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설날에 대처하는 며느리의 자세

   82년생 김지영의 며느라기 보내기

김지영: 사부인, 쉬게 해 주고 싶으면 집엘 보내주세요. 사부인도 명절에 딸보니 반가우시죠? 저도 제 딸 보고 싶어요.
시어머니: 쟈가 지금 뭐라카노?
김지영: 제 딸도 보내주셔야죠. 시누이 상까지 다 봐주고 보내시니 우리 지영이가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시아버지: 애미야. 니 지금 뭐하는 기고?
김지영: 사돈. 저도 제 딸 귀해요





 어릴 적 우리의 설날은 고구마튀김의 고소한 냄새, 짭조름한 산적,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대령되어 나오는 과일과 떡의 달콤함으로 기억된다. 풍성한 먹거리로 가득 찬 배가 부르기도 바쁘게 뽐내던 설빔을 벗어던지고 사촌들과 오징어 게임 속 골목놀이들을 차례로 시연하며 뛰어다니느라 늦은 시각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설날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그뿐인가. 친척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꼬깃꼬깃 모은 세뱃돈으로 평소 오매불망하던 장난감을 살 수 있는 기회의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부녀가 된 우리에게 설날은 부담감과 피로감에 한숨이 절로 나고 명절증후군에 시달리게 만드는 화병의 날이 되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은 결혼 전 하던 일을 내려놓고 출산과 동시에 전업주부가 되었다. 육아 스트레스와 경력단절 등으로 정신병을 얻게 된 그녀는 스트레스 상황일 때 특정 인물이 빙의된 것처럼 말하는 증상을 보인다. 김지영은 이번 명절에도 어김없이 남편과 어린 딸과 시댁에 내려가서 차례 음식 장만과 설거지를 하느라 쉴 틈이 없다. 아내를 배려하는 남편은 김지영에게 짐을 다 쌌으니 이제 친정에 가자고 귀띔을 하지만, 이내 도어록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누이 가족이 들어온다. 시어머니는 시댁에서 고생했을 딸에게 편히 쉬라고 하면서,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김지영에게 “전 좀 데우고, 수정과도 함께 내어 와라. 니도 힘들면 방에 들어가서 쉬어라” 는 모순되는 말을 하고, 그런 시어머니에게 김지영이 친정엄마로 빙의해서  ‘우리 딸을 친정에 보내주세요’라고 일갈한다. 명절에 시댁 조상님들 차례음식 차리고 시댁 식구들을 맞이하느라 정작 친혈육의 얼굴을 보기 힘든 가부장제 사회를 살고 있는 유부녀들은 저 장면에서 깊은 공감과 함께 금기를 깬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우리가 차마 할 수 없었던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그 말들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김지영의 빙의된 입을 통해서 비로소 얘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주 가끔 빙의되지 않은 채로 용감한 며느리가 되어 시어머니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대체로는 남편의 옆구리 쿡쿡 찔러서 남편의 입을 빌어 말할 것이다. “어머니, 이번 명절에는 친정에 먼저 들렀다가 시댁에 가면 안 될까요? 애들 방학 동안 저희 집에 오래 머무르며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셨으니까, 이번에는 멀어서 명절에 자주 못 가 본 친정에 먼저 다녀갈게요”라고. 시어머니는 말씀하실 거다. “안 된다. 시댁이 버젓이 있는데 명절에 친정을 가다니. 그런 법이 어딨냐” 고. 물론, 반드시 시댁을 먼저 가고 친정을 나중에 가야 된다는 법은 없다. 그것은 시어머니 마음속에 자리 잡은 가부장제의 관습법일 뿐이기에 친정에 먼저 가도 현행법에 저촉되어 처벌받거나 손해배상책임을 지진 않는다. 하지만 들어보았는가? ‘괘씸죄’라고. 시어머니 마음속의 관습법을 어겼다간 이혼을 하지 않고는 수십 년 간 지속될 예정인 며느리 생활이 고달파진다. 당신은 화가 나고 분한 마음에 엄마들 단톡이나 맘 카페에 이 억울한 상황을 호소하다가, 갈까 말까를 고민하며 잠시 더 갈등의 시간을 갖다가, 결국 친정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K-며느리로 산다는 것에 대한 서글픔을 외로이 삭이며 불편한 명절을 보내게 될 것이다.


