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매정했던 세월 값 오백 원

에세이 소설 - 엄마 없는 밤

by 온벼리
모든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고 소설의 모양새를 한 에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에세이 소설이라는 명칭은 없기에 정식 명칭은 소설입니다.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친구들 사이에서 생일잔치가 유행이었다. 은주는 생일을 기념해 봄 경험이 없다. 돌 사진도 하나 없어 서운했는데 생일잔치라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생일잔치는 엄마들 사이에서도 고민거리였다. 친구 생일에 다녀온 아이들은 자신도 해 달라며 때를 섰고, 빤히 아는 한 동네에서 엄마들끼리 눈치가 보여 안 해 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순자도 은주의 생일잔치를 해 주기로 했다. 신이 난 은주는 초대장을 정성껏 썼다. 초대장 없이도 반 친구들 모두 몰려올 것은 뻔하지만 친한 친구에게는 초대장이라는 것을 줘보고 싶었다.


오늘은 은주의 생일이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순자는 벌써부터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시지를 잘라 나무젓가락에 꽂아 미니 핫도그를 만들고 고구마도 튀겼다. 부엌은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승진이네 슈퍼에서 과자와 음료를 봉지 가득 사 들고 오는 순자 옆에 바짝 붙은 은주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폴짝거린다.


제사를 지낼 때만 쓰던 커다란 상을 펴고, 찬장에 넣어 두었던 넓고 큰 접시를 죄다 꺼내 과자를 종류별로 가득 담았다. 초코파이를 겹겹이 쌓고 큰 초를 가운데 꼽아 케이크도 만들었다. 커다란 상 위에 은주가 좋아하는 간식들로 가득 차려지는 이 순간이 은주는 꿈만 같았다. 주인공이 된다는 것에 기쁘고 벅차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은주는 오늘의 행복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에 의욕이 없었던 은주가 오늘만큼은 활기가 넘친다.


생일이 은주보다 한 달 늦은 은경에게도 똑같이 차려주겠다 약속을 해 둔 터라 은경은 심술을 부리지 않고 옆에서 과자를 집어먹으며 얌전히 구경 중이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왁자지껄 몰려오는 아이들 소리로 대문 밖이 시끄러웠다. 마루에 걸터앉은 아이들이 깔깔대며 떠들고 있을 때 은주의 할머니 길려가 집으로 들어왔다. 길려는 점 10원짜리 화투 노름을 하다 잔돈이 다 떨어져 들어오는 중이었다.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아이들이 못마땅했던 길려는 마당 한편에 싸리 빗자루를 찾아들고 아이들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놈 새끼들이! 어디 너므 집이서 떠들구 지랄이여! 빨리 느들 집으루 안 가냐!!"

갑작스러운 매질에 놀란 아이들은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길려는 마당으로 도망친 아이들을 오리 떼 몰 듯 빗자루를 휘두르며 쫓아다녔다. 결국 대문 밖까지 쫓겨난 아이들은 쭈뼛거리며 가 버렸다.

충격적인 상황을 지켜본 은주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악!! 엄마~~~~ 엄마~~~~~ 할머니가 애들을 빗자루로 때려서 다 내쫓았어~~ 으아~~ 어떻게 해~~ 친구들 다 갔잖아!! 어떻게 하냐구!! 내 생일~ 으앙~~~"

구름 위를 걷다 땅으로 곤두박질친 은주는 하늘이 무너져라 서럽게 울었다. 오늘은 때를 써도 다 받아 줄 거라는 믿음으로 마루를 뒹굴고 마당에 주저앉아 집이 떠나가도록 울어 젖혔다.

"어이구... 엄마가 할머니 헌티 잘 말 헐 테니 깨... 그만 울어 이? 나가서 친구들 델꾸 와! 얼른 그치구!!"

순자는 길려에게 조용히 이야기하더니 마실 더 다녀오시라며 주머니에 용돈을 두둑이 찔러 넣어 주었다. 용돈을 받아 기분이 좋아진 길려는 순순히 밖으로 나갔고, 은주는 가까운 친구의 집으로 먼저 뛰어갔다.

생일잔치는 노래 부르고, 선물을 받고, 음식을 먹는 것이 다였다. 딱 한 번씩만 차려주겠다던 생일잔치는 그렇게 아쉽고 짧게 끝이 났다.




