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언니라고 불릴 자격

에세이 소설 - 엄마 없는 밤

by 온벼리
모든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고 소설의 모양새를 한 에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에세이 소설이라는 명칭은 없기에 정식 명칭은 소설입니다.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순자는 은경에게 은주를 데리고 어항에 사는 큰엄마 집에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전해줄 보따리를 들고 은경과 은주는 아침 일찍 여객선을 탔다. 선실에 앉아 있으니, 허리춤에 돈주머니를 찬 남자가 승선권 한 뭉치와 빨간 모나미 볼펜을 들고 선실로 들어왔다. 남자는 돈을 받고 승선권을 끊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순자가 준 돈을 꺼내 들고 한참을 생각하던 은경은 은주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야. 주댕. 엄마가 돈을 삼천 원밖에 안 줬어. 이거 봐봐"

은경은 은주에게 돈을 살짝 보이고는 얼른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학생 요금이 천오백 원인데... 갔다가 집에 다시 오려면 한 사람이 삼천 원씩 있어야 되잖아? 그럼, 너랑 나랑 같이하면 육천 원인데!! 엄마는 왜 삼천 원밖에 안 줬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니가 받아 왔잖아!"

"야!! 어떻게 하지? 이거... 내 표 끊고 나면 돈이 없어. 나머지 천오백 원은 들어올 때 내가 또 써야 되니까... 음...... 야! 모르겠다. 너는 니가 알아서 해라!!"

"뭐? 내가 어떻게 알아서 해??"

은경은 은주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자기 친구 옆자리로 가 앉았다.

'어떻게 하지? 돈도 안 주고 그냥 가버리면 나 혼자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은주는 당황스러워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은경은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은주에게는 그다지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얄미운 놈이 당황하는 꼴을 지켜보는 재미도 꽤 쏠쏠할 것 같았다.


겨우 아홉 살 은주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대안은 없었다. 사람들은 여객선을 타면 멀미를 피하기 위해서 선실 방바닥에 누워 잠을 자고는 했다. 은주도 일단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그냥 지나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을 감으니, 주변의 소리는 더욱 생생하게 들렸고 승선권을 끊는 남자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자, 은주는 더욱 긴장했다.

"주무시는 분들 일어나세요. 표 끓으러 왔어요."

"학생 어디서 탔어?"

"고이도요."

"고이도. 학생 천오백 원."

"어디?"

"고이도요."

"천오백 원."

남자는 반복되는 말이 귀찮은지 말끝이 짧았고 거스름돈도 말없이 내밀었다. 사람들은 손에 돈을 들고 차례가 되기를 앉아서 기다렸다. 남자가 은주를 발견하고 갑자기 말이 길어졌다.

"거기 자는 학생! 일어나!! 표 끊어야지! 학생!! 일어나라구!!"

꼼짝도 하지 않는 은주를 보고 남자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저 학생 왜 안 일어나! 거기 자는 학생 좀 깨워봐! 어?? 표 끊는다고 얼른 일어나라구 해!!"

남자는 은주를 지나쳐 다른 사람에게로 갔다. 주변에 있던 언니들이 은주를 흔들어 깨웠다. 은주는 창피해 깊이 잠든 척했다.

은주가 계속 일어나지 않자, 언니들은 은경을 불렀다. 은경은 마지못해 은주에게 다가가 발로 은주의 옆구리를 툭툭 차며 음의 높낮이도 없는 기계음 같은 말투로 깨우는 척했다.

"야. 주댕. 일어나. 일어나라구. 아저씨가 표 끊는다잖아. 야. 일어나."

은경의 말투는 짧고 간결했다. 은주가 일어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는 척하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깨우는 모양새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은주는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우선이니 꾹 참아야 했다. 은경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큰 소리로 말했다.

"안 일어나네?"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마디를 툭 뱉고는 홀가분하게 친구 옆으로 가 앉더니 쏙닥거렸다.

"야! 쟤 자는 거 아니야! 자는 척하는 거야. 크크큭."

은주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비웃는 은경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런 인간을 언니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언니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표 끊는 남자가 선실 밖으로 나가려다 아직도 자고 있는 은주를 발견하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은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상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얼른 은주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은주야! 표 값없어?"

은주는 실눈을 뜨고 상미를 쳐다봤다. 은주의 실눈이 대답이라는 것을 알아챈 상미는 은주가 부끄러울까 봐 더욱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없으면 언니가 빌려줄 테니까 이제 일어나 봐."

은주는 상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잠이 덜 깬 척 앉았다. 상미는 조용히 은주의 주머니에 오천 원을 넣어 주었다. 은주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고 다가와 서 있는 남자에게 얼른 오천 원을 내밀고는 모른 척 다른 곳만 쳐다봤다.

"학생! 빨리빨리 일어나야 할 거 아냐. 아까부터 깨웠는데 이제 일어나면 어떻게 해! 아유~ 진짜!!"

남자는 퉁명스럽게 몰아붙이고는 표를 끊고 선실 밖으로 나갔다.




큰엄마 집에 보따리를 전하고 점심을 얻어먹었다. 돌아오는 승선권은 남은 돈으로 여객선 터미널에서 끊었다.


은주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순자에게 돈이 모자라 벌어진 상황을 하소연했다. 은경은 저만치 떨어져 입도 뻥끗하지 않고 모른 척했다.

"얼라~ 그려? 엄마가 돈을 삼천 원밖에 안 줬니? 그러게! 오며 가며 둘이 낼라믄 육천 원은 줬으야 허는디... 내가 왜 삼천 원을 줬댜? 내가 착각했나 보네~ 그러믄! 갈 때 둘이 내구 올 때는 큰엄마헌티 받어서 오지 그렸냐?"

"김은경이 자기 들어올 때 내야 한다고 자기 거만 내고 내건 안 내줬어!!"

"지 것만 내구 니 건 안 내줬어? 어이구~ 그려서 워쩌케 했어?"

은주는 말을 하면서도 서럽고, 더럽고, 치사했다. 아까부터 참았던 눈물이 자꾸 나오려고 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상미 언니가 빌려줬어. 빌린 돈 갖다 줘야 해."

"어이구~ 저놈에 계집애를 워쩐다니... 엄마가 잘못 계산혀서 미안허다. 니가 이해 혀라. 은경이 저 놈의 계집애가 정상은 아녀!"

순자는 은경이 잘못을 하면 아빠에게 구박받고 자라 정서적으로 온전하지 못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내 새끼가 모자란 것을 어쩌겠냐며 은경을 두둔했다. 하지만 가르쳐 바로잡으려 하지 않으니, 순자의 등에 올라탄 은경은 폭주를 멈추지 않고 교묘하게 은주를 괴롭혔다.

은경은 괴롭힘에도 굽히지 않는 은주의 기세가 부러웠지만 얄밉기도 했으니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keyword
이전 03화03. 닮아서, 닮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