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치고 싶지 않은 동네 아저씨의 엉터리 심리학 9

역할충실 기대 심리

by 작은별송이

나는 프리랜서라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덕분에 집안일을 거의 도맡는다. 그중 재활용 쓰레기 분리배출은 나의 주요 임무 중 하나다.


우리 아파트에서는 경비원 아저씨가 분리수거를 담당한다. 주민에게 분리배출을 안내하고, 환경업체가 재활용 쓰레기를 치워갈 수 있도록 쓰레기수거함을 정리한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소박한 편이다. 4개 동뿐이라 많은 세대가 살지 않는다.

세대가 적어 경비원의 수도 적다. 몇 분 안 되니까 전임자가 퇴직하고 새로운 분이 오더라도 금방 얼굴을 익힌다. 특히 재활용 쓰레기 분리배출을 몇 번 하고 나면 자연스레 경비 아저씨와 안면을 트게 된다. 인사를 하면, 경비 아저씨들 모두 반갑게 받아주니까 서로 알게 되는 거다.


나는 재활용 쓰레기를 가지고 나갈 때 가끔 음료수를 챙긴다. 수고하는 경비 아저씨에게 드리는 보잘것없는 선물이다.


음료수를 드리면 어떤 분이든 한결같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걸 주시나요? 잘 마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몇 호 사시나요?”


고작 음료수 한 병에 격하게 감사를 표하니 도리어 내가 무안할 정도다.


경비 아저씨들 가운데 오래 일하신 분이 한 분 있다. 내 기억에 8년쯤 근무하신 것 같다. 참 점잖고 성실하고 푸근한 분이다. 오래 일하셨기에 동료들 중 나한테 음료수를 가장 많이 받으셨다. 이젠 안 그러셔도 되는데, 여전히 음료수를 받으면 ‘격하게’ 감사를 전하신다. 아내와 나는 그분을 ‘교장선생님’이라 부른다. 안경이 잘 어울리는 외모, 말투 등이 교장선생님 같아서 우리끼리 나누는 별명을 지은 거다.


올 여름 교장선생님이 나에게 선물을 주셨다. 그 선물이란 바로 살구 한 봉지다. 아파트 단지에는 살구나무가 여러 그루 있는데, 해마다 부녀회에서 살구를 거두어 좋은 일에 쓴다. 어느 날 고물컴퓨터 폐기에 관해 말씀드리러 경비실에 갔었다. 그날 마침 여름걷이를 한 날이어서 경비실 옆 돗자리에 살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부녀회원들은 썩은 살구를 골라내고 바구니에 잘 익은 살구를 담느라 분주했다. 교장선생님도 부지런히 일손을 돕고 있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폐기물장에 컴퓨터 내놓은 거 말씀드리려구요. 동사무소에서 폐기물 스티커 사서 붙여놓았어요.”

“잘하셨습니다. 제가 나중에 확인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교장선생님이 바빠 보여 나는 얼른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아저씨가 “잠깐만요!” 하며 급히 나를 불러세웠다.


“예? 무슨 일로……?”


아저씨는 대답 없이 검은 봉지에 서둘러 살구를 담았다. 봉지를 채우자마자 내 앞에 덥석 내밀었다.


“가져가서 드세요!”

“아이구, 아니에요. 이거 제가 받으면 안 되죠. 아파트 재산인데.”

“괜찮아요. 날 더운데 얼른 들어가세요.”


그 순간 감이 딱 왔다.


‘아저씨 몫을 따로 떼서 나누어주신 거구나!’


그렇다면 사양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주시는 거니 그저 감사히 받는 게 예의인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꾸벅, 허리 굽혀 인사를 올린 뒤 총총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살구 선물을 받고 며칠 뒤였다. 외출하려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복도에 물이 흥건했다. 1년쯤 전에 새로 오신 청소원 아주머니의 작품이었다. 아주머니는 대걸레를 꼭 짜지 않고 걸레질을 해서 번번이 복도를 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물바다라는 표현이 좀 지나치긴 한데, 복도 군데군데가 물이 고일 정도니 심한 과장도 아니다.


나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지라 이전 청소원 분들과 비교를 하게 되었다. 지금 청소원 분은 상대적으로 청소에 무성의했다. 청소를 해도 엉킨 먼지나 벌레 사체 따위를 종종 남겨두셨으니까. 무엇보다 가장 고역은 역시 물바다 복도였다. 미끄러질까 봐, 물이 튈까 봐 조심조심 걸어야 할 정도이니…….


그렇다고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넣거나 청소원 아주머니에게 직접 항의하는 건 또 못할 짓이었다. 연세 많은 분이 생계를 위해 청소일을 하시는데 민원이나 항의는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은 기분이 제법 상해버렸다. 그날따라 습도도 놓았는데 평소보다 더 물기가 많아서 그랬다. 그냥 참고만 지내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었다.


‘아주머니한테 음료수도 드렸는데, 청소 좀 잘해 주시지…….’


나는 청소원 분들에게도 음료수를 드리곤 했다. 지금 청소원 아주머니 또한 내게 음료수를 받고 환한 웃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다음에 뵈면 대걸레에 물기 좀 빼달라고 정중하게 부탁드릴까? 음료수 드리면서.’


나는 이런 고민을 하다가 흠칫했다. 그동안 경비 아저씨와 청소원 아주머니에게 음료수를 드린 나의 행동이 순수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서였다.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내가 내 뒤통수를 때린 기분이랄까?


음료수는 순수한 선물이 아니었다. 경비 아저씨와 청소원 아주머니가 맡은 바 일을 잘해 달라는 요구를 담은 선물이었다. 그 얄팍한 의도를 나는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다. 그저 수고에 감사하다는 뜻을 담은 선물이라고만 믿어 왔던 거다.


이 충격적 경험을 겪고 ‘역할충실 기대 심리’라는 표현을 지었다. 이건 남이 본인의 역할을 잘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내가 좋고 편하려고.


역할충실 기대 심리를 자각하고 이젠 음료수를 드리지 말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있다. 다만 예전과 달리 번번이 가슴이 찔린다.


여하튼 경비원 아저씨도, 청소원 아주머니도 여전히 감사해 주시니, 나도 ‘여전히’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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