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주정뱅이의 밤

에세이 소설 - 엄마 없는 밤

by 온벼리
모든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고 소설의 모양새를 한 에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에세이 소설이라는 명칭은 없기에 정식 명칭은 소설입니다.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소주 한 병도 다 마시지 못하면서 영식은 오늘도 술이다. 죽을힘을 다해 뒷바라지했던 남동생이 대학 입학을 앞두고 갓 스무 살에 죽었다. 동생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컸던 만큼 슬픔이 깊었던 영식은 허구한 날 술과 노름이다. 낮에는 뱃일하고 밤이 되면 승진이네 구멍가게 쪽방에 들어앉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화투 노름을 했다. 영식은 노름꾼들 사이를 비비고 앉아 밤이 늦도록 화투를 쳤다. 판돈은 갈수록 커졌고 하룻밤에도 거액의 돈이 오가며 희비가 교차했다. 영식은 희보다는 비에 속했다. 국졸인 것에 열등감이 심했던 영식은 동생이 서울의 내로라하는 대학에 들어갔으니, 자신의 자존심도 회복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동생의 죽음은 슬픔뿐 아니라 패배감마저 안겨 주었으니 사소한 승부에도 집착하게 된 것이다. 약한 술 실력에 부족한 화투 실력까지 놀음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오늘도 빈털터리가 된 영식은 아쉬움에 집에 가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화투판을 기웃거렸다.




은주는 아침 준비로 분주한 부엌 부뚜막에 걸터앉았다. 아궁이 옆에 타다 남은 만 원짜리 지폐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엄마!! 이게 뭐야? 돈이네?? 이거 왜 다 탔어??"

타다 남은 돈 한 장을 들어 순자의 얼굴로 들이밀며 흔들었다. 순자는 아무 말 없이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었다.

은주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 눈을 내리깔고는 나직한 소리로 순자에게 말했다.

"엄마! 엄마가 그랬어? 왜 돈을 태웠데?"

엄마가 그랬냐는 말 한마디에 순자는 삼키려던 화를 거칠게 토해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느의 어메가 미쳤간디? 뭐 헌다구 돈을 태운다니? 써글 눔에 느의 아베가 그렸지!! 그런 짓을 헐만한 인간이 느의 아베 말구 또 누가 있간디?

어이구~ 미치구 환장혀!! 어이구~ 느의 아베 땜이 내가 뭇 살겄다!! 뭇 살겄어!!"

순자는 울먹였다.

"왜? 아빠 미쳤어? 돈을 왜 태워?"

은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해할 수 없는 영식의 행동을 빨리 설명해 보라는 재촉의 눈빛으로 순자를 바라보았다. 동조하는 은주의 말에 화가 살짝 수그러든 순자는 속상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렁깨 말이다. 그 미친 노므 인간이! 정신이 온전허믄 그 지랄을 허간디?

허이구~ 뱃일헌다구 멀미 혀 감서 죽을 둥 살 둥 고생혀서 벌어온 돈을... 씨벌 거~ 그 눔에~ 노름 헌다구 다 날리구!! 새벽이 겨 들어와 가꾸는... 돈 내노라구! 지랄~ 지랄~ 혔쌌드만!"

순자는 격앙된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여이 찾아내 가꾸는…. 돈 안 내놨다구 승질부려감서! 멀쩡헌 돈을 아궁이다 저 지랄 허구 처박았으니!!

어이구~ 내가 그놈에 지질맞은 성질머리 땜이 어찌 산다니... 뭇 살겄다 내가. 어이구~"

순자는 울먹이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부엌 밖으로 나가 연탄을 가득 쌓아둔 탄광 구석에 서서 한참을 소리 내 울었다.


영식은 간밤에 들고나간 돈이 다 털리자, 집으로 돌아와 숨겨놓은 돈을 찾으니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영식이 홧김에 불붙은 아궁이에 돈뭉치를 던져 넣은 것을 알아차리고 순자는 타들어 가는 돈을 급하게 끄집어내 발로 밟고 빗자루로 두들겨 불을 껐다. 순식간에 타들어 간 돈은 온전하지는 못했다.


영식은 순자가 없는 사이 아궁이 옆에 쌓아둔 돈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방으로 얼른 뛰어 들어갔다. 구석에 앉아 바닥에 지폐를 하나씩 늘어놓는 것을 본 은주는 옆으로 가 물었다.

"아빠 뭐 해? 그거 다 탔는데 어떻게 할라고?"

간밤의 일을 이미 알고 있었던 은주는 왜 그랬냐고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다 안 탔어! 이거 봐! 들 탄 거 많어. 은행이 가져가믄 불이 탄 거랑 찢어진 것두 새 걸루 바꿔준댜~"

영식은 타다 남은 돈들을 조심스럽게 돌돌 말아 노란 고무줄로 묶어 점퍼 안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집 나간 돈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런 영식을 보고 있자니 은주는 밥 하다 말고 서럽게 울던 순자의 뒷모습이 떠올라 한숨이 절로 났다.


이후로 아궁이에서 돈이 타는 일은 없었지만, 영식의 술과 노름은 여전했다. 돈을 탕진하는 꼴을 지켜볼 수는 없으니 여지없이 싸움은 벌어졌고 밤사이 치열했던 흔적들은 아침까지 남아 있었다.

