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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를주세요 Mar 05. 2022

심해어, 그리고 우아함에 대한 단상

일상의 수압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하여

※ 원본 글 작성일이 2월 28일이었으므로 업로드 날짜와 글 속의 날짜가 다릅니다.



        2022년 2월 28일. 어느덧 새해가 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시간은 제 감각보다 빠르게 흘러갑니다. 해가 갈수록 그 시간에는 점점 가속이 붙고 있습니다. 나의 정신은 이곳에 있는데, 어느덧 육체의 시간은 저 너머에 가 있네요.



        생활을 위해 살기는 싫어, 라는 노랫말을 격언과도 같이 마음에 새기던 날이 있었습니다. 주어진 모든 순간을 향유하면서 살고 싶다고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경전과도 같이 옆구리에 끼고 살던 시간이 있었지요. 생생한 감각, 새로운 생각, 무한한 가능성이 눈 앞에 펼쳐져 있던 날들. 마치 두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한여름 무더위와 같이 생생하게 느껴지던 삶의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나 자신과 내 삶에 대한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확신. 주머니 속에 밥 한 끼 제대로 사 먹을 만한 여유도 없던 비루한 현실이었지만, 정신은 벼린 날붙이처럼 날카로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는 삼십 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가끔 멈춰 서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다 보면, 무섭도록 정확히 위의 노랫말처럼 ‘생활을 위해’ 살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몇 번의 성공과 실패, 희망과 좌절, 만남과 헤어짐을 겪는 일을 반복하면서, 삶에 대한 제 확신은 ‘그래, 산다는 게 다 이런 거겠지’라는, 짐짓 다 안다는 듯한 건방진 체념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다들 비슷하구나’ 하며 안도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사포처럼 거친 생활의 표면에 쓸리면서 저는 모난 곳 없이 평범한 하나의 돌멩이가 되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강가에 가면 흔히 주울 수 있는 조그맣고 매끈한 돌멩이 말이죠. 그런 돌멩이로서 살아가는 삶이 나쁘다는 것은 아닌데, 평범한 삶은 저에게 있어 공포로 다가옵니다. 다른 게 아니라, 결말이 정해져 있는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정말? 이게 다라고? 호주의 울루루나 그랜드 캐년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울산바위쯤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심해어의 일종인 아귀. 무섭다. (출처 : 허핑턴포스트)



        언젠가 우연히 심해어의 사진을 모은 글을 볼 일이 있었습니다. 어둡고 깊은 바닷속에서 높은 수압을 견디는 심해어. 이런 환경에서 적응하기 위해 심해어는 자신의 몸을 변화시킵니다. 높은 수압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속을 안으로, 안으로 욱여넣습니다. 어두우니 눈이 퇴화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먹이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견딜 수 있도록 신진대사를 극도로 제한합니다. (일종의 절전 모드인 거겠지요.) 생존에 최적화된 형태로 진화한 것이지요.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매사에 덤덤히 임하는 모습, 우리가 흔히 ‘어른스럽다’고 하는 모습이지요. 현실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맞는 방향인가 싶을 때가 있어요. 우리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내 감정과 감각을 도려내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마치 뇌에서 고통을 느끼는 부위를 도려내면 아픔을 느낄 수 없듯이. 그렇다면 이건 성숙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서서히 퇴화되는 것은 아닐까요.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차라리 어른 따위는 되지 말 걸 그랬어. 이런 만화에나 나올 법한 클리셰 같은 말들을 뇌까리면서, 한없이 작아지는 저를 느끼곤 합니다.



        그러던 와중 모 맞춤 정장업체 대표의 인터뷰 영상을 보게 되었어요. 가격이 워낙 높은지라 직접 해 입지는 못하고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기만 하는 곳이긴 하지만, 그 분의 글은 몇 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복식과 예술,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글을 읽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지요. 그런 만큼 기대를 안고 영상 속 이야기를 듣는데, 세상에, 우아하다는 단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더라고요. 깃털처럼 포근하고 편안한 목소리, 섬세한 어휘와 표현의 선정, 기품이 있다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어요.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생각은 가볍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옷을 짓는 행위 너머 예술과 공예, 삶에 대한 깊고 치열한 사유와 성찰이 느껴졌어요. 그러한 과정들이 켜켜이 쌓이며 내면의 토양을 단단히 다진 결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피어나는 격조 높은 품성이 만들어지는 것이겠지요. 모두가 목청 높여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시대에서 이런 덕목은 더욱 특별합니다. 


<셰프의 테이블(Chef's Table)> (출처 : 넷플릭스)


        비단 위 영상이 아니더라도, 우아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은 여럿 있습니다. 저는 장인과 그가 만든 결과물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데요. 최근에 즐겨 보고 있는 것은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셰프의 테이블>이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매 에피소드마다 서로 다른 전 세계의 명망 있는 셰프들과 그들의 요리 철학을 보여줍니다. 요리사들마다 추구하는 음식의 세계가 제각기 다르고 성격 또한 각양각색이지만, 그들 모두에게서 보여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리에 대한 깊은 애정과 왕성한 탐구 정신, 새로운 것에 대한 열린 자세, 치열한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자세가 그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요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허기가 질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워요. 그렇지만 저는 그 화려한 음식들보다,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 요리사들의 모습에서 숭고함과 우아함을 느낍니다. 굴곡진 삶을 덤덤히 이야기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 있다.”라고 자부심 있게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은 ‘고결하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느끼게 합니다.



        우아함과 고상함이라는 개념이 멸종된 공룡과도 같이 기이하게 여겨지는 요즘 세상에서, 그러한 가치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저는 특별한 감정을 느낍니다. 존경심과 더불어, 나 또한 저러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향상심(과 약간의 질투)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이에요. 이들이라고 해서 삶이 순탄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니, 오히려 더욱 치열했으면 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삶이 자신들을 무너뜨리도록 두지 않고 오히려 그에 정면으로 부딪쳤습니다. 심해의 높은 수압이 그들을 터뜨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싸운 그들은 결국 바닷속 밖으로 헤엄쳐 나와 자신만의 경지를 이룬 것이죠. 우아함과 고상함, 품격, 일견 둥둥 떠다니는 듯 가벼워 보이는 말들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투쟁 끝에 얻어낼 수 있는 전리품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금 삶에 대한 의지를 다잡게 되네요. 사무엘 울만은 그의 시 <청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雪]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된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다.” 글을 쓰는 와중 어느덧 3월의 첫째 날이 되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봄의 계절이에요. ‘냉소의 눈’과 ‘비탄의 얼음’을 녹이고, 우아한 존재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언제나 지금이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삶을 향유하고 살아야겠습니다.



-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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