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들어주는 것으로 위로

에세이 소설 - 엄마 없는 밤

by 온벼리
모든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고 소설의 모양새를 한 에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에세이 소설이라는 명칭은 없기에 정식 명칭은 소설입니다.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영식은 대낮부터 술에 취해 들어왔다.

"니들 다 이루와 앉어 봐!! 이루와 앉어!! 은경이! 여기 앉구! 은주! 은진이! 민철이! 자! 순서대로 앉어!

얼릉 앉어봐! 아빠가 할 말 있응깨!"

오늘도 할 말이 많은 영식은 아이들을 불러 앉혔다. 얼굴은 목까지 벌겋고 혀는 살짝 꼬부라져 영식은 말했다.

"니들!! 아빠가 왜 키가 작은 줄 알어? 어려서부터 물지게를 지구 다녀서 그려! 니들 물지게가 얼~마나 무거운 줄 알어?? 져 봤으야 알지! 아빠는~ 넘들 학교 다닐 때 학교두 뭇 가구 물지게를 지구 다녔어. 니들 알어?"

알고 있었다. 영식의 입을 통해 이미 수백 번도 더 들은 이야기다.

"한~참 클 나인디 그 무거운 걸 맨~날 지구 나르믄서 내가 동생들을 다 키운 겨 내가! 무거운 거 맨날 지구 다니니깨 키가 크간? 그려서 뭇 큰겨!!

느의 할아베가 아퍼서 누워있응깨! 내가 돈 버느라 중학교두 뭇 가구! 어려서부터 물지게 지어 나름서 돈 번겨! 니들이 알긴 알어? 아빠가 공부를 뭇혀서 중학교를 뭇 간 게 아니여!! 아빠두 공부 잘혔어!!

이 눔에 새끼들!! 늬들은 호강허는 줄 알어! 호강허믄서 공부두 열심히 안 허구 이??

열심히 혀야 겄냐! 안혀야 겄냐! 이??"

물어보는 듯 보이지만 영식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문자답하며 혼자 계속 떠들었다.


물지게 이야기로 시작하는 말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니 아이들은 지겨웠지만 본인은 아무리 말해도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은진이와 민철이는 순자품으로 도망간 지 오래고 은경과 은주 둘이 앉아 버티고 있었다. 은주도 좀이 쑤셔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눈치를 살피던 은경은 화장실이 급하다며 몸을 비비 꼬았다. 영식은 귀찮은 듯 얼른 다녀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은주를 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은경은 대문 옆 재래식 화장실로 급하게 뛰어 들어갔다. 조금 뒤 화장실 문을 슬그머니 열고 나와 살금살금 대문 밖으로 빠져나가던 은경이 은주와 눈이 마주쳤다. 영식은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치채지 못했다. 은경은 은주에게 눈을 한번 찡긋하더니,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조심스럽게 대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중이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 영식이 알아채지 못한 것에 쾌재를 부르며 은주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밖으로 후다닥 뛰어 사라졌다.

은주는 은경을 이르지 않고 못 본 척했다. 영식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은주는 오늘도 영식의 넋두리는 말없이 듣고 있다.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뻐근해 몸을 움질거렸다. 지루한 티를 내면 영식의 마음이 상할까 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자세를 고쳐 앉고는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감정 표현이 서툴고 무뚝뚝한 부모 밑에서 자랐으니 은주 역시 감정 표현에 서툴다. 이미 어른인 영식을 안아주거나 말로 위로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식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은주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자리를 지키며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거칠기는 하지만 영식은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상처들을 내보이며 하소연하고 있었다.

영식의 솔직함 덕분에 은주는 영식에게 아픔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른스럽지 못하고 못난 행동을 할 때도 많은 아빠였지만 마음이 아파서 그런 거라고 영식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지는 것을 보다 못한 순자는 은주를 일으켜 세우며 영식을 타박했다.

"어이구! 작작 좀 혀! 애 앉혀놓고 언제꺼정 떠드는겨? 이제 그만 즘 혀!

은주 일어나서 작은 방이 들어가! 애를 잡을라구 그려? 이제 그만 혀!!"

이미 떠들 만큼 떠든 영식은 조금 속이 후련해졌는지 순자의 타박에 별 대꾸 없이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가끔 늦은 밤 자는 아이들을 깨워 앉혀두고 떠들 때도 있었다. 자다가 일어나 앉아 있으려니 은주도 짜증이나 슬며시 누워 모른 척 버티다 보면 순자는 영식을 끌고 나갔다. 영식의 넋두리는 끝이 없었고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도 없으니, 술을 마시면 허구한 날 아이들을 붙들고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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