"엄마! 이거 다 부서졌네! 또 아빠가 그랬어?"

순자는 대답 대신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늘지고 퉁퉁 부은 순자의 얼굴을 보니 밤새 한숨 못 자고 운 것이 분명했다. 영식은 옆에서 듣고 은주의 물음이 민망했는지 아무 말 없이 깨지고 부서진 흔적들을 치웠다.




이른 밤 어두운 대문 밖에서 영식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으며 비틀비틀 집으로 들어왔다. 한 손에는 선박용 연료가 담긴 20리터짜리 기름통이 들려 있었다. 영식은 신발을 신은 채 마루 위로 올라섰다.

"내가~ 이? 씨브럴~ 이놈에 집구석을~ 다 채워 버릴 테니 깨~"

아궁이에 돈을 태운 것으로 모자라 이번엔 집을 태우려는 것이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놀란 영식의 어머니 길려가 달려 나와 말렸지만, 영식은 길려를 밀쳐내고 기름통 뚜껑을 열어 마루 끝에서부터 뿌리기 시작했다. 순자도 달려들어 말리기 시작했다. 두 여자와 영식은 몸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영식은 자기가 뿌린 기름을 밟고 미끄러져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자빠졌다. 미끄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일어나서는 주머니 속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놀란 순자는 라이터를 빼앗으려 덤벼들었고 둘은 마루 아래로 떨어져 뒹굴었다.


라이터를 빼앗긴 영식은 씩씩거리며 두리번거리다 이번에는 부엌 옆 탄광에 있는 LPG 가스통을 끄집어냈다. 새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꽤 무거웠고 마음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자, 어깨에 메고 구부정한 자세로 일어났다. 안방으로 들어가려다 순자가 막아서니 작은 방에 내려놓고는 가스 밸브를 열어버렸다. 하필 은주와 은진이는 작은방에 있었다. 순자는 가스 밸브를 얼른 잠그고 영식을 마당으로 끌고 나갔다. 은주와 은진이는 고성이 오가며 몸싸움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지옥이었다.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몸이 떨려 왔다.

끌려 나간 영식은 지칠 줄 모르고 마당에서도 요란한 몸싸움을 벌였다. 시끄러운 소리에 밖으로 나온 이웃 사람들이 영식을 붙들어 말리기 시작했다. 남자 여럿이 말리니 영식은 쉽게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주정뱅이와 대화로 풀어 보겠다고 설득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인사불성인 데다 자기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사람과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영식은 사람들에 의해 대문 밖으로 끌려 나가며 소리를 질러댔다. 영식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집안은 조용해졌다. 마당에서 흐느끼는 순자의 울음소리와 옆집 봉룡이 엄마가 위로하는 소리가 들렸다.


밤은 깊어가고 있지만 작은 방에 가스통은 아직도 그대로다. 은주는 가스통을 방 밖으로 옮기려고 힘껏 들어 보았다. 말라깽이 은주의 힘으로는 문턱조차 넘길 수 없었다. LPG 가스통이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같은 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공포의 순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은주는 막무가내로 당하는 상황이 죽도록 싫었고 나약한 자신이 초라하고 비참했다. 울며 떨고 있는 동생 은진이를 부둥켜안고 잠을 청해 보려 했지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는 쉬 잠잠해지지 않았다.

자신도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다고 한참을 안고 다독여 은진이를 재웠다. 이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밤새 별일 없기를...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했다. 은주는 쪼그리고 엎드려 기도하다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지저귀는 참새 소리에 은주는 깨어났다. 동쪽으로 난 작은 창문으로 아늑하고 따뜻한 아침 햇살이 들어와 방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가스통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밤새 요란했던 폭풍은 아침을 더욱 고요하게 만들었다. 햇살은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마법을 부리는 것 같았고 어둡고 두려웠던 밤은 빛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유난히 햇살이 밝고 따듯한 아침이었다.

은주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향해 앉아 눈을 감고 햇살을 느꼈다. 어제의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했다. 밝게 빛나는 아침의 고요함에 감사하며 은주는 한참 동안 햇살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햇살은 은주에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 주곤 했다.

마당 담벼락 옆에 쌓아 놓은 밧줄 더미 위로 올라가 누우면 일광욕을 즐길 수 있었다. 은주는 둥글게 말린 밧줄 더미 위로 튜브를 타듯 엉덩이를 쏙 집어넣고 팔다리를 걸쳐 하늘을 향해 누워 눈을 감았다. 분명히 눈을 감았는데 눈앞은 온통 빨갛다. 눈꺼풀마저 통과해 버리는 햇살이 너무 좋아 은주는 실실거린다. 눈을 감고 따뜻한 햇살을 즐기다 보면 나른 함에 어느 순간 스르륵 잠이 든다. 햇살은 은주에게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순간을 선물해 주었다.


햇살은 오늘도 은주를 위로한다. 은주는 밝고 따뜻한 햇살이 곁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다.


은주는 영식이 무섭지 않다. 미운 적도 별로 없었다. 다만 어제 같은 일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 버거웠다.


순하고 매끄럽게 굴러가면 좋으련만 영식의 수레바퀴는 허구한 날 시끄럽게 삐그덕 덜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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