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도 지나고 6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5월이 바쁜 1 달이었습니다. 늘 5월은 분주하게 흘러갑니다. 시골에 어머니를 모셔드렸습니다. 물론 며칠 전 다시 형님께서 다시 서울로 모셔갔고요~. 한평생을 지내셨던 곳에서 이제는 떠나 계셔야 하지요.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읍내이기에 예전에는 좋은 위치였던 그곳에서요. 이번 길은 그 집을 정리하기 위함과 어머니의 짐과 살던 곳에서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였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자신이 원하던 대로 시장에서 점포를 세를 주기도 하시고 본인의 점포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신 어머니에게는 집은 잠을 위한 공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정정하시지만 다리가 불편하시기에 잠을 위한 공간은 이제 제 역할을 하지 못하지요~. 30여 년의 가득 찬 짊과 화분들은 사다리차와 친척분이 소개하신 인부들의 일당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요~. 사실은 저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분이시기도 하지만 남편의 어머니 시기에 완전한 거리는 힘들지요. 15년 했으니 이제는 똑순이 따님(저의 형님)이 모시니 저는 이 거리가 완전 비난은 아니라고 혼자 정당화합니다.
6월은 저의 어머니가 떠나신 날입니다. 벌써 12년이 되가지요~ 며칠 전 납골당에 다녀왔습니다. 12년 전에도 저는 엄마의 떠나신 삶을 정리해드렸습니다. 요양병원에서 깨어나지 못하시고 2년을 누워계시다 떠나셨었습니다. 본인의 원하는 대로 자식보다는 본인의 삶이 중요하셨던 엄마였는데 삶이 마지막으로 가고 있을 때는 그 정리를 할 사람은 저밖에는 없었네요. 지금 생각해도 시댁의 도움 없이 저만의 힘으로 정리를 해서 저의 지금의 의도적 거리두기는 저 자신에게는 정당화됩니다. 그때도 지금도 동생은 아직도 목놓아 울었습니다. 동생과 한 살 차이인 저는 언제부터인가 눈물이 메말라 여간한 일에는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눈물보다는 닥쳐진 현실을 극복하려 합니다. 동생 내외와 오랜만의 점심을 하고 조금은 편안한 오후를 보냈습니다. 코로나 즈음부터 3년간의 조금은 파란만장한 일상들을 떠올렸습니다. 짧지 않았던 터널을 건너와 다시 마주한 현실에서도 늘 어려움은 있습니다. 내 어깨의 무게에 남편의 어머니도 계시고요~. 나의 동생도 자리하려 하지만 밀어내는 중입니다. 저는 지금도 과부하입니다. 짊어질 수 있는 만큼만 지려 합니다. 주저앉으면 소화할 수 있는 무게마저도 떨어뜨리니까요~. 저의 엄마와 대비해서 남편의 어머니는 아버님과의 사별 이후 본인의 뜻대로 그만하면 좋은 삶이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지신 것보다 허세와 본인의 뜻대로 때로는 눈물로 자식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면서요.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아마도 이번 서울로 오시는 길에 여러 느낌의 눈물을 흘리셨을 겁니다.
오늘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랜만의 일상을 기록합니다. 어제는 남편이 유명하다는 빵집의 파운드케이크 루주를 가져왔습니다. 새콤달콤 보통의 파운드보다 얇은 파운드 위에는 블루베리와 과일들 산딸기 잼일 것 같은 붉은 시럽으로 좋은 재료의 신선함이 있네요. 저에게 맛보게 해 주려 가져왔다는 파운드는 남편의 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겠지요~. 커피와 아침으로 한 조각을 먹고 이제 지난 5월과 6월을 보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