대학 복학 시점부터 사회 초년생 시절까지에 해당한다. 나로서는 꿈을 위해 모든 걸 던졌던 시간이다. 그 시간을 내게 불러온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힘겨웠던 시기 꿈과 사랑을 이루려 몸부림쳤던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내 가슴에는 사랑 부분은 빼고 꿈에 대한 부분만 깊이 꽂혔다. 그 시절 나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도 버거워 사랑에는 눈을 꼭 감고 살았다. 모든 열정을 작가라는 꿈에 쏟았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아내는 안 보고 나만 보았다. 아내는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해 보지 않았다. 아내는 <오징어 게임>이나 <괴물>처럼 스릴 있는 장르를 좋아한다. 아무튼 나 혼자 열심히 드라마를 보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혹시 아내도 저때 김태리처럼 살았을까?’


여자 주인공 김태리는 펜싱이라는 꿈을 위해 자신을 불태운다. 그 뜨거움 속에서 사랑도 포기하지 않으려 애쓴다. 펜싱도, 사랑도 간절히 원하기에!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은 아내에게는 파릇한 열아홉부터 물오른 이십대 초반까지의 시간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스물한 살까지로 정해진 김태리의 시간과 많은 부분 겹친다.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내 기억의 서랍이 스르륵 열렸다. 연애하고 싶다던, 삼십대 아내의 발그레한 얼굴이 되살아났다.


열정만으로 살던 시간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세상 모든 이에게 확인한 적은 없지만 적지는 않을 듯싶다. 일단 나는 그랬다. IMF 때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열정만으로 살았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손에 아무것 쥐어지지 않아도 열정으로 이겨내며 앞날을 그렸다. 곰곰 돌이켜보면 이때는 내가 책임질 것이 적었기에 열정만으로 사는 게 가능했으리란 생각도 든다. 냉정하게 말해 내 한 몸 건사하는 일만 신경 써도 큰 문제가 없는 나이였고, 시간이었고, 환경이었다. 가정을 꾸린 뒤엔 열정만으로는 도저히 살기 어려웠다.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내도 같은 시간대에 나처럼 열정으로 스스로를 달구며 살지 않았을까? 삼십대의 아내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 열정의 시간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그 그리움 속에 진한 사랑이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연애하고 싶다는 말로 넌지시 표현했을 거다.

애잔하다. 사십대를 살고 있는 아내는 그런 표현을 할 겨를조차 없을 만큼 바쁘고, 또 피곤해 보여서. 혹시 아내가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본다면 표현할 힘이 불끈 샘솟을지도 모르겠다. 남자 주인공 남주혁이 정말 멋지고 잘생겨서.


“여보, 나 남주혁이 진짜 부러워. 키도 크고 잘생겨서. 나한테는 넘사벽이야.”


이건 내가 아내에게 실제로 했던 말이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남주혁을 향한 부러움을 억누르느라 정말 힘들었다.


‘열정기(熱情期) 회귀본능.’


나는 내 멋대로 아내의 연애 욕구를 ‘열정기 회귀본능’이라 정의한다. 내 마음속에도 이 본능이 가끔 꿈틀거리는 것이 정의의 근거다. 열정만으로 살았던 시간이 때론 그립다. 아내도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우린 부부니까.

한마디만 덧붙여야겠다. 이제는 은근슬쩍 질투가 날 것도 같다. 아내가 남주혁을 보고 “연애하고 싶어.”라고 말한다면. 질투의 이유는 똑 부러지게 설명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