명절에 내가 내 엄마 보러 내 집 가는데 허락받고 가야 되는 거. 그게 문제라는 생각이 안 들지, 너는?

                                                                               -드라마 며느라기 中 사린의 대사


 그래도 아내의 입장을 배려해서 짐을 싸 두었으니 어서 친정에 가자고 말해주는 남편, 친정에 먼저 가면 안될지 시어머니에게 대신 건의해주는 남편은 참 고맙기까지 하다. 친정에 먼저 가자고 남편에게 말 잘못 꺼냈다가 “네가 우리 집안을 무시하냐?” 는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히는 경우도 많다. 고부갈등 예방에서 남편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이 9할인데, 남편이 시댁의 이해관계만을 관철시키는 강경한 대변인이 되어 버리면 아내는 발 붙일 곳조차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될 수밖에 없고, 고부갈등은 더 심해진다.


 A구제님(求濟, 구하여 건너게 하다는 뜻의 변변이 운영하는 법률사무소 상호에서 유래한 의뢰인들에 대한 애칭이다)은 자타공인 좋은 집안에 시집을 갔다. 시댁이 재력가 집안인 데다 남편은 유순한 성격에 젠틀하고 상냥했다. 남들은 살 집이 없어서 결혼을 포기한다고 하는데, 시댁에서 기꺼이 고가의 아파트를 남편 명의로 해주어 신혼집 마련도 척척 해결되었으니 모든 것이 일사천리인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시댁에서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만큼 시댁은 아들과 며느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다. 집안의 대소사에 소환되어 가는 것은 물론이고, 거의 매 주말마다 시댁을 방문하여 시댁 식구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던 A구제님. 시어머니는 신혼집 비밀번호를 알고 미리 연락도 없이 수시로 드나들기에 프라이버시조차 지켜지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손주들의 교육에 대해서도 며느리에게 일임하지 않고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통에 A구제님은 아내로서의 역할도 엄마로서의 역할도 반쪽자리였다. A구제님은 자녀들을 출산하고 키우고 이제 며느리 경력 10년 차의 구력이 생기자 남편에게 시댁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비로요구했다. 새댁이었을 때는 차마 꿈꾸지 못했던 쿠데타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순하디 순한 순둥이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남편이 순둥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배후에는 백 호랑이 같이 기가 센 무시무시한 시어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시어머니의 명령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분명 성인의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는 아직도 부모로부터 정서적 독립이 되어 있지 못하고 매사에 부모에게 묻고 의사결정을 하였다. 그에게 가족은 엄마, 아빠, 자신과 자신의 형제자매에 국한되었고, A구제님과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자녀는 그 가족의 범주에 속해 있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마마보이라고 부른다.





 A구제님은 마마보이의 와이프로서 여생을 시댁에 충성하며 숨죽이고 살다가 고난 끝에 상속을 받을 것인지, 쿠데타를 일으키고 남편을 찾아와 당차게 독립된 가정을 꾸릴 것인지를 고민하다 후자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역사상 오래된 관습에 반하여 새로운 사상을 전파한 자는 박해를 받고 순교했다. 백 호랑이 시어머니는 꼭두각시 같이 순종하던 아들을 조종하려는 며느리가 눈엣가시였고, 아들에게 이혼소송을 종용함으로써 A구제님의 며느리 자격을 박탈시키고자 했다. A구제님과 변변은 남편인 원고가 진심으로 이혼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시어머니의 명령에 불복할 수 없어 소송을 하는 것에 불과하며, 원고가 정서적으로 독립되면 자녀들과 함께 원만한 가정을 영위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고, 특히 원고가 주장하는 A구제님의 유책성이 거짓이므로 원고의 이혼청구를 기각시켜 달라고 방어하였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이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고 했던가. 변변은 법정 안에서 펼쳐지는 그 진귀한 구경을 했다.


