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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푼젤 탈출 성공기

   by 변변

라푼젤: 엄마, 왜 밖에 나가면 안돼요?
마녀 고델: 바깥세상은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 많은 위험한 곳이란다. 이 탑이 안전하니 너는 여기에 있어야 해. 그런데, 라푼젤! 엄마를 탑 위로 끌어올려준다고 많이 힘들었니?
라푼젤: 아니에요...
마녀 고델: 그러면 재빨리 엄마를 끌어올리지 않고 왜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었던 거니? 
라푼젤  (굳은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함)
마녀 고델: 하하하. 라푼젤 농담이야 농담. 넌 유머를 모르는구나.
라푼젤: 엄마, 내 생일마다 밤하늘에 떠다니는 불빛을 직접 나가서 보고 싶어요.
마녀 고델: 그건 불빛이 아니라 별이란다. 그리고 니 생일은 작년이었지 않니.
라푼젤: 엄마, 생일은 해마다 돌아오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불빛은 별과 달라요. 
마녀 고델: 딸아, 너는 연약한 꽃과 같아. 네가 이 탑에 사는 이유는 이곳이 안전하기 때문이야. 밖은 너무 위험해. 엄마는 모두 다 알아. 이건 다 널 사랑해서 해주는 말이야. 엄마는 널 최고로 사랑한단다. 






 2010년 디즈니에서 개봉한 영화 라푼젤에서 라푼젤과 마녀 고델의 대화 내용이다. 기존에 우리가 익히 알던 라푼젤의 내용을 각색하여 마녀가 라푼젤의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마법의 힘을 독점하기 위해 라푼젤을 탑에 가두어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살게 한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종래 동화에서는 라푼젤이 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원인이 탑이 너무 높아 사실상 신체의 위해 없이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고, 이는 탈출이 불가능한 이유가 쉽게 수긍되는 ‘감금’이었다. 그런데, 디즈니 영화 라푼젤에서는 어떠한 물리적 폭력이나 협박이 개입되지 않았고, 탑의 높이 때문에 사실상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악당들을 피해 탑 안으로 들어오게 된 도둑 플린 라이더가 라푼젤에게 떠다니는 불빛을 볼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하자 라푼젤은 긴 머리를 이용하여 플린 라이더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돕기까지 하였다. 놀랍게도 라푼젤이 그동안 탑을 나가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 마녀 고델의 가스라이팅 때문이었다.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를 조작하여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하고 가스라이터에게 의존하게 함으로써 심리적 지배를 하는 행위를 말한다. 가스등(Gas Light)이라는 연극과 동명의 영화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가스등은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의 유일한 상속녀로부터 유명한 보석을 훔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결혼까지 한 살인범이 아내인 상속녀를 심리적으로 지배해나가는 이야기이다. 살인범 그레고리는 상속녀 폴라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에 성공한 후 그녀를 세상과 단절시킨 다음 그녀가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도벽이 있음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정신병자라고 몰아간다. 폴라는 그레고리가 밤마다 다락방에 올라가 몰래 가스등을 켜고 폴라의 보석을 훔치기 위해 뒤지는 사실을 모른 채, 가스등이 희미해지고 위에서 소음이 들리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그레고리에게 말하고, 그레고리는 그때마다 폴라가 정신이상으로 잘못 판단한 것으로 믿게끔 종용한다. 


 가스라이팅은 이렇듯 친구관계, 연인관계,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관계, 직장 내 부하상사 혹은 동료관계 등 생활 속 밀접한 관계에서 보호자나 권위자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가스라이터들은 “내가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내가 너를 가장 잘 알아” “나니까 이런 얘기 해주는 거야”라는 말로 상대방을 사로잡아 복종하게 하고 관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라푼젤은 마녀 고델이 자신을 사랑하는 친엄마라고 믿었기에 바깥세상이 무서운 곳이고 탑 안이 안전한다는 암시에 갇혀 탑을 탈출하지 못했고, 폴라는 남편 그레고리가 아내를 사랑해서 걱정해주는 말일 거라 믿었기에 자기 자신을 폄하하고 무능력하다고 비난하는 암시를 여과 없이 받아들여 자신이 정신병자 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고 자각하고 이혼을 원하여 찾아온 구제님(求濟, 구하여 건너게 하다는 뜻의 변변이 운영하는 법률사무소 상호에서 유래한 의뢰인들에 대한 애칭이다)이 나에게 하소연하였다. “차라리 남편이 나를 때렸다면, 가정폭력은 위험한 거니까 아이가 생기기 전에 일찌감치 이혼을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사회생활 많이 해봐서 안다. 너를 걱정해서 험한 일 안 겪도록 직장생활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거다. 나는 네가 남편의 사회생활을 존중해주고 집에 좀 늦게 들어온다고 바가지 긁는 한심한 여자가 아니라서 좋다. 내가 경제전문가다. 나한테 다 맡겨라’라고 하니 그 말을 믿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10년을 살고 나니 저는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남편의 말이 절대적인 진리가 되어 남편이 매일같이 룸살롱을 다니는 것도, 남편이 생활비를 독점하는 것도, 내가 무능한 밥벌레 취급받는 것도 모두 합리화되어 있었어요” 그렇다. 가스라이팅이 정말 무서운 것은 나도 모르게 가스라이팅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내가 당하는 것이 가스라이팅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까지 긴 시간과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


