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소설 - 엄마 없는 밤
모든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고 소설의 모양새를 한 에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에세이 소설이라는 명칭은 없기에 정식 명칭은 소설입니다.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은경은 국민학교 6학년 가을에 서울 노원구 공릉동 막내 이모 집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순자는 서울에서 공부하면 성적도 좋아지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은경은 그냥 서울에 맡겨지는 것이었다. 넷을 돌보는 것이 벅찼던 순자는 자신의 형제집에 아이를 맡기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은주도 일곱 살에 서울 노원구 상계동 큰외삼촌 집에 맡겨진 적이 있다. 고이도에 놀러 온 순자의 큰오빠 덕수가 은주를 예뻐하자, 순자는 은주를 데리고 서울로 같이 올라왔다. 과천 동물원에 다녀온 다음 날 순자는 은주에게 말했다.
"오늘 집이 갈 건디. 은주 너는 외삼촌이 엄청 이뻐 허니깨! 여기 좀 있다가 와라."
"나 혼자 여기 있으라고?"
"이! 그려~ 몇 밤만 자구 엄마가 데리러 올 텡깨 그때까지 여기 있어!"
"엄마도 같이 있으면 안 돼?"
"엄마는 집이 가서 일 혀야지... 애들도 봐야 허구!"
순자는 말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
"나도 그냥 집에 가면 안 돼? 그냥 엄마 따라갈 거야!"
"아녀~ 며칠만 있어! 엄마가 데리러 온당깨."
"힝~ 싫은데~"
울상인 은주를 두고 순자는 고이도로 내려갔다. 덕수와 그의 가족들은 은주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많이 예뻐했다. 하지만 은주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다. 덕수는 아내와 트럭 장사를 했다. 트럭에 과일과 야채를 싣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데, 새벽에 나가 저녁 늦게나 돼서야 들어왔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덕수의 고등학생 딸 희정과 중학생 아들 정근은 학원과 독서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놀거리도 없는 빈집에서 종일 혼자 보내는 시간은 고통이었다. 시간은 멈춰 버린 듯 지루하고 더디 흘렀다.
은주는 상황극을 만들어 일인 다역을 하며 놀았지만, 그것도 며칠이 지나니 지겨웠다. 덕수는 순자와 통화하며 은주가 혼자서도 잘 논다며 칭찬했다.
은주는 지난번에 아파트 하단에서 따온 봉선화를 또 따러 갔다가 한 무리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똘망지고 키가 큰 여자아이가 은주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야 봉선화 도둑! 네가 지난번에도 봉선화 따갔지! 이거 우리가 키운 거거든? 네가 뭔데 우리 꽃을 따가는 거야?"
고이도에서는 꽃이고 풀이고 지천인데 길가에서도 자라는 봉선화를 조금 땄다고 이렇게 도둑으로 몰릴 줄은 몰랐다. 머뭇거리다가는 봉변을 당할 것 같아 잽싸게 뛰어 도망쳤다.
며칠만 있다가 온다던 순자는 가끔 전화만 할 뿐 올라온다는 소식도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은주는 아무도 없는 시간이 되면 발코니에 나가 엄마를 부르며 울기 시작했다. 제때 씻지도 않아 꼬질꼬질한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되어 얼룩진 몰골로 정근과 마주쳤다. 정근은 은주가 울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안쓰러워 말했다.
"울었니? 왜 울었어? 엄마 보고 싶어? 집에 가고 싶니?"
은주는 마음을 알아준 정근의 말에 그동안 참아 왔던 눈물이 왈칵 터지고 말았다. 은주가 서럽게 한참을 울자, 정근은 어쩔 줄 몰라하며 은주를 달랬다. 순자는 은주를 몇 달 더 맡기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그날 밤 서울에서 온 전화를 받고 은주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 울지 않고 감정 표현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아이인데 서럽게 울며 엄마를 찾는다는 말을 들으니, 순자는 어쩔 수 없이 은주를 데리러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은주는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순자는 막내아들 민철이만 빼고 모두 한두 번쯤은 멀리 떨어뜨려 놨었다.
은경의 전학은 결코 공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은주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순자의 막내 여동생 성자의 집은 상계동 덕수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릉동 빌라 지하층이다. 성자의 남편은 원양어선을 타며 1년에 겨우 한두 번 집에 들어온다. 사람이 그리운 네 살 된 아들 현석이를 위해 은경이가 같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던 성자는 순자의 부탁을 받아들여 은경이를 데리고 있기로 했다.
은경이 서울로 전학 온 지 벌써 석 달이 지나 이제 겨울방학이다. 방학 동안만 은주도 서울에 함께 있기로 했다. 은경은 예전에 없이 반가운 얼굴로 은주를 맞으며 살갑게 굴었다. 은주에게 이모의 실체와 조카 현석이의 만행을 일러바치느라 바빴다.