판사: 원고 측 진정하세요!
원고 어머니: 이 년아. 니가 어디 감히 내 뜻을 거역해?
피고: 어머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돼요.
판사: 원고 측, 자꾸 소란을 피우면 법정 밖으로 끌어내겠습니다.
원고 어머니: 너를 우리 집안 호적에서 파버리고 말 것이야.



 아들의 이혼소송을 방청하러 온 시어머니는 법대에 선 A구제님을 보자마자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 분노하여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판사의 제지는 안중에도 없이 폭언을 쏟아내었다. 법정 안에서는 경위가 상시 재판 상황을 엄중히 지켜보며 재판업무에 방해될 수 있는 휴대폰 , 대화 등 일체의 소음을 제지한다. 때문에 욕설과 소란은 즉시 퇴장각이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나는 우리의 승소를 직감했고, A구제님은 남편의 이혼소송을 기각시킬 수 있었다. 판사는 제출된 증거 자료에 보태어 변론 전체의 취지를 고려할 수 있다. 당사자의 주장 내용뿐만 아니라 주장의 태도, 증거 조사의 협조 여부, 지연 여부 등을 토대로 판사가 심증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판사님도 원고 어머니의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태도를 목격하고 원고 어머니가 부부관계에 깊숙이 개입하여 결혼생활 유지를 방해했고, A구제님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다는 우리 주장이 신빙성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원가정에 대한 의존성은 비단 남성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마마보이도 있지만 마마걸도 있다. 고부갈등만큼 장서갈등도 늘었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으로 친정어머니에게 육아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친정의 생활권에 남편이 편입되게 되면서 아내의 원가정의 문화와 충돌하게 되었는데, 아내가 갈등을 중재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갈등이 증폭된 것이다.


 부모의 교육열로 자녀들의 학업 수준은 높아졌지만 부모가 짜 준 플랜대로 진학, 취업, 결혼까지 의존적으로 결정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보니, 부부가 독립된 새 가정을 이루었으나 정작 자신의 가정을 잘 영위하는 방법을 모르고, 종래 해왔던 것처럼 원가정의 부모의 뜻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려는 경향이 생겨난다. 결혼하여 새가정을 꾸렸으나, 아직 원가정으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되지 못하여 원가정의 가치관, 문화, 습관 등이 옳다고 여기고 상대방 배우자에게 원가정의 가치관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이다.


 명절증후군의 이면에는 원가정에 대한 의존성이 존재한다. 사실 우리 가정이 설 명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설 명절을 보낼 당사자인 부부 두 사람의 주체적인 의사결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설 명절에는 아내가 며느리로서 남편의 원가정에서 차례 준비를 하고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오랜 가부장적 관습과 원가정으로부터 온전히 독립되지 못한 가치관은 새 가정의 가장인 남편으로 하여금 원가정의 주체인 시부모님들에게  가정 구성원이 명절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결정권을 양도하게끔 하였다. 통상 어떤 결정에 따른 결과는 결정한 자가 그 책임도 동시에 지게 마련이지만, 이런 유형의 결정은 결정한 자와 결과를 감당해낼 책임이 있는 자가 각각 다르기에 ‘명절증후군’이라는 사회적 병리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설날은 아내만큼 남편에게도 불편할 수 있다. 머나먼 고향길 힘들게 운전하는 피로감에, 일하느라 허리 한 번 펴지 못하느라 예민해진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눈치 살피는 긴장감에, 세대차이 나는 집안 어른과 불편한 대화를 해야 하는 부담감에 남편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 곤혹스러울 것이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불편함과 불안감이 있기에 명절 연휴기간에 갈등이 증폭되어 부부싸움이 여느 때보다 더 잦아진다. 대구 경찰서는 명절마다 가정폭력 신고 건이 폭증한다고 이번 설 명절을 맞이하여 가정폭력 엄중 대처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재래시장에서는 차례상에 올릴 제수용품 준비로 바빠지는 설 명절 직전이 대목이지만, 이혼 전문 변호사인 변변에게는 명절 이후가 대목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이혼 혹은 비혼뿐인가?