영식의 아버지 월출과 어머니 길려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길려는 부모 없는 오 남매 중 첫째 아들을 양자로 들였고 그 동생들도 함께 고이도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양자 아들 하나로 성에 차지도 않았던 월출은 본인의 자식을 낳고 싶어 죽은 동생의 처인 순례를 통해 자식을 낳기로 합의했다. 월출과 순례 사이에서 딸 둘 아들 셋이 태어났다. 그 첫째 아들이 영식이었던 것이다. 길려는 영식이 돌이 지나자, 집으로 데려와 키웠다. 영식의 공식적인 어머니는 길려였지만 영식에게는 어머니가 둘이었고, 양자로 들어온 형님과 그 형제들, 친어머니 순례와 함께 사는 동생들과 순례와 전 자식들까지 있었으니, 영식의 집안은 아주 복잡했다. 관계만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 감정도 복잡했다.


영식은 커가며 자신이 서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순례는 무시하고 길려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다. 하지만 영식의 바람과는 다르게 길려는 영식을 예뻐하지 않았고 오히려 큰아들 영배와 그 형제들 사이를 오가며 영식을 무시하고 미워하는 말들을 서슴없이 뱉었다.




영식의 나이 서른 후반이었다. 아버지 월출은 죽은 지 오래고 어머니 길려는 최근 건강이 좋지 않다. 길려의 몸보신을 위해 친구들과 무인도로 토끼를 잡으러 갔다. 돌아온 영식은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토끼 두 마리를 마당에 내려놓고는 껄껄 웃으며 자랑했다.


순자는 닭백숙 삶듯 토끼 두 마리를 가마솥에 푹 삶아 저녁상 위에 올렸다. 토끼를 먹는 것이 반갑지 않았던 은주는 밥으로 대충 허기만 달래고 일어났다. 평소에는 밥을 많이 먹지 못하던 길려는 웬일로 토끼고기를 맛있게 아주 많이 먹고는 만족스러워했다. 영식도 길려와 가족이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모습에 기분이 한껏 들떠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다음 날 아침 길려는 어제 먹은 고기가 소화되지 않는다며 밥을 먹지 못했다. 몸보신하려고 먹은 토끼 고기로 오히려 탈이나 며칠이 지나도록 밥을 먹지 못했다. 길려는 이후로 하루가 다르게 마르고 쇠약해져 갔다.


어느 날 길려는 옷을 들춰 자신의 배를 보여 주며 은주에게 말했다.

"여기 좀 봐봐라... 내가 오래 뭇 살라는 갑다..." 앙상한 갈비뼈 아래로 뱃가죽이 등과 맞닿은 듯 움푹 파여 있었다. 길려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졌고 누워서 지내는 날도 늘어갔다. 병원에서는 별다른 치료도 못하고 약만 받아 왔다. 길려의 부탁으로 무당이 집으로 와 굿을 했다. 마루에 한 상 차려놓고 무당은 길려의 주변을 날뛰며 시끄럽게 굿판을 벌이고 갔다.


순자는 거동이 불편해진 길려를 목욕시키려고 커다란 고무통을 방안까지 끌고 들어왔다. 가마솥에서 끓인 물을 양동이로 길어다 고무통을 채웠다. 물을 퍼 나르는 노동도, 어른을 목욕시키는 일도 쉽지 않아 목욕은 자주 할 수는 없었다.

"엄마! 할머니한테서 비린내 나!!"

"이~ 자주 뭇 씻어서 그려! 그리구 늙으믄 원래 다 냄새나는겨!"

"아이~ 그래도 할머니랑 같이 방 쓰기 싫어!"

"방이 두 개 밖이 없는디 그럼 워쩐다니?"

"어우~ 냄새나는데~"

"니가 좀 참어~ 그거 냄새 좀 나믄 어떻다구 그러니."


길려가 기운 없이 손목만 까딱까딱하며 은주를 불렀다. 장판을 떠들어 감추어 두었던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 은주에게 건넸다. 길려가 은주에게 용돈을 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거 가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은주에게 길려는 옅은 미소를 띠며 느리고 힘없는 말투로 말했다.

"가서... 과자 사 먹어라..." 손에 받아 든 오백 원을 보며 은주는 생각했다.

'과자는 이백 원이면 사 먹는데... 오백 원으로 뭘 더 사 먹지?'