성자는 우울증이 심했다. 열아홉에 아이를 낳고 이제 스물한 살이다. 남편과 떨어져 혼자 아이를 키운 지 한참이니 외로움에 우울증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네 살의 현석에게 사소한 일로 고함을 지르며 화를 냈고, 은경이에게도 그랬다. 현석이는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 활동적이고 정신없는 아이라 혼날 일도 많았다. 성자는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현석이를 씻기며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짜증을 부리는 일도 잦았다. 현석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놀아달라는데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린 은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현석이는 거친 콧바람 소리를 내며 씩씩거리더니 잠시 뒤 은주의 등에 무언가를 힘차게 꽂았다. 뻐근함에 뒤돌아보니 옷 위로 깊숙이 박힌 바늘이 보였고 바늘 주변으로 피가 물들고 있었다.
"우와!! 이거 뭐야? 바늘이야?"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네 살 난 어린아이가 사람의 등에 바늘을 꽂았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대범하게 깊숙이 찔러 넣는 모양새가 처음이 아닌 것이다.
자기 등에도 바늘을 여러 번 꽂았다는 은경의 말을 들으니 은주는 현석이가 악마로 보이기 시작했다.
은경은 밖에 나가 논다며 현석이를 데리고 나와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숨바꼭질이라며 현석이를 따돌려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 버렸다. 현석이는 누나들을 부르며 애가 탔지만, 은경은 현석이와 놀아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현석이가 얄미울 때마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이렇게 약을 올리면 된다며 낄낄거리는 은경이 은주는 안쓰러웠다.
현석이는 악마 새끼였고 이모는 마녀였다. 엄마는 언니를 왜 이런 곳에 두는지 은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은주는 은경의 편이 되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언니라고 불러 주었다.
성자의 짜증스러운 고성에 화가 난 은경은 종이에 성자의 나체를 그리고 부위별로 자세하고 유치하게 욕을 써넣었다. 은경은 자신의 복수에 동참하는 은주가 있어 신났다. 은주도 현석이가 등에 바늘만 꽂지 않았어도 이 유치한 복수에 동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낙서는 성자가 볼 수 없게 잘게 찢어 밖에 나가 뿌리기로 했다. 주머니에 찢어진 종이조각을 넣고 어둑해진 빌라 주차장의 공터로 나왔다. 은주는 은경이 시키는 대로 뱅글뱅글 춤을 추며 주머니 속 종이를 꽃가루 뿌리듯 머리 위로 뿌렸다. 둘이라서 위로가 되었고 종이를 뿌릴 때마다 통쾌함에 깔깔대며 웃었다. 은경과 은주는 오늘의 복수에 만족하며 순대를 사 먹으러 빌라 밖으로 나갔다. 후문으로 나가 오른쪽 골목으로 돌아가니 파란색 포장마차가 있었다. 은경은 익숙한 듯 포장마차로 들어가 200원을 내밀며 말했다.
"아저씨 순대 두 개만 잘라 주세요."
"소금 뿌려줄까?"
"네!!"
어른 손바닥 길이만큼 싹둑 잘라 가운데 길게 칼집을 내고 그 사이로 고춧가루가 섞인 소금을 솔솔 뿌린 뒤 종이로 돌돌 말았다. 하나씩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와 골목길 벽에 기대고 앉았다. 은경은 먹는 방법까지 쓸데없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들고 김밥처럼 뜯어먹으면 돼. 먹어봐~ 진짜 맛있어!"
은주는 순대를 처음 먹어봤다. 늦은 밤 출출할 때면 골목에 나와 앉아 순대를 뜯으며 이모와 현석이도 뜯었다. 막 썰린 순대는 따끈하고 말랑했다. 순대도 따뜻했고 은주에게 내민 은경의 손도 따뜻했다. 온기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은주는 순대를 좋아하게 되었다.
겨울 방학이 며칠 남지 않아 은주는 고이도로 돌아가야 했다. 성자가 기차를 태워주면 도착역으로 순자가 마중 나오기로 했다. 은주가 떠나기 전날 밤 은경은 서글프게 울었고 자신을 혼자 두고 가는 은주와 이모에게 맡기고 오지 않는 엄마에게 화가 나서 은주가 집으로 갈 때 인사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은경은 은주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다시 홀로 남겨지는 것이 서러워 은주에게 화를 냈다.
은경을 남겨두고 가는 은주의 마음도 먹먹했다. 한 핏줄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은주도 엄마가 야속하고 미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빨리 고이도로 내려가 은경의 상황을 말해 주는 것뿐이었다.
은경은 다음 해 중학교 1학년 봄에 다시 전학을 왔다. 섬에는 중학교가 없으니, 대천에 있는 학교에 다녀야 하는데 친구와 자취방 생활을 하기로 했다.
몇 달 만에 은경을 만난 은주는 반가워했지만, 은경은 이미 공릉동에서 끈끈한 애정을 과시하던 언니가 아니었다. 사춘기가 시작되어 이전보다 더 유난스럽고 강력해졌다. 물론 은경의 유난에는 자신을 두고 내려간 것에 대한 보복도 포함되어 있었다.
"야. 주댕. 니가 언제부터 나하고 친했다고 그러냐? 야! 됐어! 친한 척하지 마!! 나는 너 필요 없어!!"
은경은 이제 아쉬울 것이 없다며 매몰차게 굴었다. 은경에게 은주는 여전히 앙숙이었다.
공릉동에서 함께했던 언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은주는 은경을 다시 언니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