 저 장가갔고, 지금은 혜린이가 제 식구예요. 아버지 어머니 서운하실지 모르겠지만 제 식구 먼저 챙겨야겠어요. 제가 가장이니까요. 부모님 생신이나 집안 행사 같은 거 챙길게요. 다만, 자기 조상은 자기가 책임지자는 것이 저랑 혜린이의 합의된 생각이에요.

                                                                                  -드라마 며느라기 中 구일의 대사



 자녀교육의 본질은 자녀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잘 성장하여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고, 결혼은 독립된 두 성인의 결합이기에 배우자가 될 사람이 원가정으로부터 정서적 독립이 되었는지를 미리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남편이 자신의 효도를 아내에게 대신해주길 바라는 순간 아내는 남편을 남의 편이라고 여기게 된다. 결혼 관계의 생명은 신뢰이다. ‘오빠만 믿어’라는 말만 믿고 결혼했는데, 그 오빠가 ‘나는 우리 엄마만 믿어’ 하는 것은 이른바 상도덕(법률용어로는 ‘신의칙’)에 반하는 것 아닌가. 어머니 입장에서는 아들의 결정이 서운할 수 있겠지만, 아들이 원가정으로부터 온전히 독립하여 새가정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해나가려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어머니가 자녀교육의 본질을 제대로 달성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구일 씨는 피곤하니까 들어가서 자고, 아버님이랑 작은 아버님은 술 드시고, 구영 씨랑 미영 씨는 데이트하러 나가고 차례 음식은 어머니 혼자 준비하시고? 다들 너무 했다. 그리고 저는 며느리니까 당연히 어머니랑 같이 음식을 만들거라 생각하시는 것 맞죠?

 -드라마 며느라기 中 혜린의 대사


나는 뭐 무씨라서 30년 넘게 명절 음식 했니?

        -드라마 며느라기 中 시어머니 기동의 대사


 자식 된 도리, 효도라는 명분으로 며느리에게 강요하기엔 명절 차례상 준비도 엄연히 노동이다. 회사 일은 월급도 받고 수틀리면 사표도 던질 수 있는데, 며느리 일은 무급 노동에 사표도 못 내고 퇴근시간도 시어머니 재량이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제 맛인 명절에 매번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다녀 간 텅 빈 친정에 뒤늦게 도착하는 꼬리잡기를 몇 해 반복하노라면 친정 형제자매들 보기가 남보다 못해진다. 시어머니 역시 며느리였고, 시집살이를 겪어보지 않으셨는가. 아들은 주방에 얼씬도 못하게 하면서 친정에 가고 싶어 하는 며느리에게 시누이 식구 상차림까지 하도록 하는 K-시월드는 부부간의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 며느리가 편해야 아들도 편하고, 아들이 편해야 시어머니도 편하다.


 차례 준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만의 몫이 아니다. 온 가족이 함께 분담하여 준비한 차례상을 조상님께 정성스레 올린다면 조상님에 대한 예의와  더불어 끈끈한 가족애까지 확인하는 참다운 명절이 될텐데 말이다.


결혼은 홀로 선 두 사람이 만나 결합하는 것이다. 과연 내가 홀로 섰는지, 상대방이 홀로 서기가 된 사람인지 그래서 두 사람이 독립된 가정을 맞이할 자세가 되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혼수준비 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전 05화 라푼젤 탈출 성공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