 심각한 가스라이팅의 피해를 입으신 한 구제님이 긴급하게 상담을 요한 적이 있다. 변변이 놀라 다른 일정을 미루고 다급하게 전화를 드렸더니, 구제님 왈 “변호사님, 남편에게 이혼소송을 미리 알리고 허락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남편이 변호사 선임할 수 있게 선임비용을 먼저 이체해주고 소송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문의를 하셨다. 아.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적에게 내가 전쟁을 언제 시작하겠다고 미리 다 알려주고 군수품 지원까지 성실히 해주며 전쟁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 일반인의 상식에서는 황당한 질문일 수 있지만, 오랜 가스라이팅을 당한 경우 가스라이터의 심리적 지배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기가 그만큼 힘들다.


 특히, 가스라이팅으로 고통받아 이혼을 원하는 구제님의 경우 이혼을 최종 결심하기까지 이혼신청과 취하, 재고의 시간을 반복하시는 경우가 많다. ‘과연 내가 이혼소송을 할 수 있을까?’ ‘우리 남편은 엄청 똑똑하고 무서운 사람인데 이길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라고 나에게 문의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오락가락 쉽게 결단을 못 내린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대부분 그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정작 구제님들이 염려하는 두려움의 실체는 ‘소송’이나 ‘가스라이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사람 없이 나 혼자 이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유래된 불완전하고 무능력한 자기 자신이었다. 오랜 심리적 지배에 길들여져 짓밟힌 자존감을 회복해야 제대로 독립할 수 있는데 지배의 틀을 깨고 나오는 것이 무척 힘들다. 이미 구제님의 두뇌에는 그 사람이 준 부정적 암시가 정답처럼 자리 잡아 변호사의 조언이나 법원의 판례보다 더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으셨다. 



 전문가들은 애초에 가스라이터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한다. 그만큼 가스라이터에게 한번 빠져들면 그 관계에서 탈출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이다. 피해자가 가스라이팅을 인지하고 가스라이터로부터 빠져나갈라치면 가스라이터들은 때론 협박으로 때론 연민과 동정을 자극하는 말들을 하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출을 막는다. 이혼소송이 제기되면 법정에서는 사랑한다며 이혼을 할 수 없다고 악어의 눈물을 흘리면서, 법정 밖에서는 배우자에게 ‘내가 누구 좋으라고 이혼을 해주겠어? 나는 너에게 한 푼도 줄 수 없으니 각오해라’ 고 은밀하게 협박하는 가스라이터들이 많았다. 재산분할을 해주기 싫어서 이혼을 안 해주려는 수작이다.


 가스라이팅도 이혼사유가 되나요? 맞은 것도 아닌데 이혼이 받아들여질까요?라는 질문을 많이들 주신다. 민법은 배우자에 대한 심히 부당한 대우,  혼인을 계속할 수 없는 중대한 사유를 각 이혼사유로 규정하고 있다. 상대방이 구제님을 가스라이팅 한 대화 녹취록, 문자나 카카오톡 메시지, 주변인들의 사실확인서 등을 첨부하여 주장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다음 혼인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여 가사조사를 잘 받고 변론에 임하여 이혼된 사례들이 다수 있었고, 구제님들은 이혼과 동시에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며 후련해하셨다.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며 상대를 굴종시키려는 가스라이터는 대부분 나르시시스트로서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갖고 있다. 자신감 넘치는 언행과 달리 오히려 내면의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많고, 애정결핍에서 유래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갖고 있다.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자신에게 늘 관심이 집중되고 특별대우를 받기를 원하고, 타인을 통제 조정하려고 한다. 때문에  가스라이팅 할 먹잇감을 놓친다는 것, 거절당하는 것은 그들에겐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혼소송을 당했을 때의 일반인들의 반응이 “너는 왜 나와 이혼하려는 거니” 라면, 가스라이터들은 “감히 너 따위가 나한테 이혼소송을 청구한다고? “ 라며 관계를 거절당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애초에 상대가 가스라이터 혹은 나르시시스트인지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구제님은 결혼도 이혼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구제님은 이렇게 토로하셨다 “연애할 때 남편은 비싼 명품 선물에 장미꽃 수백 송이를 안겨주었어요. 핫플레이스에 뷰 좋은 자리로 예약해서 데이트를 하고, 힘든 문제도 알아서 척척 해결해주면서 남자답게 강하게 리드하는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재력과 인맥을 이용해서 다 알아봐 주니까 그 사람에게 기댈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렇다. 가스라이터는 백마 탄 왕자처럼 해결사의 가면을 쓰고 달콤하게 찾아온다. 


 하지만, 그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가스라이터는 이내 “내가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내가 너를 가장 잘 알아” “나니까 이런 얘기 해주는 거야” 라며 당신에게 부정적 암시와 질책을 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대신 “네가 예민하게 구는 거야” “농담이야 농담” 이라며 당신 탓을 할 것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위와 같은 단골 멘트를 하고 그로 인해 당신이 무기력함과 무력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가 아무리 매력적이고 그의 품이 아무리 따뜻하다 해도 그와의 동행이 당신의 성장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당장 당신이 있던 라푼젤의 탑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 세상 밖은 당신이 있던 세상보다 안전하고 따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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