순간 기분 좋은 고민을 하고는 습관처럼 말을 뱉었다.

"고맙습니다!"

은주는 순간 멈칫하고 자기 말을 의심하며 생각했다.

'내가 진짜 고마운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버린 것이다.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고마워해야 할 텐데 오백 원이 그저 좋을 뿐 고마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 생각지 않고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꾸뻑 인사를 하고는 오백 원을 들고 얼른 나가 버렸다.

그 후로도 길려는 가끔 장판을 떠들어 감춰둔 오백 원을 은경과 은주에게 나눠 주었다.




아침 일찍부터 밖이 시끄럽다. 은주와 은경은 어젯밤 평소처럼 작은방 길려 옆에서 잠들었다. 잠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은주를 순자가 흔들어 깨웠다.

"은주야! 일어나!"

"음......" 은주가 일어나지 않자, 순자는 은주를 벌떡 일으켜 세워 마루로 끌고 나왔다.

"엄마... 아... 왜!! 나 졸려~ 더 잘 거야!!"

"은주야! 할머니 돌아가셨어. 얼른 안방이 가 있어!"

"어?? 뭐라고?"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헐머니? 저기서 자는데?"

방금 전까지 길려 옆에서 자고 있었던 은주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다시 방으로 들어가 길려를 쳐다보았다. 길려는 등 돌려 누운 채 미동도 없었다.


집 안팎은 사람들로 시끄러웠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는지 평소 보기 힘든 사람들까지 자기 집인 양 거침없이 드나들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묘하게 불편했다.

안방 아랫목에 길려의 관이 자리 잡았고 병풍이 쳐졌다. 잔칫집도 아닌데 부엌에서는 전을 부치는 기름 냄새가 진동했고, 안방에는 종일 향을 피워 매캐한 연기로 목이 따가웠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하얀 천막이 마당에 쳐졌고, 바닥에는 돗자리와 상도 펼쳐졌다.

어른들의 건조하고 감정 없는 곡소리가 들렸다. 동네 사람들이 길려가 누운 안방을 수없이 들락거리며 절을 했다. 장례란 이런 것인가? 사람이 죽었는데 건조한 잔칫집 같은 분위기가 은주는 기분 나빴다.




손님들로 북적이는 마당 한가운데에서 사촌 남동생 승주와 은주가 싸우기 시작했다. 승주는 큰아버지 영배의 형제 자식이다. 승주는 마당에 깔린 자갈을 한 움큼 집어 은주에게 던졌다. 자갈이 은주의 머리에 '빠바박'하고 부딪혔다.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아찔했지만 질 수 없으니 은주도 똑같이 자갈 한 움큼을 집어 승주에게 힘껏 던졌다. 주거니 받거니, 계속된 자갈 세례에 눈물이 맺혔지만 지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기싸움을 했다.

아무리 애들이라지만 장례식날 싸우는 꼴이 보기 좋을 리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기는 했지만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분명 승주가 먼저 시비를 걸었고 돌도 먼저 던졌기 때문이다.

유란이의 동생 승주는 화가 나면 칼을 들고 덤비는 막돼먹은 놈이라 은주는 죽어도 져 주거나 봐줄 생각이 없었다. 도대체 그 집 얘들을 왜 다 그 모양인지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이 말려도 먼저 물러날 수 없을 만큼 은주에게는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었다.

"얼라! 얘들이 왜 이런댜?"

"얼른 그만두지 뭇 혀?? 어디 할머니 상 치르는 디서 쌈질을 허구 그려!"

불꽃 튀던 싸움은 승철이가 밖으로 끌려 나가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일부러 싸움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주는 길려가 가는 길에 다 보고 가라고 일부러 더 눈을 부릅뜨고 싸웠다.

은주는 길려의 장례식이 눈곱만큼도 슬프지 않았다.

은경이 산에서 데리고 온 눈도 못 뜬 새끼 고양이다 죽었을 때도 슬펐고, 일 년 키운 개가 죽었을 때도 목 놓아 울었는데... 같이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아빠와 엄마를 지독히 미워했고, 친척들 앞에서 우리 가족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을 서슴없이 하면서도 늘 당당했던 이해할 수 없는 할머니였다. 같은 집에서 살면서 조금의 정도 주지 않았던 사람.


그동안의 매정했던 세월을 갚기에 할머니의 장판 밑 오백 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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