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성숙 집착증
우리 동네 좋은 점은 공공놀이터가 많다는 거다. 놀이터 주변 주민들은 시끄러워서 싫어할 수도 있지만, 아이 키우는 부모들과 어르신들은 대부분 좋아한다. 공공놀이터는 아이들 놀이기구만 있는 게 아니라 간단한 운동기구, 정자 등이 마련되어 있어서 어르신들에게는 피트니스센터와 쉼터가 된다.
나도 놀이터 주변 주민이다. 공공놀이터가 코앞이라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놀이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코딱지만 한 크기인데, 그네, 미끄럼틀, 운동기구, 정자 있을 건 다 있다. 놀이터 풍경은 시시때때로 바뀐다. 아이들이 바글바글 할 때, 텅 비었을 때, 비에 젖어갈 때, 눈이 쌓여갈 때 다 느낌이 제각각이다. 빛깔 다른 풍경들은 여러 상념과 추억을 불러오거나 그저 미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놀이터를 바라본다. 저절로 눈이 가기도 하고, 일부러 눈을 주기도 한다.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에 나가 풍경을 눈에 담기도 한다. 그냥 그게 좋다.
놀이터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시간대에 따라 찾는 이들이 달라지는 규칙이다. 이른 아침에는 어르신들이 운동을 하거나 정자에서 쉰다.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는 보통 어린이집 아이들이 놀이터를 차지한다. 선생님과 함께 꺄악꺄악 소리 지르며 신나게 논다.
한낮의 놀이터 손님은 초등학생들이다. 오후가 깊어지면 중고등학생들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덩치 큰 남녀학생들이 유치원 아이들처럼 깔깔대며 노는 모습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이따금 담배를 피우는 학생도 있는데, 그 모습이 보기 좋지는 않지만 눈꼴사납지도 않다. 학생들도 해방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냥 두고 본다. 다만 집에서 뛰쳐나가 학생들을 말릴 준비는 늘 하고 있다. 누군가 담배 피우는 걸 지적했을 때 대들었을 경우 행동할 생각이다. 그것까지 두고 볼 수는 없다.
캄캄한 밤이면 청장년들이 놀이터로 흘러들어온다. 술담배를 하거나, 키스도 나눈다. 연인들이 키스를 나눌 땐 살금살금 베란다를 떠난다. 왠지 연인들을 방해하지 않는 게 내 몫인 것만 같아서 그런다.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 1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마음을 꾹 눌러삼킨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놀이터 손님이 바뀌는 풍경은 나를 진지하게 만든다. 그 풍경을 거듭 보면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공간에 있어야 행복을 얻는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놀이터 손님 가운데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시간에 놀이터를 찾을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래도 억지로 놀이터라는 공간에 떠밀려 온 사람은 극히 드물지 않을까 싶다. 조그만 안식이라도 얻고 싶어서, 숨통 좀 틔우고 싶어서 제 발로 걸어온 사람이 대부분이라 짐작된다. 사람에게는 그걸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 생각을 하면서, 나는 픽 웃었다. 나에 대한 경미한 비웃음이었다.
‘나이 좀 먹었다고, 굳이 의미를 찾아내려 하네?’
놀이터에서 어떤 의미를 건져내려 한 스스로가 웃겨 보였다. 철학자도 아니면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철없는 짓, 나잇값 못하는 언행을 반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남들이 철들고 성숙하기를, 우리 대다수는 은연중에 요구한다. 손가락질하고 나무라고 기피하는 행동의 바탕에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요구가 깔려 있는 법이다. 이런 면에서 철들고 성숙해지는 건 일종의 의무 같다.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생활과 대인관계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다들 싫어하니 말이다.
사십대의 저물녘인 탓일까. 내 마음속에 그 의무감이 점점 자라나는 느낌이다. 오십에 이르면 완전한 성숙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갈수록 커져간다. 그래야만 사람 구실 한다는 인정을 받을 것 같고, 내 자신에게 만족할 것 같다. 이런 나를 ‘완전성숙 집착증’에 걸렸다고, 나는 진단한다.
나이 들어 몸의 눈이 어두워지면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깨달음의 능력이 커진다는 뜻일 터이다. 물론 나이 먹는다고 깨달음이 저절로 찾아올 리는 없을 거다.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닦고 인격을 기르는 일이 따라야만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나도 노안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의 눈이 밝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그래서 조바심 난다. ‘완전성숙 집착증’이 더 깊어질 조짐만 보이고 있다. 이런 병은 어디서 고칠 수 있을까?
다만 한 가지 다짐을 해본다.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이 쌓이더라도 절대 자랑하지 않겠다는. 아랫사람에게 내세우고 강요하지 않겠다는. 그건 꼰대나 하는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