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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목요 산책 07화

봄 06. 나의 노래는 나를 부르고

by 지호

지나간 글들은 이따금씩 멀어진 내 마음을 다잡아 주기도 하나보다. 문득, 작년 이맘때인가 봄에 썼던 글이 떠올라 파일을 열어보았다.




목공용 풀을 사러 나가야 된다고 생각한 순간 삶의 안정감을 느꼈다.

소파에 가만히 누워 책을 읽다가 덮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오전 11시 20분.

한 시간여 뒤면 아이는 하교를 한다. 그 사이 점심을 먹고 문구점에 들러 방과 후 활동에 필요한 준비물을 사놔야 한다.


벽에 붙은 시계에서 가만히 테이블 위로 시선이 옮겨갔다.


해가 잘 드는 거실은 조명을 켜지 않은 부엌의 테이블도 한 낮이란 걸 알 수 있게끔 해준다.

문득 삶의 안온함이 느껴졌다.

찰나이지만 이 순간이 좋아서 기록을 하려 몸을 일으켰다.

무선 키보드를 집어 들고 아까부터 웅웅 거리던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욕실 환풍기 스위치가 켜져 있었다. 부랴부랴 아침 일찍 머리를 감고 나와 불을 끔과 동시에 환풍기를 켜놓고 간 아이의 흔적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이 사소한 스위치 하나에도 사랑을 마구 느껴버리고야 마는 양털 같은 마음의 존재인 건가. 마치 겨울날 눈 쌓인 마당 위에 작은 고양이 발자국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고양이를 생각하며 웃음 짓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아이의 자취란 이토록 사랑스러운 거구나.


아침 내내 머리를 감내 마내 실랑이를 벌였던 일 따위는 이미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다.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을 아이의 손으로 켜고 끄고를 반복하느라 욕실 입구 스위치의 주변 벽은 거뭇거뭇하다. 얼핏 보면 범죄 현장에서나 볼 법한 집의 얼룩덜룩한 벽지같이 도 보이지만 밖에서 모래를 실컷 만지다 돌아온 손, 집에서 신나게 밥을 먹다 음식물이 묻은 손, 크레파스를 만지고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하루도 한시도 무언가를 만드는데 전념하느라 쉴 틈 없이 움직이는 그 손의 흔적이라 또 웃음이 난다.


손이 바쁜이의 벽은 창작의 증거를 남기는 건가.

괴상한 탐정가가 된 흉내를 혼자 내어본다.


아침 내내 불안하고 고독했다.

이런 기분에 침잠되기 싫어 책을 읽었는데, 독서를 자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책을 덮었을 때의 기분은 참으로 좋아한다. 세상이 잠시 멈추어 독서를 하는 나를 기다려준 기분. 책장을 덮고 주위를 둘러보면 멈췄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는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는 가만가만히 찰나의 시간을 보듬어보게 된다.


개켜야 하는 빨래더미와 곧 돌릴 빨래들. 건조기에 들어가기 전 깨끗하게 비워야 할 먼지더미들. 냉장고에 가만히 놓인 엊그제 사놓은 콩나물과 하얗고 동그란 무. 자연스레 떠오르는 저녁 고민들. 내 밥을 먹고 뽀얗게 자라난 아이. 내 사랑을 발라주고 묻혀주며 울고 웃으며 달려 나가는 아이. 함께 나무처럼 자라나는 존경하는 나의 동료, 남편. 그간에 지나온 나. 나. 그리고 또 나. 나는 가정이라는 곳에 뿌리를 내려 자라나는 나무.

해가 들고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아이의 눈빛을 보고 남편의 거칠어가는 손을 볼에 부비며 살아있음을 느끼고 고양이의 숨소리와 한없이 커져가는 고무나무와 그 안의 햇살과 집안의 공기와 많은 생각과 눈물과 웃음과 설움으로 밥을 짓고 글을 쓰는.

글을 쓰는 나.


세상의 오해와 비틀린 시선과 묻지 않아도 답해주는 과한 친절함에 몸서리치던 어린 날은 지나고 이젠 단단한 뿌리로 스스로에게 물을 주며 오롯이 자라나는 새롭고도 오래된 내가 있다.


찰나의 지저귐과 찰나의 폭풍우 찰나의 서린 바람은 갖가지 생채기를 남겼지만 다시 일어나 옷을 입고 가만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자신만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무의식의 꿈에서 바라본 아침이었다.

그 에너지의 근원이 무한한 것일지언정. 나는 나를 무너뜨릴 최소한의 힘을 갖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쓴다는 건 내게 스위치를 쥐어주는 일. 삶을 바라보고 자라날 때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 하는 최소한의 행위.

어쩌면 번복할지도 모를 글이지만.


나를 위한 글쓰기이다.





아. 내가 이렇게도 따뜻한 글을 썼었구나. 하지만 이 글은 힘든 파도를 한 번 넘긴 뒤에 썼던 글이란 걸 알고 있다. 잠시 거친 바람과 파도가 멎고 따뜻한 햇살 아래 누워 볕을 쬐는 기분으로 썼던 글인걸. 그렇지만 지금 보니 더없이 좋다. 오늘을 위해 꺼내먹으려고 고이 저장을 해놓았나 보다.


아이가 점점 사춘기가 오는 게 느껴진다.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이따금씩 서운해지고 아이의 등을 홀로 바라보는 시간이 조금씩 느껴진다. 언제 뿌려놓았는지도 모를 작은 씨앗들이 움트는 걸 보는 기분이다. 초록의 사춘기는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다. 언젠가는 넘치듯 파랗게 너의 언덕을 수놓을 테지.


나도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호르몬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게 느껴진다. 감정변화가 크고 이따금씩 공허함을 느낀다. 자주는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씩 가슴에 커다란 바람길이 휑 하니 뚫려있는 기분이 든다. 뭔가 모를 시린 마음에 나도 모르게 따뜻한 음식을 찾는다. 작년까지는 남편의 손을 자주 얼굴에 대고 품 안으로 웅크리며 들기도 했는데 이젠 혼자서 나에게 따뜻한 것들을 찾아 스스로를 채워주는 일들이 많아졌다. 오히려 이제는 남편이 내게 기댈 수 있게 덤덤하고도 따뜻한 마음을 품어야겠단 생각을 종종 한다. 양지바른 곳의 작은 언덕처럼.


운동의 강도를 조금씩 높이고 온기가 가득한 밥상을 차려 먹으려고 평소보다 조금 더 부지런해졌다. 따뜻한 것들을 모으고 만지고 찾는다. 이것도 나이 들어간다는 의미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란 생각이 든다. 이젠 뭐든. 자연스러운 게 좋다.


“엄마, 기분이 안 좋아?”

아침을 분주히 준비하는데 아들이 묻는다. 이 말이 지금까지 머릿속에 맴돈다.

“음. 엄마는 기분이 좋은데 호르몬이 엄마 기분을 망치려 하네? 엄마는 기분 좋아. 너무 마음 쓰지 마.“

하며 우스꽝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의 호르몬과 너의 사춘기가 어떻게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이면 이렇게 글을 쓰며 마음을 정돈하고 따뜻하고 무용한 것들을 그러모아 담담한 언덕의 시간을 나고 싶은 바람이야.


호르몬 때문이라지만, 요즘의 내 마음과 행동이 부끄러워 쓰는 일종의 고백의 글이다. 이 글도 내년에 보면 달리 보이겠지. 나의 글들은 나를 위한 노래가 되어 시간을 다독이고 사랑을 건네준다. 그러니 써야 한다. 쓰는 것이 좋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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